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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이시영 李始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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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이시영
한자명 李始榮
본 관 경주(慶州)
이 명 본명 : 성흡(聖翕), 자 : 성흡(城翕), 성옹(聖翁), 호 : 성재(省齋), 시림산인(始林山人)
출신지 서울
생몰년월일 1869. 12. 3~1953. 4. 17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서우학회, 기호흥학회, 경학사, 신흥강습소,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07년 신민회 참가, 1908년 계몽운동 참가, 1911년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창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법무총장·재무총장·노동국총판 역임, 임시의정원 의원, 1930년 한국독립당(상해) 창당, 1935년 한국국민당 창당, 1940년 한국독립당(중경) 창당, 1946년 독립촉성국민회 회장,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포상훈격(연도) 대한민국장(1949)

1869년 12월 3일 한성부 저동(苧洞)(현 서울 중구)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이유승(李裕承)과 한성부 판윤 ·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鄭順朝)의 딸인 동래정씨(東萊鄭氏) 슬하에 6형제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본명은 성흡(聖翕), 자는 성흡(城翕) · 성옹(聖翁), 호는 성재(省齋), 해방 전에는 시림산인(始林山人)이란 필명을 아호로 썼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10대조 이항복(李恒福)의 후손으로 이후 6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로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6형제 가운데 이회영(李會榮)이 바로 위인 넷째 형이었다.

7세 때부터 8년여 간 집에서 한학을 배우다 17세 때인 1885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고, 그해 소과(小科)에 합격하였다. 1888년 세자의 동궁에 서연관(書筵官)으로 특별히 선발되어 4년 동안 강연(講筵)을 받들었다. 1891년 대과(大科)인 문과에 급제한 이후에도 4년간 세자의 서연(書筵)에 참가하였다. 1892년에는 홍문관의 수찬(修撰) · 교리(敎理) · 응교(應敎)와 규장각 직각(直閣)으로 시강원(侍講院)의 문학직을 겸하였다. 1893년 사간원과 사헌부를 거치며 여러 요직을 겸임할 정도로 승승장구하였다.

1894년 승정원 정3품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어 우승지로 임명되었고,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궁내부 수석 참의를 특별히 지명받았다. 승지로 재직 중일 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일본의 내정간섭과 경복궁 장악을 고종의 곁에서 지켜보았다. 그해 갑오개혁 때에는 궁내부 수석 참의로 있으면서 고종을 보필하였다. 갑오개혁을 총지휘하는 군국기무처의 책임자가 장인인 김홍집(金弘集) 총리대신이었다.

1895년 2월경 고종의 칙명에 따라 청일전쟁의 관전사(觀戰使)로 임명되어 랴오뚱(遼東)반도 일대에서 벌어진 전쟁 상황을 3개월 동안 직접 목격하고, 그것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고종이 일본군의 장악 아래 있던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가는 아관파천(俄館播遷) 직후인 1896년 2월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일본의 후원을 받으며 다시 관직에 복귀한 장인이 광화문에서 대중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 바로 위에 형인 우당 이회영을 비롯해 여조현(呂祖鉉) · 이범세(李範世) · 서만순(徐晩淳) · 이강연(李康演) 등의 동료와 함께 이상설(李相卨)의 서재와 남산의 홍엽정(紅葉亭) 등에 모여 서구의 새로운 학문인 정치학과 세계에 통용되고 있는 법조문을 연구하고 강습하였다.

1904년 6월 고종이 충청도 순찰사로 임명하자 거부하였지만 별판부(別判府)의 엄지(嚴旨)를 내렸으므로 부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5년 1월 외부(外部)의 교섭국장에 임명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년 7월 미국과 「가쓰라 · 태프트밀약」, 8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각각 체결하여 군사적 승리를 외교적으로 마무리한데 이어 9월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권리를 러시아로부터도 인정받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상의하여 영국공사 조단(J. N. Jordan)(한자명 朱爾典)을 통해 “아국이 귀국에 대하여 무슨 잘못된 사실도 없고 양국이 우호협조하자는 조약이 맹부(盟府)에 소연(昭然)하게 기재되어 있은 즉, 동양평화를 파괴하고 한영조약에 위반되는 모든 성명은 곧 취소하라”는 요지의 내용이 담긴 외교문서를 영국 정부에 비밀리 발송하였다.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특파대사로 와서 광무황제에게 조약 체결을 요구하자 대한제국의 주권을 없애는 요구라며 박제순 외부대신에게 “마땅히 결사적으로 이를 반대하고 국시(國是)를 엄수하여야 될 것이다. 만약에 일시적 자신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국가 대사를 그르친다면 이는 만세죄역이 될 것”이라 말하였다. 11월 18일 전날 체결된 조약의 전문을 확인하고 박제순을 비판하는 한편, 교섭국장을 사임하였다.

