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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여운형 呂運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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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여운형
한자명 呂運亨
본 관 함양(咸陽)
이 명 자 : 호 : 몽양(夢陽) 초명 : 이명 : 여광(呂光)
출신지 경기 양평(楊平)
생몰년월일 1886. 5. 25 ~ 1947. 7. 19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신한청년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조선건국동맹,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18년 신한청년당 조직,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 파견, 임시정부 외무차장, 의정원 의원 역임, 1929~1932년 제1차 투옥, 1936년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말소사건, 1943~1944년 제2차 투옥, 1943년 조선민족해방연맹 조직, 1944년 조선건국동맹 조직,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포상훈격(연도) 대한민국장(2008)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근군(楊根郡, 현 양평군) 양서면(楊西面) 신원리(新院里) 묘곡(妙谷)에서 아버지 여정현(呂鼎鉉)과 어머니 경주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호는 몽양(夢陽)이다. 동생은 여운홍(呂運弘)이다. 1891년부터 1900년까지 고향에서 조부에게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9년 용인군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결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고, 1901년에는 민영환(閔泳煥)이 세운 흥화학교(興化學校)로 전학하였다. 1903년 조부와 임신 중이던 아내가 사망하였고, 같은 해 흥화학교를 중퇴한 후 통신원 부설 우무학당(郵務學堂)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 7촌 숙부 여병현(呂炳鉉)의 영향을 받았다.

여병현은 일본과 미국 유학생 출신이자 혁신유학과 양명학의 신봉자로 배재학당의 영어교사이자 흥화학교의 교사였다. 배재학당에서 영어와 기독교, 근대적 학문을 접하였으며,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협성회(協成會) 토론회에서 토론과 웅변을 익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어머니가 사망하자 우무학교를 중퇴하였다. 1905년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으며, 슬하에 8남매를 두었다. 1906년 부친이 사망하자 3년상을 치르며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사서삼경을 읽었다.

1907년 고향 양평에서 기독교 학교인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였다. 1907년부터 기독교를 믿기 시작해, 1908년 장로교목사 클라크(Charles Allen Clark, 한국명 곽안련(郭安連))의 조사(助事)가 되어 1913년까지 일하였다. 1908년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안창호(安昌浩)의 연설을 듣고 감명 받은 이래 독립운동가이자 웅변가로서 활약하였다.

한편 계몽운동의 본산인 승동학교(勝洞學校)에 출입하며, 계몽운동단체 기호학회(畿湖學會) 평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08년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지회를 설립해 활동하며 금연과 국채보상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190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신주(神主) 단지를 묻고 노비 문서를 불사르며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기도 하였다.

1910년 사촌동생 여운일(呂運一) 등과 함께 강원도 강릉(江陵)으로 내려가 초당의숙(草堂義塾)에서 청년 교육에 전념하다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맞았다. 1911년 여름 일본 연호(年號) 사용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의 퇴거 명령을 받아 서울로 돌아왔다. 1911년 ‘백만구령(百萬救靈)’운동 당시 열변으로 4천여 명을 기독교에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클라크 목사의 권유로 평양 장로교연합신학교에 입학해 1912년부터 이듬해인 1913년까지 총 5년간의 과정 중 2년을 마쳤다. 1913년 클라크 목사를 수행하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와 서간도 각지를 방문하는 전도여행을 하였다.

이후 ‘105인 사건’과 중국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영향으로 중국 유학을 결정하였다. 이때 언더우드(Horace Underwood, 원두우(元杜尤)) 선교사에게 중국대학 신학부 입학을 위한 추천장을 부탁하였는데, 언더우드는 여운형이 신학공부가 아니라 정치운동을 하러 간다고 파악하였다.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진링대학(金陵大學) 영문과에 입학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1915년 1월 9일 중국 난징에 신학 연구를 하러 간다고 조선총독부 여권을 받은 기록이 있다. 동생 여운홍은 1913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5년 5월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된 극동 올림픽대회를 참관하면서 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김규흥(金圭興) 등 중국동맹회와 관계있는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동제사(同濟社)·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 등에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1917년 봄 진링대학을 수료하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1917년 1월 상하이 한국인 기독교회의 전도인으로 선임되었으며, 영국인 선교사 에반스(Edward Evans)가 운영하는 이문사서관(伊文思書館)의 영문사무원으로 취직하였다. 그러나 곧 각 교회가 연합 출자한 상하이 협화서국(協和書局, Mission Book Company)으로 자리를 옮겨 위탁판매부 주임을 맡았다.

