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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장건상 張建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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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장건상
한자명 張建相
본 관 인동(仁同)
이 명 아명: 명상(明相), 이명: 건상(健相), 烽相(), 도산(濤山), 자: 찬성(贊成), 아호: 소해(宵海)
출신지 경북 칠곡
생몰년월일 1882. 12. 19 ~ 1974. 5. 14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동제사, 대한적십자회, 의열단, 고려공산당, 극동피압박인민대회, 국민대표회의, 군사통일회, 조선민족혁명당,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임시정부 국무위원·학무부장,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 상무위원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86)

1882년 12월 19일 경북 칠곡군(漆谷郡)에서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인 부친 장운원(張雲遠)과 모친 이윤영(李閏泳)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883년 부산부 좌천동(佐川洞)으로 이주하여 유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현재 이 집은 ‘국내항일운동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좌천재(佐川齋)라는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육영재(育英齋)에서 근대 학문을 배웠다.

1901년 19살에 부산 초량의 이감찰 댁 외동딸 이찬성(李贊成)과 혼인하여 아들 지갑(志甲)과 딸 수원(守遠) ・ 수양(守養)을 낳았다. 유학과 망명으로 가족들이 오랫동안 헤어져 살다가 1923년 베이징(北京)에서 합류하였다고 한다.

아들 지갑은 의열단에서 운영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3기생 출신으로, 1933년 상하이(上海)에서 일제헌병대에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변절하였다. 첫째딸 수원은 1939년 4월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일본영사관 소속 한인(韓人)형사들에게 붙잡힌 후 생사가 불명이며, 둘째딸 수양은 난징(南京)에 있는 진링대학(金陵大學)을 졸업한 뒤 줄곧 부친을 보필하였다. 부인은 1954년 별세하였다고 한다. 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 대한민국정부 초대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원을 지낸 장택상(張澤相)과는 12촌간이라고 한다.

육영재에서 공부하던 중 영국인 선교사 엔젤의 소개로 장로교에서 운영하는 강습소에서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1903년 서울로 올라와 한성순보(漢城旬報) 주필 장지연(張志淵)의 소개로 공립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한 다음, 캐나다인 선교사 게일(J.S.Gale)에게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데 충격을 받고 낙향하였다.

이후 일제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아는 것이 급선무이고 근대적인 지식과 기술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05년 도쿄(東京)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시가행진 모습을 지켜보면서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실력을 길러야 하리라는 결심을 다졌다. 이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여 정치학을 공부하였으나, 1년을 미처 넘기지 못하고 자퇴해 버렸다.

그리고는 주일 미국공사관 무관인 이스트레이크가 자신의 집에 세운 한인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일제당국의 압력으로 폐쇄됨에 따라 일본에서의 수학에 한계를 느끼고 1907년 귀향하였다. 고향에 기거하면서 다시 미국 사관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하고 부모님을 설득하였다. 1908년 3월 게일 목사의 추천장을 지니고 청진항을 떠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순만과 유인석 의병장을 만났고, 정순만이 써 준 소개장을 휴대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는 이위종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이위종을 만나 그의 부친이며 대한제국 주러시아공사를 지낸 이범진의 집에서 3일간 머문 후, 그의 소개장을 소지하고 열차편으로 프랑스에 도착하여 이범진이 소개해준 프랑스인 집에서 이틀 간 머물고 런던으로 갔다. 그곳에서 형과 친교가 있는 영국인 헌트(Hunt)의 도움으로 사우샘프턴(Southampton) 항에서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1908년 6월 7일 뉴욕에 도착했으나, 여권이 없어 억류되었다. 간수의 도움으로 마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고 귀국 도중 뉴욕에 들른 이상설(李相卨)과 연락이 닿아 그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게일 목사가 추천해 준 인디애나주 밸프레이조(Valparaiso)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과에서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하였다.