1905년 12월 27일 「대(對) 소위 신조약(新條約) 변명서」라는 제목의 상소문을 공표하고, 결의 동지 4명과 상소문 100장을 인쇄하여 60여 장을 서울 시내에 배포하였다. 오후에 덕수궁의 대안문(大安門) 앞에서 광무황제에게 상소문을 받치고 꿇어앉아 하명을 기다렸다. 상소문은 조약이 성립하지 않았으며, 매국노를 극형에 처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죄를 논하는 한편, 을사늑약을 폐기한다고 각국 공관에 알려 대한제국의 독립을 영원히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906년 3월 아버지 이유승이 세상을 떠났다. 그해 가을 평남(平南) 관찰사로 임명되자 상중(喪中)임을 내세워 거부하였지만 고종의 독촉으로 부임할 수밖에 없었다. 관찰사로서 행정에 몰두하는 한편 평양의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와 손을 잡고 교육운동에 동참하였다. 관하의 23개 군에 교육기관을 창설하도록 적극 권장하고 학제의 우열을 수령에 대한 평가 지표로 적용함에 따라 여러 학교가 설립되었다. 1907년에 3,100여 명이 평양에 모인 ‘평안남도 학교 대운동’을 개최하였다.

1907년 4월 상경하여 중추원 칙임의관(勅任議官)으로 전임하였다. 1908년 한성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民事局長), 고등법원판사로 근무하였으며 1909년 종2품에 이르러 법전(法典) 조사와 전고(銓考) 및 법률 기초위원으로 근무하였다.

1908년 5월 대한학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경기와 충청 인사가 참여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의 찬무원(贊務員)으로 활동함으로써 애국계몽운동에도 참가하였다. 이러한 공개적 활동 외에 1907년 결성된 신민회(新民會)의 구성원인 이회영 · 안창호(安昌浩) · 이동녕(李東寧) · 이승훈(李昇薰) · 전덕기(全德基) 등과 상동교회에서 운영하는 공옥학교(攻玉學校)를 중심으로 만났다.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로 일본의 침략에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과거의 신분관념과 사회적 지위에 얽매이지 않고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을 만큼 열린 태도를 취하였다.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7월 만주로 떠났던 이회영 · 이동녕 등이 서울로 돌아오자, 형제들과 함께 남만주로 이주할 것을 결정하였다. 대가족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서둘러 이동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였다. 박창화(朴昌和)에 따르면 “우선 철모르는 아동들로부터 형제자매가 서로 만나도 남에게 수상한 눈치를 띄지 않도록 특히 지휘(指揮)를 시켜가며 또는 큰집은 작은집으로, 작은집은 사글세로 매매교환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친 골육이라도 동행 못할 사람에게는 일절 예정 행방을 널리 알리지 않고 가족 5~60명을 6 · 7대로 편성하여 12월 13일경 남대문 용산과 장단(長湍), 여러 역에서 차제로 차를 타게 한 것이다.” 대가족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남대문에서 출발할 때 스스로에게 “내가 이 문으로 다시 들어올 날이 없다면 자자손손이라도 들어올 날은 있으리라. 그리고 내가 이 문을 나설 이 시간으로부터는 별별 고초와 역경을 당하더라도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 아니하리라.”고 맹세하였다.

만여 석에 해당하는 재산과 토지를 모두 팔고 남만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대가족은 1910년 12월 30일경 압록강을 건넜고, 이듬해 2월 초순경 목적지인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의 추가가(鄒家街)에 도착하였다. 추가가는 그곳의 지방 권력가를 비롯해 관리와 민간인의 대부분이 추씨(鄒氏)였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일 정도로 혈연적 유대가 강한 지방이었다. 일본은 그들의 이주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10월에 친일파 고위 인사들의 집결체인 중추원의 부찬의(副贊議)로 임명하였다가 사태를 파악한 뒤 1911년 3월 3일자 관보(官報)에 면관(免官)을 발표하였다.

