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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이탁 李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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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이탁
한자명 李鐸
본 관  
이 명  
출신지 평남 성천(成川)
생몰년월일 1889. 3. 18 ~ 1930. 5. 17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신민회, 부민단,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광복군사령부, 대한적십자회, 대한교민단, 중한호조사,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국민대표회기성회, 국민대표회주비회, 농민호조사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08년 신민회 가입, 1912년 서간도 부민단 참여, 1919년 11월 중국 안둥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 참여, 1920년 대한광복군사령부 결성, 상하이 대한교민단 및 중한국민호조사 등 참여, 1921년 8월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조직, 1923년 국민대표회의 평안남도 대표로 활동, 1927년 4월 농민호조사 조직, 민족유일당운동 참가, 1929년 12월 임시의정원 의원 선출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63)

1889년 3월 18일 평남 성천군 영천면(靈泉面) 노동리(蘆洞里) 석계촌에서 이용규(李龍奎)와 김도성(金道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제용(濟鏞), 호는 동우(東愚), 자는 태연(跆然)이다. 부친 이용규는 성천군을 비롯하여 개천군과 강동군에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부농이었다.

5살 때부터 한학을 배운 뒤 1908년 평양 대성학교 속성사범과에 입학하여 안창호의 지도를 받았다. 이 시기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만주 일대를 답사하며 독립군 기지를 물색하였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9월 서간도로 망명하여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이회영과 이상룡 등을 도와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하였다. 1911년 고향으로 돌아와 가산을 정리하고 아우 이석(李錫)(본명 李濬鏞)과 함께 재차 망명하여 류허현 야저구(野猪溝)에서 토지개간사업을 벌였다.

1912년 경학사를 이은 한인 자치기관 부민단(扶民團) 결성에 참여하였고, 신흥학교유지회를 조직하여 운영기금을 조달했다. 1913년 류허현에 있는 일신학교(日新學校)와 1914년 신흥무관학교 경영에 참여하다가, 1916년 퉁허현(通河縣)으로 이주하였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11월 중국 안둥(安東)(현 단둥)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조직에 참여하여 교육부장에 선출되었다. 1920년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표로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되어, 서간도지역에 군사기관 창설에 대해 협의하였다. 같은 해 8월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한독립단, 의용단을 통합하여 임시정부의 서간도지역 군사기관으로 대한광복군사령부가 발족하자, 참모장 겸 사령장대리를 맡았다.

1920년 미국 의원단이 중국을 거쳐 한국을 방문하는 것을 계기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군 단체는 선전효과를 노리고 ‘작탄(炸彈)거사’를 추진하였다. 광복군총영의 영장 오동진(吳東振)과 협의하여 7월과 8월 80여 명의 결사대를 국내로 밀파하여 친일파 처단과 식민기관 폭파 등의 거사를 추진하였다. 이 거사로 1921년 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오동진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1920년대 초반 상하이 대한적십자회와 대한교민단에 참여하였고, 중한국민호조사에 가담하여 중국 혁명가와의 연대활동에도 힘썼다. 태평양회의 개최 소식이 알려지자 1921년 8월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를 결성하여 임시정부 대표의 외교활동을 지원하였다. 같은 시기 독립운동계의 최대 현안으로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가 대두하였다. 임시의정원이 군책과 군력을 마련할 능력이 없다고 결론짓고 이를 대신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한 것이다.

임시정부에서도 같은 해 5월 12일 안창호가 노동국총판직을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제창하고 나섰다. 같은 해 6월 안창호가 여운형 ・ 김규식 등과 조직한 국민대표회기성회의 집행위원으로 참가하였다.

하지만 이후 우파 독립운동세력은 1921년 11월부터 열린 태평양회의 곧 워싱턴 군축회의에 집중하였고, 좌파 독립운동세력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하게 되면서 국민대표회의 소집 움직임은 소강상태에 처하였다.

1922년 2월 두 회의가 끝나면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이 재개되었다. 그는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으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위해 힘썼다. 1923년 1월 초부터 6월 초까지 국내외 지역 대표와 단체 대표 125명이 참가하여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해 재정분과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1923년 8월 베이징(北京)으로 옮겨 안창호와 함께 이상촌 건설 사업에 뛰어들었다. 만주일대를 답사하면서 후보지를 물색하고, 1926년 지린성(吉林省) 자오허(蛟河) 일대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이상촌 건설을 위한 개간사업을 벌였다. 이와 함께 1927년 4월 농민호조사를 조직하였다. 안창호 ・ 이유필 등 흥사단 원동위원부 동지 및 오동진 ・ 김동삼 등재만 독립군 지도자들과 한인 동포의 영농 기반을 마련하고 농민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결성한 것이다.

1920년대 중반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과 재만 독립군단체 통합운동에 동참하였다.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의 영향을 받은 ‘이당치국(以黨治國)’원리에 입각하여 강력한 독립운동 통일기관으로서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려는 것이었다. 1927년 2월 지린성에서 안창호와 함께 500여 명의 재만독립군 단체의 주요인물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유일당촉성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경찰에 의해 안창호를 비롯한 독립군 지도자 200여 명이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행히 그 때 베이징행 열차에 타고 있어 위기를 모면하였기에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급히 달려온 이유필과 함께 중국정부를 상대로 석방 교섭을 벌였다.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20여일 만에 안창호를 비롯한 피검자 모두가 풀려나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 지린성과 펑텐성(奉天省) 지역의 한인학교 폐쇄령과 한인 퇴거령이 내려지자, 손정도와 함께 중국당국과 교섭하여 이를 철회하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1929년 상하이로 돌아와서 한인 학생의 중국군관학교 입교에 힘쓰며, 안창호의 지시로 평양과 선천 등지로 잠입하여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같은 해 12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5월 17일 상하이 하비로(霞飛路)소재 고려물산공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4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임시정부와 대한교민단이 합동으로 사회장으로 치렀고, 정안사로(靜安寺路)에 있는 외국인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는 키가 크고 뚱뚱하고 눈이 가늘고 얼굴이 검고 말이 적고 외양이 심히 온후하였다. 그는 한 몸이 도시 의(義)요, 담(膽)이었다. 그는 동지를 지극히 경애하고 무슨 일에나 저를 내세우는 일이 없었다. 그가 유자(儒者)의 가정에서 생장한 것은 그의 독실하고 예절답고 근엄한 태도로 알 수 있었다.”는 스승이자 동지인 안창호의 인물평은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잘 말해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용달⋮

|참고문헌|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의 인물과 노선』, 한울아카데미, 2004 ; 반병률,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 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김용달, 「하산 양기하의 항일 무장투쟁 연구」, 『군사』 36, 군사편찬연구소, 1998 ; 윤대원, 「서간도 대한광복군사령부와 대한광복군총영에 대한 재검토」, 『한국사연구』 133, 2006 ; 한상도, 「이탁의 독립운동 역정과 생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