재학 중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다는 소식도 들었고, 미국신문에 보도되는 중국과 러시아령을 무대로 한 한인들의 독립운동관련 기사를 보며 졸업 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에 몸 바칠 결심을 굳혔다.

1912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안창호(安昌浩)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도 받았으나, 중국으로 건너 가야한다는 일념에 이를 거절하였다. 이러던 중 상하이의 신규식(申圭植)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연락을 받고 그의 중국행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포도밭 노동 등을 통해 중국행 여비를 마련한 다음 1916년 시애틀항을 떠나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신규식에게 독립운동에 몸 바칠 것을 맹세하며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이후 만주 안동현(安東縣)에 파견되어 영국상선회사인 이륭양행(怡隆洋行) 안동지사장 조지 쇼(George L. Shaw)와 친교를 맺으면서, 2년여 동안 망명 인사들의 길 안내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두봉(金枓奉) ・ 김원봉(金元鳳) 등과 만났다.

1919년 3・1운동 이후 김두봉과 함께 이륭양행 소속 선박을 이용하여 상하이로 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20일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현순 ・ 여운형 ・ 백남규 ・ 이광수 ・ 이광과 더불어 임시정부 외무위원에 선임되어, 외무총장 김규식(金奎植)을 보좌하였다. 시점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박용만(朴容萬) 외무총장과 함께 외무차장에 선임되었다. 또 1919년 7월에는 대한적십자회 상의원(常議員)에 선임되었고, 의열단(義烈團) 활동에도 관여하였다. 일제 자료에 따르면 임정 외무차장으로 근무하면서 폭탄 국내반입 계획에 참여하였다. 이후로도 의열단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독립운동자 및 독립운동단체 간의 갈등과 이합집산에 실망을 느끼고는 1921년 1월 23일 외무차장 직을 사임하고 베이징으로 가서 의열단과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1년 4월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 조직 시에는 9인의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러시아 볼셰비키당 산하 이르쿠츠크공산당 한인지부 간부인 조훈(趙勳)의 권유로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위원 겸 정치위원에 선임되었다.

이어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간부들과 함께 전세 열차편으로 5월말 무렵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6월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 참석하였고 레닌을 만났다. 레닌은 소위 문제의 ‘레닌자금’ 지원도 약속하였다. 1921년 9월 이르쿠츠크 재러한인공산자대회에 참가 의장단에 선임되어 사회를 맡았다. 이때 국제공산당 극동책임자인 보리스 슈미야츠키(Boris Shumiatsky)를 만났고, 고려공산당의 연락관계 유지를 위해 한명세와 함께 연락책임자로 선정되었다. 모스크바에서 1개월 정도 머문 뒤 하얼빈을 거쳐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이후 베이징에서 의사 개업을 하고 있던 한흥교 ・ 김철훈 등과 고려공산당 대외활동에 종사하다가, 1922년 1월 22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김규식이 수석대표였고, 여운형은 대회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임되었다. 많은 관련 자료에서는 참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표단의 연락업무를 차질없이 수행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동분서주하다 보니 이미 중국경찰의 경비가 삼엄하여 결국 참석하지 못하였다”고 증언하였다.

1922년 10월 20일 코민테른이 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간의 갈등을 중재 해소하기 위해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고려공산당 합동대회를 소집하였는데 여기에 이르쿠츠크파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베르흐네우진스크까지 갔지만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조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코민테른은 양당의 해산을 명령하고, 꼬르뷰로(고려국)를 설치하였는데, 1922년 12월 그는 한명세 ・ 김만겸과 함께 ‘이르쿠츠크파 위원’에 임명되었다. 상하이파 위원으로는 이동휘와 윤자영이 임명되었다.