1917년 여름 귀국하여 아내와 장남 여봉구(呂鳳九), 이범석(李範錫)을 중국에 망명시켰다. 또 협화서국 운영을 맡고 있던 조지 피치(George F. Fitch) 목사와 함께 1918년 말까지 약 70명에 달하는 한인 청년들의 구미(歐美) 유학과 도항을 알선하였다. 당시 신규식 등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일정한 영향 속에 중국·일본에서 수학한 청년들과 함께 새로운 노선을 추구하였다. 1917년 『자림보(字林報)』의 기자 천홍밍(陳漢明)의 소개로 처음 쑨원(孫文)을 만났다. 이어 1918년 여름 상하이 고려민친목회(高麗民親睦會)를 조직하고 총무를 맡았다. 회장은 신석우(申錫雨)였으며, 이는 상해교민단(上海僑民團)으로 발전하였다.

1918년 8월 19일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개최된 제14회 장로교회 총회에서 이상재(李商在) 등을 만나 국제정세와 전후처리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1918년 11월 28일 장덕수(張德秀)·조동호(趙東祜)·김철(金澈)·선우혁(鮮于爀)·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터키 청년당을 모방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New Korean Young Men’s Association)을 조직하여 교제부 이사로 활동하였다.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터키청년당원 아멜 베이(Armel Bey) 등으로부터 터키청년당의 조직과 활동을 듣고 이를 참조하였다.

신한청년당의 조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파리강화회의 개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18년 11월 27일 미국 윌슨(Thomas W. Wilson) 대통령 특사로 중국을 방문한 크레인(Charles Crane)과의 면담이었다. 11월 29일 직접 크레인에게 윌슨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고, 같은 청원서를 상하이에서 『밀러드리뷰(Millard Review)』를 간행하던 밀러드(Thomas F. Millard)에게도 건넸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텐진(天津)에 있던 김규식을 상하이로 초빙해 파리강화회의 파견대표로 결정한 후 자금을 모금하였다. 자금 모집 후 탕사오이(唐紹儀)·쉬첸(徐謙) 등과 파리에서의 외교활동, 여권 발급 문제를 논의하고 쑨원을 재차 면담하였다. 이때 중국대표단의 일원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정위슈(鄭毓秀)의 도움으로 배표를 구하였고, 김규식은 진충웬(金仲文, Chin Chung Wen)이라는 중국 이름의 여권을 갖고 1919년 2월 1일 파리로 출발하였다. 이어 신한청년당의 선우혁·김철·서병호 등을 국내로 잠입시켰고 장덕수·여운홍은 일본을 거쳐 다시 국내로 잠입시켰다. 이때 간도와 시베리아로 들어가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사실과 독립운동 전반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서 2주간 체류하면서 이동녕(李東寧)·문창범(文昌範)·박은식(朴殷植)·조완구(趙琬九)·정재관(鄭在寬)·강우규(姜宇奎) 등과 회견하며 독립운동의 좋은 기회가 왔다고 강조하였다. 이어 시베리아 체코군 사령관 가이다(Radola Gajda) 장군과 회견하고, 미국·영국·캐나다 3군사령부를 방문한 뒤 그 해 3월 6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본래는 직접 파리로 향할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동생 여운홍이 대신하였다.

1919년 4월 10일에 열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출석하였으며,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였다. 당시 정부 수립보다는 독립운동가 정당 건설을 선호하였고, 이것이 간도·시베리아 한인들의 노선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어 외무위원장·외무차장·외무부 위원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한편 상해교민단 단장으로 활동하며, 거류민을 국민군으로 편성하기 위해 상하이 한인들에게 군적에 등록할 것을 권유하였다. 교민 아동 교육을 위해 인성학교(仁成學敎)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인성학교의 전신은 1917년 출범한 상해한인기독교소학교였다. 그 해 5월 14일 일본 경찰이 숙소를 습격하였으나 화를 면하였다.