삼원보로 이주한 후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벌인 첫 사업은 1911년 초 추가가의 대고산(大孤山)에서 군중대회 형식을 빌려 경학사(耕學社)를 결성하는 일이었다. 경학사는 사람의 생명을 지키고 민지(民智)를 개발하며 체육과 덕육을 겸비한 사람을 키우는 한편, 공업과 상업을 발전시키고자 조직한 단체였다. 경학사가 남만주지역에서 결성된 한국인 비밀결사체의 시작을 알리는 조직이었다면, 남만주 일대에서 한인의 민족교육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첫 학교는 1911년 5월경 개학한 신흥강습소였다.

신흥강습소의 ‘신흥’은 신민회의 ‘신(新)’자와 다시 일어나는 구국 투쟁이라는 의미를 살려 ‘흥(興)’자를 붙인 것이다. 특히 신민회를 강조한 것은 해외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고 무관학교를 창설해야 한다는 방안이 이 단체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학교’ 대신에 ‘강습소’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중국 관헌과 현지 중국인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조선총독부의 시선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평범하게 붙인 것이다. 그럼에도 군사 인재를 육성한다는 목표만은 뚜렷하였다. 학생은 최소한 40여 명이었는데 1911년 말경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운영하는 일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1911~12년 사이에 연이은 대흉년과 서리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으므로 양식 문제가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풍토병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강냉이로 하루에 한 끼를 해결하는 날들이 연속인 때도 있었다. 결국 손자 · 손녀인 이규봉(李圭鳳)의 남매가 사망하는 아픔도 겪었다.

1913년 조선총독부가 이회영 · 이동녕 등을 체포하거나 암살하기 위해 형사대를 파견한다는 연락을 국내에서 받고 가족을 남겨둔 채 펑텐(奉天)으로 피신함으로써 퉁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서의 정착도 끝났다. 9월경 베이징(北京)으로 와 달라는 현지 한인의 연락을 받고 가서 중화민국의 대총통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만나 민족운동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동녕과 함께 베이징에서 소식을 들었다. 이회영 · 조성환(曺成煥) · 조완구(趙琬九)와 함께 베이징에서의 만세시위 여부를 논의하였고, 민족운동가들이 모여 들고 있는 상하이(上海)의 프랑스조계 보창로(寶昌路) 329호에 위치한 독립임시사무소에 갔다. 프랑스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의 한 셋집에서 밤을 새어가며 회의를 거듭한 결과 4월 10일 29명으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였다.

4월 10일 밤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10시까지 열린 제1회 임시의정원에서는 이승만(李承晩)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때 국무원이자 법무총장에 선출되었다. 제1회 회의에서는 임시정부 이름으로 선서문과 정강을 채택하였다. 법무총장으로서 매우 짧은 시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남형우(南亨祐) · 조소앙(趙素昂) · 신익희(申翼熙) · 한기악(韓基岳)과 「임시헌장」을 축조 심의하고 4월 11일 임시의정원에서 이를 통과시켰다.

제1회 회의에서는 ‘대한제국’의 ‘대한’과 ‘민’이 주권자라는 의미의 ‘민국’을 합친 ‘대한민국’이란 국호도 제정하였다. 이어 4월 22일부터 23일까지 열린 제2회 임시의정원과 4월 25일에 열린 제3회 임시의정원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격무의 연속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자 5월 10일자로 법무총장직을 사퇴하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1919년 9월 서울의 한성정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가 통합하여 새로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9월 11일 통합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지만 곧바로 취임하지 않고, 11월경부터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다. 통합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李東暉)와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이 11월 3일에서야 정식으로 취임하면서 재정제도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재정을 수입 · 예산 · 적립 · 화폐 제조의 네 항목으로 구성하고, 조세법률주의와 국민개납주의에 따라 조세를 부과하고 재정을 운영하고자 하였다. 모든 한국인은 독립운동 기간에 한두 푼이라도 내야 한다는 국민개납주의에 따라 임시정부의 예산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인 인구세를 거두는데 주력하였다.

조세의 수입과 집행을 법률에 근거하면서도 재무행정을 중앙으로 일원화하고자 회계출납과 조세, 국채와 화폐, 그리고 은행에 관한 모든 재정사무를 재무총장이 총괄하도록 「대한민국관제」를 제정하였다. 그러나 공채 발행을 둘러싸고 상하이의 임시정부가 아닌 이승만 대통령이 있는 미국의 구미위원부에서 하는 문제로 갈등이 깊어지면서 임시정부가 분열하였다.