이후 공산주의와 결별의 길을 걸었다. 1924년 2월 꼬르뷰로가 해체되고 오르그뷰로(조직국)가 설치되었는데, 이때도 준비위원에 선임되었으나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베이징에 머물면서 1923년 겨울부터 김성숙 ・ 장지락 ・ 차응준 등과 『혁명(革命)』을 간행하였다. 이 잡지의 편집대표를 맡았으며, 김성숙은 주필이었다. 공산주의 이론을 많이 소개하였지만, 이들은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적극 주장하였다. 『혁명』은 격월로 1926년까지 3년간 발간되었다.

한편 1923년 1월 3일부터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시베리아부 대표’로 참석하였고, 회의초안기초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의 과정에서 창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6월 3일 창조파들이 수립을 선포한 ‘조선공화국’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1923년 8월 20일 창조파들은 상하이를 떠나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하여 신한촌에 본부를 설치하였으나 레닌의 사망과 일 ・ 러 협상 등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어 1924년 2월 소련 정부에 의해 추방 조치를 당하면서 와해되었다.

1924년에 들면서 베이징의 한인사회에는 공산주의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김성숙 ・ 장지락 ・ 양명 ・ 김용찬 ・ 김봉환 ・ 이낙구 등과 공산주의자들을 결속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였다. 창일당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북경지부 역할을 하였는데 유학생들이 주류를 이뤘으며 그가 ‘지도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력 확대를 위해 유학생들을 주목하였다. 한인 유학생 가운데 공산주의 이론가로 이름이 높은 양명(梁明)과 김성숙(金星淑)이 주 대상이었다.

1926년 10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11월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 결성에 참여하였고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10월 10일 쌍십절(雙十節) 기념일에 베이징대학(北京大學)에서 ‘약소민족의 설움과 항일의식’이란 주제 하에, ‘한・중 공동으로 일본을 배격하자’는 요지의 영어강연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중국인민을 선동하여 국헌을 혼란시켰다”는 죄명으로 일본인들의 사주를 받은 중국경찰에 구금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8년 가을 감옥에서 나와 1930년 한때 베이징에 소재한 화베이대학(華北大學)의 영어교수로 재직하였고, 1935년 7월 난징에서 결성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참여하였다. 이외에 자세한 활동 사실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딸 수양(守養)의 회고에 따르면, 1937년 4월 상하이 프랑스조계 안에 있는 공원에서 의열단원 한 사람을 만나고 집에 돌아와 아침을 먹으려던 차 한인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고 한다. 변절한 아들이 밀고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후 반 년 동안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 내에 구금되어 있다가,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정식재판도 거치지 않고 구금하고 있다가 법적으로 기소시킬 명분을 찾지 못하자 기소유예로 석방하였다. 유치장에서 나왔을 때는 사경을 헤맬 정도로 나약해졌고 양친은 이미 사망하였으며 부유했던 집안은 몰락한 뒤였다.

폐인이 되어 가족에게 돌아온 뒤 1년여 동안의 치료로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그는 영어사전 집필에 전념하는 것으로 위장하여 일경의 감시를 피하였다. 한편 일제경찰은 김원봉을 체포하려는 공작을 꾸미려고 회유하였고, 일경의 제의를 수락하는 척 위장하여 베이징에 와서 일제 특무기관과 연계 활동하고 있던 일본공산당 간부 출신의 기타하라 다쓰오(北原龍雄)로부터 홍콩행 여권과 여비를 지급받아 상하이를 거쳐 홍콩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제기관을 역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어떻게 기타하라와 닿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지만, 충칭(重慶)의 한인 진영과 연계가 이루어져 홍콩에서 비행기편으로 충칭에 왔다. 김원봉이 사람을 보내 그를 안내하였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1941년 충칭에 도착한 후 자신이 임정에 합류한 이유를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걸었기 때문에 머지않아 망하고 만다. 일본이 망하는 날 우리는 독립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대비해야 한다. 그 대비란 결국 해외의 우리 항일단체들이 모두 단합하여 통일된 조직을 갖추는 것인데, 그 통일된 조직은 그래도 임정이 기둥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였다.