1919년 일본 조합교회(組合敎會)를 매개로 한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장덕수·최근우(崔謹愚)·신상완(申尙玩)을 동반하고 1919년 11월 18일부터 12월 1일까지 3주 동안 일본 도쿄(東京)를 방문하였다. 고가렌조(古賀廉造) 척식국장관,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육군상(陸軍相),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총독부 정무총감, 도코나미 다케지로(床次竹二郞) 내상(內相), 노다 우타로(野田卯太郞) 체신상(遞信相), 하라 다카시(原敬) 수상 등과 회담하였는데, 일제의 위협과 자치제 제안을 비판하면서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창하였다. 당시 제국호텔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이 세계의 대세이자 신의 뜻이며 한민족의 각성이며, 한국의 독립이 한국의 생존권이자 인간 자연의 원리”라고 강조하였다. 이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확실히 한 가지 범하지 못할 정의의 섬광”이 있다고 평하였다. 일본 방문 시 일제는 이를 이용하여 귀순시키거나 자치론 동조자로 만들 계획이었으나 오히려 한국독립운동에 역이용한 것이었다. 귀환 후 임시정부는 「국무원포고」를 통해 당시 일본행이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고 선언하여 일본행을 둘러싼 논쟁을 잠재웠다.

1920년 봄 김만겸(金萬謙)의 소개로 러시아공산당이 파견한 보이친스키(Grigori Voitinsky)를 만나 공산당에 관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중국과 일본의 천두슈(陳獨秀)·오스기 사카에(大衫榮)를 함께 만났다. 1920년 4~5월 포타포프(A. S. Potapov)와 함께 푸젠성(福建省) 장저우(漳州)에서 천중밍(陳炯明)과 만나 시베리아에 한인군관학교 설립과 부대 양성을 위한 러시아와 중국의 지원방안을 협의하였다.

1920년 이동휘(李東輝)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참가해 중앙위원과 번역부 일을 맡았다. 레닌자금 40만 루블을 둘러싼 대립 이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옮겼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한국인 최초로 번역하였고, 부하린(Bukharin)의 『공산주의독본』, 영국노동당의 『직접행동』 등을 직접 번역해 만주와 국내에 배포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황진남(黃鎭南)·장덕수 등과 함께 베이징에 온 미국의원단을 방문해 한국독립에 대한 원조와 지원을 요청하였다. 1921년 상하이에서 광둥정부(廣東政府) 사법부 차장이던 우산(吳山), 임시정부의 김규식·조동호·윤현진(尹顯振)과 함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조직해 한국 독립과 중국혁명을 위한 한중 연대를 추진하였다. 중한호조사 활동은 1919년 4월 상하이 프랑스조계 중국인 황지에민(黃介民) 사무소에서 조동호·여운홍이 함께 하며 시작되었다. 이어 1921년 안창호 등과 함께 국민대표자대회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해 8월 안창호 지지파로 몰려 4인조 테러단에게 습격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1925년 12월에는 중국군 출신 7인조에게 테러 습격을 당하였다.

1921~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대표 54명 중 한명으로 참석하였다. 1921년 가을부터 상하이·톈진에서 대회 준비를 맡아 각국 대표의 여권 수속을 담당하였다. 1922년 1월 7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이르쿠츠크파 대표로 참석하였고, 김규식·김원경·김단야(金丹冶)와 함께 대회 운영 의장단에 뽑혀 개회식 연설을 하였다. 모스크바에서 두 차례 레닌(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을 만났으며 지노비예프(Alexandre Zinoviev), 트로츠키(Leon Trotskii) 등 러시아공산당 지도자들과도 회담하였다. 이때 일본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 가타야마 센(片山潛)을 만나 한·일 연대와 국제연대를 논하였다. 1922년 3월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1922년 10월 김구(金九)·조상섭(曺尙燮)·이유필(李裕弼)·손정도(孫貞道)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는데, 10년 내에 1만 명 이상의 노병을 양성하고 5만원 이상의 전비(戰費) 조성을 목적하였다. 이어 1923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回議)에서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하였다. 같은 해, 상하이의 사립 동방대학(東方大學) 영문교사로 취직하였다.