이동휘가 1921년 1월 임시정부를 떠났고, 이승만도 5월에 미국이 주도하는 워싱턴회의에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안창호도 5월 11일에 노동국총판을 사임하였다. 임시정부가 뿌리 채 흔들리는 상황에서 1921년 5월 26일자로 노동국 총판까지 겸직하였다. 1921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열린 워싱턴회의에서 임시정부의 기대와 달리 한국문제가 철저히 외면받았다. 1922년 3월 노백린(盧伯麟)을 제외하고 국무위원 전원이 사직하였다.

임시정부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국민대표회의를 열자는 여론이 민족운동가들 사이에 형성되어 가는 가운데 1922년 7월 안창호와 여운형(呂運亨) 등이 주도하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가 결성되자 여기에 참가하였다. 1922년 8월 26일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재무총장에 다시 임명되었다. 10월에 김구가 주도한 한국노병회(韓國老兵會)가 결성되자 통상회원(通常會員)으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 3일부터 5월까지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지만 여기에는 적극 참가하지 않았다. 국민대표회의는 서로의 의견 차이만 확인한 채 끝났고, 임시정부의 위상도 낮아지고 활동력도 급속히 떨어졌다. 당연히 임시정부의 재정은 더욱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1923년 11월 5일 『독립신문』에 「재무총장의 포고」를 공개하고 “정부는 정부의 정부가 아니오 국민의 정부라 흥하거나 쇠퇴하고 전진하거나 후퇴하는 책무가 국민에게 있으니 적극 협력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대통령 직무수행에 관한 문제로도 큰 갈등을 겪고 있었다. 상하이에 와서 업무를 볼 수 없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겸임하면서 임시대통령도 대리하고 있던 이동녕과 함께 재무총장으로 이승만에 대한 비판을 막아보려 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1924년 12월 11일 이동녕이 모든 직책에서 사직하자 12월 27일 재무총장직을 사임하면서 임시정부에서 물러났다.

1930년 1월 중국 관내지역의 민족주의자는 상하이 프랑스조계 마랑로(馬浪路) 보경리(普慶里) 제4호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판공처에서 자신들만의 정당 조직으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중화민국의 중국국민당처럼 정당이 정부를 통해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운영원리를 추구하였다. 임시정부를 옹호하던 평소의 소신에 따라 이동녕 · 안창호 · 김구 · 조완구(趙琬九) 등과 함께 발기인에 참가하였으며 창당 당시 안창호 · 김구 · 조소앙 · 조완구 · 김철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었다. 1932년 1월 상하이의 민단 사무실에서 열린 회의 때 징계 등에 필요한 법적 판단과 감찰 기능을 담당하는 심판원(審判院)의 위원으로 김사집(金思潗) · 안창호와 함께 선출되었다.

1932년 4월 29일 김구가 지도하는 한인애국단의 윤봉길(尹奉吉)이 상하이의거를 일으켰다. 4월 30일 이동녕과 함께 저장성(浙江省) 쟈싱현(嘉興縣)의 쟈싱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항저우(抗州)로 장경가(長慶街) 9호에 거주하였다. 쟈싱은 임시정부의 가족이 머무는 공간이었고, 항저우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결집하는 공간이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과 1932년의 윤봉길의거는 중국 관내지역의 민족운동을 통일하기 위한 움직임에 큰 자극을 주었다. 각 단체의 참가자들은 1932년 10월 상하이에서 모여 협의체 조직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였고, 1934년 3월 난징에서 열린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대표대회 및 한국혁명 각 단체 대표대회’에서는 각 단체를 해체하고 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상하이 한국독립당 내부에서도 해체 문제를 놓고 큰 갈등을 겪었다. 1935년 5월 항저우에서 열린 임시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해체가 결정되었다. 관내지역 민족운동 세력 사이에 정당을 통일하려는 논란이 거세지고 있었지만 여기에서 한발짝 물러난 가운데 1934년 『감시만어(感時漫語)』를 저술하여 출판함으로써 민족의식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상하이 한국독립당이 해체되고 임시정부의 존립도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자 1935년 11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법무부장에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지키는데 앞장섰다.

1937년 9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11월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이 제2차 국공합작을 체결하였다. 상황이 급변한 가운데 장제스(蔣介石)의 압력도 있어 중국 관내지역의 민족운동 세력 사이에 통합 논의가 다시 일어났다. 1939년 4월부터 충칭(重慶)에 거주하며 김구와 함께 단일한 통합 정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민족운동의 최고기관을 정당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정부 형태로 할 것인가 등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 결과 통합 논의는 결렬되었다.

