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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오영선 吳永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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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오영선
한자명 吳永善
본 관  
이 명 오윤길(吳允吉), 호 : 석농(石農), 기윤(基潤)
출신지 경기 고양(高陽)
생몰년월일 1886. 4. 13 ~ 1939. 3. 10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신민회,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독립운동촉진회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07년 신민회 가입, 1914년 동림무관학교 설립, 1919년 임시의정원 의원, 1920년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1922년 대한적십자회 이사장, 1923년 상하이 한인교민단 의원, 국민대표회 헌법기초위원, 1924년 상하이 한인교민단의사회 학무위원, 임시정부 법무총장, 1926년 임정경제후원회 발기준비후원회 위원, 독립운동촉진회 조직, 임시정부 군무장, 1927년 임시정부 외무부장, 1928년 임시정부 군무부장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90)

1886년 4월 13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한지면(漢芝面) 이태원리(梨泰院里,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석농(石農)·기윤(基潤)이고, 이명은 윤길(允吉)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등으로 활동한 이동휘(李東輝)의 사위이다.

1900년초 배제학당에서 공부하였고 배제학당을 졸업한 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07년경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광무황제(고종)가 강제퇴위하고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군문의 길을 포기하였다.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여 국자가(局子街)의 길동기독학당과 광성중학교 교사로 복무하였다.. 1914년 12월 이동휘와 함께 지린성(吉林省) 둥닝현(東寧縣) 라자구(羅子溝)에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를 설립했으며 교사로 재직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노력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성립된 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기도 출신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9월 임시정부의 국무원(國務院) 비서장에 임명되어 국무총리 이동휘를 보좌하였다. 이때 법무차장 겸 임시법률 기초위원장에 변호사 출신 안병찬(安秉瓚), 내무부 참사(參事)에는 정제형(鄭濟亨) 등이 임명되어 함께 활동하였다. 같은 해 상하이에서 이동휘(李東輝)의 차녀 이의순(李義橓)과 결혼하였다.

1921년 10월 1일 상해유학생회가 일본 도쿄(東京) 유학생의 2·8독립선언을 기념하기 위한 2·8구락부(俱樂部)로 개명하고 운동회를 개최할 때 이에 참여하였다. 당시 김철수(金錣洙)·노백린(盧伯麟)·주요섭(朱耀燮)·주요한(朱耀翰)·신익희(申翼熙)·장붕(張鵬)·안병찬 등 동회(同會) 회원 43인과 함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어 1922년 1월 1일 『독립신문』에 「신년(新年)의 신각오(新覺悟), 독립운동에 관하야」라는 신년사를 기고하면서 변화와 각오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공사를 분간할 것,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 개인의 욕망을 억제할 것, 감정에 흐르지 말고 이성(理性)에 부를 것, 동지의 언사나 행동을 선의로 대할 것 등을 주창하였다. 이어 1922년 2월 23일 상하이 대한적십자회가 총본부 사무실에서 민국(民國) 3년도 결산안과 예산안을 통과하고 임원 개선을 할 때 이사장에 당선되었다. 이때 회장에 당선된 손정도(孫貞道), 평의원에 당선된 신창희(申昌熙)·김위택(金偉宅)과 같이 활동하였다.

한편 1922년 2월 말에 끝난 워싱턴 군축회담에서 한국 문제가 한마디 거론조차 없이 끝나버리자 이승만의 대미외교 활동에 불만을 제기하였는데 반해 같은 해 2월 2일 막을 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서는 약소민족해방운동을 적극 지지하며 민족부르주아운동과 반민족통일전선을 촉구하면서 한국 등 약소민족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하였던 50여 명의 한인 대표들은 상하이로 돌아와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과 방략을 논의하고자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요구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외교노선의 한계와 특히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자 그 해 2월 말 내각이 총사퇴를 결의하는 동시에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개최를 요구하였다. 이 문제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을 때 이유필(李裕弼)·도인권(都寅權)·차리석(車利錫)·안정근(安定根)·신익희(申翼熙)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찬성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받아들이지 않자 의정원 의원들 사이에 서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안정근·조상섭(趙尙燮)·차리석·양기하(梁基瑕) 등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은 ‘인민의 신망 결여와 정국수습 능력 부족으로 독립운동의 정지를 초래하였고,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회의의 외교 실패, 후계내각을 조직하지 못하고 무정부상태 초래’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였다. 이 안은 동년 7월 20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과, 가결되었다.

1923년 10월 상해한인교민단(上海韓人僑民團) 의원으로 교민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1월에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 옹호파와 개조파 사이에 논쟁이 있을 때 헌법기초위원(憲法起草委員)으로 임명되어 기초위원회 규정을 작성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4년 1월 12일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상해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 학무위원에 선임되었으며, 박은식(朴殷植)이 임시대통령 내각에서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내무총장 이유필(李裕弼)·재무총장 이규홍(李圭洪)·학무총장 조상섭(趙尙燮)·교통총장 노백린(盧伯麟)·외무총장 김철(金徹)·노동국총판 김갑(金甲)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후 1925년 3월부터 11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국 동삼성 소재 항일 독립운동단체의 분규 수습을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의 총재 손정도가 2년 동안 만주에 가 있을 때 총재 직무대행을 맡기도 하였다.

1926년 5월 안창호의 주창에 따라 조직된 임시정부경제후원회 발기준비위원회에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독립운동촉진회(獨立運動促進會)를 조직하여 회장 안공근(安恭根), 조상섭 등과 함께 한국 민족의 해방을 촉구하면서 대동단결 실현을 위한 일에 나서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10일 신임시약헌(新臨時約憲)이 공포된 후 단행된 개각 때 김구(金九) 국무령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외무부장 이규홍(李圭洪)·법무부장 김철(金徹)·내무장 윤기섭(尹琦燮)·재무장 김갑(金甲)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7년 8월 이동녕을 주석으로 추대한 내각에서 외무부장으로 선임되어 내무부장 김구, 군무부장 김철(金徹), 재무부장 김갑(金甲)과 같이 활동하였다. 1928년 4월에는 군무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1930년 9월 사임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1931년 11월 초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병으로 결원 처리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날 때에도 합류하지 못하고 투병하다가 1939년 3월 10일 상하이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오영선, 이의순 가족 사진 [판형3]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촬영(1921. 1. 1, 앞에서 둘째줄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오영선) [판형3]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판형3]
오영선이 기고한 「신년의 신각오」(『독립신문』 1922. 1. 1) [판형3]
미국에 보도된 오영선 임시정부 군무부장 선임(『신한민보』 1927. 2. 10) [판형3]

 

⋮윤경로⋮

|참고문헌|

朝鮮總督府警務局 編, 『高等警察關係年表』, 1930 ; 在上海 日本總領事館 警察部 第二課 編,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별책2, 2009)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1, 東京: 原書房, 1967 ;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 27, 東京:みすず書房, 1970 ; 국회도서관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 1974 ; 국회도서관 편,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 1976 ; 김원용, 『재미한인오십년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편,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탐구당, 1969.
  • 오영선
  • 오영선, 이의순 가족 사진
  •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촬영(1921. 1. 1, 앞에서 둘째줄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오영선)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오영선이 기고한 「신년의 신각오」(『독립신문』 1922. 1. 1)
  • 미국에 보도된 오영선 임시정부 군무부장 선임(『신한민보』 1927.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