이후 1925년,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 카라한(Lev M. Karakhan)을 만나 중국혁명운동 동참을 요구 받고 국공합작(國共合作)에 기여하였다. 1917년과 1919년, 1924년 여러 차례 쑨원과 만난 바 있어 쑨원의 개인 고문이자 동지를 자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포타포프·카라한·보로딘(Mikhail M. Borodin) 등을 쑨원에게 소개해 국민당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에 영향을 끼쳤다. 쑨원의 권유로 국민당에 입당하였고, 쑨원의 심복인 취추바이(瞿秋白)의 추천으로 중국공산당의 당원 대우를 받았다. 마오쩌둥(毛澤東)과도 수차례 만났다. 1925년에는 상하이에서 타스통신의 촉탁으로 일하는 등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에 모두 참여한 한국인이었다.

1926년 1월 광둥(廣東)에서 개최된 중국국민당 제2회 전국대표대회에서 여광(呂光)이란 이름으로 「중국 국민혁명의 전세계적인 사명」을 제목으로 한 영어 연설을 하였다. 1926년 1월 장제스(蔣介石)를 만난이래 한인 청년들의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입교를 소개하였고, 광저우(廣州)지역 한인 청년들로 공산주의청년단(Communist Youth League of china)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북벌로 우한삼진(武漢三鎭)을 점령한 1926년 9월 한커우(漢口) 승첩 경축대회에서 축사를 하였다. 북벌 당시 모스크바사관학교 졸업생 홍의표(洪義杓) 등 한국 사관 15명을 이끌고 광둥으로 가서 이미 혁명군에 가담한 한국인 30여 명과 함께 한커우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중국이 국공합작을 통해 혁명에 성공한다면, 한국 독립운동에 결정적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4·12정변 이후 바이충시(白崇禧) 군에 붙잡혔다가 탈출하였다. 1928년 봄 상하이 푸단대학(復旦大學)에 취직해 체육교사로 일하였다. 1929년 5월 대학 축구부를 이끌고 자바(Java)·수마트라(Sumatra)·말레이시아(Malaysia)·필리핀(Philippine) 등지로 원정 경기에 나가 30여 차례에 걸쳐 싱가포르 해방, 필리핀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다 현지 경찰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1929년 7월 10일 상하이 경마장에서 야구 경기를 관람하다 일본 영사 경찰에 붙잡혀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국내로 압송되었다.

1930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 산입)을 받았고 같은 해 6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원심 미결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 산입, 당심 미결구류일수 중 41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1929년 7월부터 옥고를 겪다가 형기 만료 4개월을 남기고 1932년 7월 26일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감옥에서 나온 후 조선총독으로부터 농촌진흥운동 지원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하였다. 1933년 2월 『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중앙일보』는 『조선중앙일보』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6년 8월, 『조선중앙일보』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말소사건을 처음 일으켰다. 이 사건 등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 후 1937년 폐간하였다. 1934년 조선체육회 회장에 추대된 후 1937년 해산 시까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청년 학생들에게 운동 정신을 통한 애국심 고취, 단결과 희생 정신을 강조하였다. 1935년에는 충남 아산에 위치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묘소를 재건하고 공덕비를 건립하였고, 김구의 모친 곽낙원(郭樂園)과 아들 김인(金仁)·김신(金信)이 상하이로 탈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金性洙)·이만규(李萬珪) 등에게 일본의 패망이 멀지 않았다고 예견하였고, 1938년 조선 총독의 비서, 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 유조(長崎祐三)·윤치호(尹致昊)·한상룡(韓相龍) 등의 전쟁 협조 요구를 거절하였다. 1939년 6월 이상백(李相伯)을 통해 임시정부와 연계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 5차례 일본을 방문해 고위급 인사들과 접촉하여 정세를 파악하고 고급 정보를 획득하는 한편 유학생들을 규합해 조국 광복에 대비하려고 하였다. 중국 정계의 거물들과 친밀한 데 주목한 일제는 친일 회유와 대중국 화평공작을 권유하였으나 모두 거부하였다.