김구가 이끄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가입한 정당 관계자들은 1939년 11월 새로운 통일 정당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1940년 5월 충칭에서 새롭게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이때 4인의 중앙감찰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정당활동에서는 한 발짝 물러나 있었지만, 임시정부에서의 활동은 꾸준하였다.

1939년 10월에 열린 제31회 임시의정원에서는 의원을 17명에서 35명으로, 국무원을 7명에서 11명으로 늘렸을 때도 의원직과 법무장직을 계속 유지하였다. 1940년 10월 임시정부에서 주석제를 도입하며 6인의 국무위원체제를 출범시킬때도 재무장에 선출되었다. 1941년 임시약헌의 개정에 따라 재무장이 재무부장으로 바뀌었는데 그 직책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새로운 직책명으로 임시정부에서 발표한 「국내 동포에게 고하는 글」(1941.3)과 「왜적 군중에 있는 한국 병사에게 고함」(1941.3), 그리고 건국원칙의 대강을 밝힌 「건국강령」(1941.11)에 국무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42년 10월에 열린 제34회 임시의정원 정기의회에 좌파 민족주의운동 계열의 사람들도 참여함에 따라 상임위원회 위원을 새로 선정하였는데 이때 재정과 예결산을 담당하는 ‘제3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중국인과의 유대에도 신경을 써 10월 11일 충칭의 방송빌딩에서 열린 한중문화협회 창립총회에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

1944년 4월 열린 제36차 임시의회에서 다섯 번째 대한민국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 14인으로 늘어난 국무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감찰위원장에 임명되었지만 7인의 부장에는 선임되지 못하였다. 실무 일선에서 물러난 것이다. 1944년 8월 29일자 『독립신문』에 시림산인(始林山人)이란 필명으로 「담망국노얼(談亡國奴孼)」이란 칼럼을 통해 이완용(李完用) 등 경술국치의 주역들을 규탄하였다.

임시정부의 곳간지기로서 재정문제는 언제나 풀리지 않는 숙제이자 고민거리였다. 특히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때까지 임시정부 재정에 큰 공로자였던 미주 한인들의 송금이 중단되었다. 대신에 중국국민당에서 매달 2천 달러를 제공해 주었지만 빠듯하였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돈을 사적으로 유용한다든지 하는 말썽을 일으키거나 혼자 살면서도 누군가와 충돌한 적이 없었다. 워낙에 둥글둥글하고 모가 나지 않은 인품 탓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였다.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인 김구주석과 김규식(金奎植) 부주석, 그리고 김상덕(金尙德) · 유동열(柳東說) · 엄항섭(嚴恒燮)을 비롯해 15명과 함께 제1진으로 귀국하였다. 42세에 고국을 떠났는데 77세의 노익장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행사에 참석하고, 오후 2시 20분경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창을 열고 환영 행렬을 맞이하였다.

1945년 12월 즉각 독립보다 적당한 기간 동안 연합국이 후원하는 신탁통치를 한반도에서 실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임시정부는 즉각 여기에 반대하였다. 1946년 2월 이승만이 이끄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반탁위원회가 통합하여 힘을 한 곳에 집중시키고자 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였을 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승만이 1946년 6월 29일 ‘국민운동을 총지휘하는 민족통일사령부’로서 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하자 12명의 협의원(協議員)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1946년 8월 독립촉성국민회의 회장직을 자진 사퇴하였다.

반탁활동 이외에도 다양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1946년 봄 성균관 총재에 추대되었다. 1946년 배영대학관(培英大學館)을 설립하였다. 귀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를 부활시키고자 준비위원회까지 만들어 활동하였지만 여의치 않게 되자 학교 설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결과였다. 1947년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을 세웠으며 두 학교는 통합되어 1949년 5월 2년제 신흥초급대학으로 개교하였다.

1947년 1월 24일에는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을 때 8명의 지도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명받았다. 1947년 9월 26일 성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과 임시의정원 의원을 사퇴하였다. 대종교 관련 직책만 남겨놓고 정치로부터 한 발짝 물러났다.

1947년 11월 17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순국선열기념식 때 초헌관(初獻官)으로서 예를 행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11월 23일경 『민중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라의 완전한 독립이라는 하나의 노선만 있을 뿐이지 여러 노선이 있을 수 없으며,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되었지만 정부도 수립치 못한 이때에 정당이 난립할 필요가 있는가, 오히려 난립한 정당 때문에 오늘날 온갖 혼란이 초래되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도중에 같은 민족끼리 상처를 주고 죽이는 행위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비판하였다.