자신의 국내탈출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오해를 푸는 데 진력하였고,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우파와 김원봉의 민족주의 좌파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2년 11월 18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43년 4월 20일 학무부장에 선출되었다. 1944년 4월 24일 임시의정원에서 주석 김구 ・ 부주석 김규식 등과 함께, 국무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5월 4일 16기 제1차 국무회의에서 ‘관제수개기초위원(官制修改起草委員)’에 선임되었다.

1945년 4월 김구 주석의 밀사 자격으로 옌안(延安)의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에 파견되었다. 충칭을 출발하여 광복군 제2지대 본부가 있던 시안(西安)까지 기차로 가서는 다시 도보로 3일 만에 옌안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독립동맹 주석 김두봉을 만나 “모든 해외의 독립운동세력이 대표자를 선정, 충칭에 모여 연합전선 구축에 관해 협의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두봉도 이에 찬성하여 충칭으로 떠날 것을 약속하는 등, 합의점을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럴 즈음 8・15 해방의 소식이 옌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바로 만주(滿洲)를 거쳐 환국하자는 독립동맹측의 제의를 거절하고, 다시 충칭 임정으로 돌아와, 12월 1일 ‘임정 제2진’으로 환국하였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를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가하여 의장단에 선임되었고 강연단의 일원으로 경상 ・ 전라 ・ 충청 일원을 순회하였다. 6월 조선인민당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1월 사회노동당 임시중앙위원, 감찰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47년 5월 근로인민당 결성에 참여하고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2월 민족자주연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48년 2월 유엔(UN)한국위원단과 면담하고 주한 외국군 철퇴를 요구하였다.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였다.

회의 기간 중 “우리 겨레는 공산주의를 갖고는 살 수 없다. 우리가 근로인민당 운동을 하는 것은 공산사회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이념으로 평화롭게 살려는 데 있다”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되어 북한측에 의해 연금되어 다른 인사들보다 보름 늦게 서울로 돌아왔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부산 을구에 입후보하여 전국 2위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1957년 11월 ‘근로인민당 재건사건’으로 인해 구속되었다가 1심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1960년 4・19 직후 혁신동지총연맹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해 7월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였다. 1961년 1월 혁신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다. 2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의장이 되었다. 그 후 반민주악법 반대투쟁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5・16군사정변 후 박정희정권에 의해 투옥되어 10월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의 정치노선은 ‘혁신계’로 통칭되는데, 한국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숱한 간난을 이겨내다가, 1974년 92세로 사망하였다.

독립운동 및 정치노선과 사상은 해방정국기 경북 선산에서 열린 민전강연단 강연에서 “일제 때는 왜놈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어떤 힘이라도 이용해야 하였다. 그래서 내가 공산당도 따라 다녔고, 연락도 했었다. 일본을 쫓아내는 데는 소련의 힘이 필요하므로 나는 그렇게 활동한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도 우리나라를 공산주의국가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소련의 종노릇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한 데 잘 함축되어 있다 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002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한상도⋮

|참고문헌|

李庭植 면담, 金學俊 편집·해설,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 김성숙·장건상·정화암·이강훈의 독립투쟁』, 민음사, 1988 ; 소해 장건상선생 어록비 건립회 편, 『宵海張建相先生資料集』, 牛堂, 1990 ; 강대민, 「소해 장건상의 생애와 민족독립운동」, 『문화전통논집』 1, 경성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 1993 ; 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 창작과비평사, 1996 ; 염인호, 「중국 관내지방에서의 조선인민족해방운동과 靑山和夫」,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7, 2001 ; 김재명, 「장건상 : 한 진보적 민족주의자, 그 파란의 역정」, 『한국현대사의 비극 :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 선인, 2003 ; 조규태, 「1920년대 재북경 한인 革命社의 『革命』 발간과 혁명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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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 축하회_19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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