1940년 2월 조선군 참모부의 요구로 왕징웨이(汪精衛)와의 교섭을 의뢰받았고, 3월 육군성 병무국장 다나카 다카요시(田中隆吉) 소장으로부터 장제스·왕징웨이(汪兆銘)와 만나 화평공작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도쿄에서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수상,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전 조선총독 등과도 회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였으며, 이정구(李貞九)에게 식량 조사와 대책을, 장권(張權)에게 치안대 조직을 연구하게 하였다. 1942년 12월 일본에서 귀국하는 도중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경성헌병대에게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1942년 4월 18일 미군의 일본 도쿄 공습을 목격하며 일본군 비행기가 미군 비행기를 요격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일본의 패망과 한국독립의 필연성을 친구들에게 역설한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다시 붙잡혔다. 이 때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1943년 7월 2일 가석방되었다. 풀려난 직후 경성요양원에 입원하였고, 요양을 핑계로 김용기(金容基)가 농촌운동을 벌이던 경기도 양주군 봉안(奉安)에 은거하며 동지 연락과 청년 지도에 전력하였다.

1943년 8월 10일 경성요양원에서 조선민족해방연맹(朝鮮民族解放聯盟)을 결성하고, 중앙과 지방의 조직 건설에 착수하였다. 1943년 11월 학병지원 연설, 대동아전쟁 강연회 등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였다. 1944년 1월 봉안에서 만주군 소속이던 박승환(朴承煥)과 만나 군사조직 문제를 논의하였다. 박승환은 만주군 내 건국동맹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1944년 4월 거짓환갑잔치를 열고 조선건국동맹 조직을 위한 예비모임을 가졌다. 1944년 8월 10일 현우현(玄又玄)의 삼광한의원에서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결성하였다. 건국동맹은 좌익계 노장층이 중심이 된 비합법 비밀결사로 항일투쟁과 건국준비를 목표로 삼았다.

1944년 10월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구축, 연합국과의 연대, 민주주의 원칙 등 3가지 강령을 채택하고, 건국동맹에 대해 일체 말을 하지 않는다(不言),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不文),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不名)는 3원칙을 규약으로 채택하였다. 건국동맹의 중앙과 지방조직 결성에 착수하였고, 10월 8일 경기도 양평 용문산에서 경기 북부지방 농민동맹을 조직하였다. 내무부·외무부·재무부 3부 및 전국 각도 대표최고위원이 결정되었고 이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가 봉안에 와서 중국행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이후 보광당(普光黨)·조선민족해방협동단(朝鮮民族解放協同團)·산악대(山岳隊) 등 학병·징병·징용 거부자 조직과 연계하는 한편 노동자·부녀자·사무원 조직을 준비하였다.

태평양전쟁이라는 결정적 시기를 맞아 국외에서는 연합군과 공동작전으로 독립운동 무장세력의 국내진공작전이 계획 중이었고, 국내에서는 이에 맞춰 무장폭동을 계획하였다. 1945년 3월 건국동맹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군의 후방 교란과 노농군 편성을 계획하였다. 또한 손기정을 통해 경기도 주안 조병창(造兵廠)의 채병덕(蔡秉德) 중좌와 두 차례 접촉해 무기 공급 등을 논의하였다.

1945년 5~8월 사이 연락원을 파견해 베이징·옌안(延安) 등지에서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임시정부 등과 조직적 연계를 시도하였다. 북만주에는 최근우(崔謹愚), 베이징에는 이영선(李永善)·이상백·박승환·엄태섭(嚴太燮), 옌안에는 이영선·이상백·박승환 등을 파견하였다. 건국동맹과 독립동맹은 14차례 이상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고, 독립동맹은 건국동맹을 국내 분맹(分盟)으로 인식하였다.

1944년 6월에는 화북조선독립동맹 적구공작반(敵區工作班)이 공작원 1인을 직접 서울에 파견한바 있었으나 이때 불신하였기에 연결되지 않았었다. 독립동맹과의 연락은 이영선과 김명시(金明市)의 접촉을 통해 구체적으로 시도되었으며, 1945년 5월 유엔 건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회담과 관련해 옌안에 대표 파견을 시도하였다. 이어 최근우를 베이징에 파견해 임시정부와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독립운동자대표대회가 해외에서 개최되면 이에 참석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1945년 8월 15 당일 총독부와 5개조에 합의한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해 위원장이 되었으며, 이후 그 해 8월말까지 전국 145개 시·군에 건국준비위원회 지부가 만들어졌다. 건국준비위원회는 건국동맹을 기초로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이 테러로 와병 중일 때 급조된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