1948년 1월 18일 성명서를 발표하여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해 국제 의견이 일치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또한 난파당한 배에서 한 사람이라도 구제할 필요가 있는 현실에서, 만약 UN한국임시위원단이 이대로 돌아간다면 한반도문제에 대해 국제사회가 다시 노력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의 주권을 세워 놓고 동포 구제와 군정 철폐의 긴급성을 전제 삼아 남쪽에 있는 2천만 대중의 멸절을 만회함에 급선 착수하는 것이 현실에 적합한 조처”라고 보았다. 1월 20일에도 “과도 총선거는 지금 최적 시기이다”며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주장하였다.

1948년 2월 26일 UN소총회는 한반도에서 ‘가능 지역 선거’를 주장하는 미국측의 제안을 통과시켰다. 김구 등이 이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자고 제안하자 “우리가 반대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라면서 서명을 거부하였다. 그러면서 선거결과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으나 “선거방책 외에는 우리가 세계에 호소할 도리가” 없으므로 남한만의 총선거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답변하였다. 현실에서 중용을 취할 수 없다는 정치관을 갖고 있었으므로 단독선거를 지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한 것이다.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197표 가운데 132표라는 압도적 표를 얻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7월 24일 취임식에서 신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건국 대업에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취임사로 발표하고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에 참석하였다. 부통령으로서 감찰 업무에 신경을 많이 쓰고자 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인사를 등용해주도록 자주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 요직의 인사 문제를 놓고 이승만과 갈등하거나 소외되었다. 1949년 6월 김구가 암살되자 추도사를 발표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6 · 25전쟁이 일어났다. 6월 28일 아들 규열과 함께 대전-전주-광주-여수를 거쳐 배편으로 부산에 도착하였다. 8월 10일 부산의 부통령 관사에서 국민에게 고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소련과 북한의 남침과 잔인함을 비난하고 불법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전후방을 막론하고 모든 역량을 한데 모으자고 호소하였다.

1951년 2월 거창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나 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봄에는 국회에서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착복과 횡령 등으로 국민방위군 병사들이 굶어 죽거나 추위에 얼어죽거나 동상에 걸리는 일이 속출하였다. 일이 커지자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을 비롯한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진상 조사를 방해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처사에 크게 실망하고 1951년 5월 9일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서한을 신익희 국회의장 앞으로 보내며 부통령직에서 사퇴하였다.

1951년 대종교(大倧敎) 원로원장에 선출되었다. 1952년 7월 27일 제2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기로 결정하고 특권정치와 특권경제를 넘어 민주주의를 지키고 빈곤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정치를 실시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52년 8월 5일 전국 투표가 실시되었고, 523만 8,769표의 이승만, 79만 7,504표의 조봉암에 이어 76만 4,715표로 3위를 차지하였다.

폐렴과 장벽(膓癖) 때문이었다.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유해는 서울의 정릉(貞陵)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리 북한산 기슭으로 이장되었다.

저술로는 1934년에 일본의 침략행위와 중국인 황옌페이(黃炎培)의 식민사관을 비판하고 민족 주체적인 역사인식과 자신감있는 태도를 가감없이 드러낸 『감시만어(感時漫語)』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엄항섭과 연미당의 결혼식_1927_1 [판형3]
한국국민당 창립 기념_1935-11-07 [판형3]
임시정부 요인 1진과 2진의 합동 귀국 기념 촬영_서울 경교장_1945-12-06_1 [판형3]
이시영과 김구_1946 [판형3]

 

 

⋮신주백⋮

|참고문헌|

李始榮, 『感時漫語』, 一潮閣, 1983(1934) ; 박창화, 『성재소전』, 태양인쇄사, 1951 ; 박창화, 『성재 이시영 소전』, 을유문화사, 1984 ; 이정규·이관직, 『우당 이회영 약전』, 을유문화사, 1985 ; 이규창, 『운명의 여진』, 보련각, 1992 ;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아세아문화사, 1996 ; 도진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 이은우, 『임시정부와 이시영』, 범우사, 1997 ; 신주백,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사』, 선인, 2005 ;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상해시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 신주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곳간지기 이시영』, 역사공간, 2014 ; 정욱재, 「이시영의 ‘감시만어’ 연구」, 『한국사학사학보』 4, 2001 ; 이태진, 「이시영,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한국사시민강좌』 43, 2008.
  • 엄항섭과 연미당의 결혼식_1927_1
  • 엄항섭과 연미당의 결혼식_1927_2
  • 국무위원_1935-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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