1945~1947년간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사회노동당(社會勞動黨)·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 당수를 지냈으며, 1946~1947년간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였다. 남한에서 좌우합작을 성공한 후 이를 남북연합으로 연결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격 받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여운형의 일본행 활동 보도(『독립신문』 1919. 12. 25) [판형3]
1922년 1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발언 중인 여운형(1922. 1. 21~2. 2) [판형3]
인성학교 제6회 졸업사진(1926. 3. 8,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여운형) [판형3]
안창호 대전형무소 출감 기념 사진(1935, 맨 왼쪽이 여운형) [판형3]
건국동맹회의에서 연설하는 여운형(종로 YMCA, 1945) [판형3]
해방 제일성을 외치는 여운형(휘문고, 1945. 8. 16) [판형3]
여운형 장례 및 조전 보도(『동아일보』 1947. 7. 24) [판형3]

 

⋮정병준⋮

|참고문헌|

李萬珪, 「夢陽呂運亨鬪爭史」, 『新天地』, 1947. 8 ; 이만규, 『여운형투쟁사』, 총문각, 1946 ; 여운홍, 『몽양여운형』, 청하각, 1967 ; 몽양여운형선생전집발간위원회 편, 『몽양여운형전집』 1~3, 한울, 1991~1997 ; 이기형, 『몽양여운형』, 실천문학사, 1993 ; 정병준, 『몽양여운형평전』, 한울, 1995 ; 강덕상, 『呂運亨評伝1: 朝鮮三·一独立運動』, 東京 : 新幹社, 2002 (강덕상 지음, 김광열 옮김, 『여운형평전』 1, 역사비평사, 2007) ; 강덕상, 『여운형평전 2: 상해임시정부』, 신간사, 2005 ; 이정식,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 변은진,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여운형』,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8 ; 水野直樹, 「呂運亨と中國國民革命ー中國國民黨二全大會における演說をめぐてー」, 『朝鮮民族運動史硏究』 18, 朝鮮民族運動史硏究會, 1992 ; 정병준, 「조선건국동맹의 조직과 활동」, 『한국사연구』 80, 1993 ; 반병률, 「呂運亨의 활동을 통해 본 上海 지역 초기 한인공산주의 조직의 형성과 변천에 대한 재해석, 1919~19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3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 배경한, 「장저우(漳州)회의(1920년 4~5월)와 여운형 : 한·중·러 연대 모색과 그 의미」, 『역사학보』 제220집, 역사학회, 2013 ; 배경한, 「여운형과 국민혁명 : 國民黨二全大會(1926년 1월) 참석과 ‘反帝連帶’ 활동」, 『중국근현대사연구』 제64집, 중국근현대사학회, 2014.
  • 여운형
  • 도쿄를 방문한 여운형 일행_1919-11
  • 장주(漳州)회의_1920-04~05
  • 극동피압박민족대회_1922-01-21~02-02
  • 공립인성소학교 제6회 졸업기념 _1926-03-08
  • 용산역에 내리는 여운형_1929-07-17
  •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표_1929-07-29
  • 『현대철봉운동법』 수록 사진_1933
  • 여운형
  • 여운형_1946
  • 해방 제일성을 외치는 여운형_1945-08-16_휘문고
  • 양평 묘골 생가에서
  • 건국동맹회의에서 연설하는 여운형_1945_종로 YMCA
  • 박헌영과 함께_1946
  • 개성을 방문한 여운형_1946
  • 여운형
  • 여운형의 일본행 활동 보도(『독립신문』 1919. 12. 25)
  • 1922년 1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발언 중인 여운형(1922. 1. 21~2. 2)
  • 인성학교 제6회 졸업사진(1926. 3. 8,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여운형)
  • 안창호 대전형무소 출감 기념 사진(1935, 맨 왼쪽이 여운형)
  • 건국동맹회의에서 연설하는 여운형(종로 YMCA, 1945)
  • 해방 제일성을 외치는 여운형(휘문고, 1945. 8. 16)
  • 여운형 장례 및 조전 보도(『동아일보』 1947.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