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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안창호 安昌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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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안창호
한자명 安昌浩
본 관 순흥(順興)
이 명 안광택
출신지 평남 강서(江西)
생몰년월일 1878. 11. 9 ~ 1938. 3. 10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공립협회, 신민회, 청년학우회,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독립당
관련 사건 길림사건, 수양동우회사건
주요 활동 1905년 4월 미국에서 공립협회 창립, 1907년 2월 신민회 결성,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선출,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직후 노동국총판 및 내무총장 등으로 활동,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 개최, 1926년 이후 유일독립당 결성운동 전개, 1927년 4월 지린성에서 농민호조사 창립, 1930년 1월 한국독립당 창당, 1932년 4월 윤봉길의거 직후 체포,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
포상훈격(연도) 대한민국장(1962)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초리면(草里面) 칠리(七里) 봉상도(鳳翔島, 일명 도롱섬)에서 농부인 안흥국(安興國)과 제남 황씨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도산(島山)이다. 이명은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 등이다. 필명으로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등을 사용하였다.

7세 때인 1884년 도롱섬에서 평양 대동강 국수당(國樹塘)으로 이사해 8세까지 살다가, 9세 때인 1886년에 평남 대동군 남곳면(南串面) 노남리(魯南里)로 이사해 어린 시절을 보냈다. 11세 때 부친을 여의고 조부 슬하에서 성장하였으며, 노남리 마을의 유림인 김현진(金鉉鎭) 문하에서 한학을 배웠다. 어린 시절 서너 살 연상인 필대은(畢大殷)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894년 평양에서 청일전쟁을 목격하고 나라가 힘이 없기에 남의 나라가 우리 영토에서 함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힘을 길러야 한다고 자각하였다. 더 큰 경험을 쌓기 위해 전국을 돌고 서울에 도착한 후 정동길에서 밀러(Frederick Scheiblin Miller, 민노아(閔老雅)) 선교사를 만나, 그의 권유로 밀러학당 곧 구세학당(救世學堂, 언더우드학당) 보통부에 입학해 서양 학문을 익히고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1896년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하고 조교로 학생을 지도하였다. 그 해 기독교로 개종하고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조건으로 마을의 서당 선생인 이석관(李錫觀)의 딸 이혜련(李惠鍊)과 약혼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한 후 귀향하여 필대은(畢大殷)과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하였다. 1898년 부패관리들에게 일침을 가하며 백성들의 억울한 심사를 풀어주었다는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의 연설은 널리 알려져 있다.

1898년 12월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고 탄포리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점진학교는 강서군 최초의 남녀공학으로 4년제의 초등과정과 2년제의 중등과정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던 중 선진 교육학을 공부해 전문교육자가 되고자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1902년 9월 3일 제중원에서 밀러 선교사의 주례로 이혜련과 결혼식을 올린 다음날, 인천항을 통해 부인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라 그 해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의료 선교를 한 적이 있는 알레산드로 드류(Alessandro Damer Drew, 유대모(柳大模)) 박사 집에서 집사 일을 보게 되었다.

1903년 9월 북미 최초의 한인 조직인 상항(桑港),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친목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한인의 권익 보호와 교민 지도에 몰두하느라 정작 본인의 학업은 포기하였다.

1904년 3월 한인 노동자들과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인근의 리버사이드로 이주해 파차파 캠프(Pachappa Camp)를 이루었다. 한편 가족을 리버사이드에 남겨놓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이민 왔다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돌며 불이익을 당하는 한인들을 돕기 위한 노동소개소를 개설하였다. 이때 한인들의 직업을 알선해 주고 농장주들과의 임금 협상을 도와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주선하며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으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동지들과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의하고 1905년 4월 5일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였다. 공립협회 초대 회장에 취임한 후 기관지인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하여 조국 광복을 목표로 한 언론활동을 개시하며 미주 지역 한인커뮤니티 언론문화의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북미 각지에 지방회 조직을 확산시켜 가던 중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소식을 듣고 1907년 1월 리버사이드(Riverside)에 대한인신민회(大韓人新民會)를 결성하였다. 신민회는 전세계 한인 사회를 하나로 연결해 조직적인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여 독립된 국민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1907년 2월 한국으로 돌아와 비밀결사 항일단체 신민회(新民會)를 출범시켰다.

이어 1907년 5월, 미주 공립협회 제3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미주와 한국에서 구국운동사업의 전권을 부여받고 공립협회와 신민회 활동을 연계시켜 전개해 나갔다. 우리 민족이 자유문명국의 ‘신민(新民)’, 즉 새로운 국민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각 개인이 내면의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근대국민국가 건설운동에 전념하였다. 한편 그 해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세워 학생들을 교육하며 민족의식을 앙양시켰으며, 각 주요 도시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자기회사(磁氣會社)를 세우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

한편 그 해 7월 일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의 책임을 물어 고종(高宗)을 폐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도 강제 해산시켰다. 군대 해산 당일 남대문밖 세브란스 병원 앞에 위치한 김형제상회에 머물고 있었으며, 일본군에 살해당한 대한제국 군인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펼쳤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일 상하이(上海)에서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를 조직하였다.

1909년 8월에는 신민회의 청년운동 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결성하였다. 청소년이 장래 겨레의 주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더 이상 결사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나 청년학우회는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興士團)’으로 부활하였다.

구국 운동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신민회 지도자들은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해 장기적으로 대일항쟁을 벌이고자 하였다. 이에 미국의 공립협회와 신민회는 재미한인의 주식 투자금으로 북만주 미산(密山)의 봉밀산(蜂蜜山)에 토지를 구매하고 500호 이상의 한인들을 이주시켜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1908년 미국에서 전명운(田明雲)·장인환(張仁煥) 의거가 일어나고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安重根)이 의거를 일으키자 일제 경찰은 공립협회가 관여했다고 판단하였다. 이로 인해 대성학교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용산헌병대로 압송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신민회는 일제의 감시 때문에 구국 운동을 공개적으로 전개할 수 없었기에 국외 독립군기지 개척과 무관학교 설립을 기반으로 한 장기적인 독립투쟁 방략을 택하였다. 이에 1910년 4월경 ‘거국가(去國歌)’를 남기고 망명길에 올랐다.

국외로 탈출하여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신민회 동지들과 향후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한 다음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경술국치 소식을 들었다. 이후 1년여 동안 러시아 연해주에 머물며 동포들에게 단결을 호소하고 독립운동 기반 마련을 위해 전력을 쏟았다. 연흑룡주 총독인 곤닷찌(N. L. Gondatti)를 상대로 한인들의 권한을 보장받기 위한 교섭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11년 5월, 시베리아 횡단 열차편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베를린(Berlin)·런던(London)을 경유하여 9월 3일 미국 뉴욕(New) (York)항에 도착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서는 투병 중인 동지 이갑(李甲)을 방문하고 미국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신한민보』 주필로 초빙하였다. 이후 이갑은 유럽을 경유해 뉴욕항에 도착했지만 입국이 불허되어 시베리아로 되돌아갔다. 이때 미주 동포들이 모금으로 마련한 돈을 이갑의 초빙 경비와 치료비로 보내주었다.

1912년 11월 8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 대표원 의회에 만주지방총회 대표대리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이 자리에서 ‘중앙총회 결성 선포문’이 채택되었고, 그 해 11월 20일에는 중앙총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신민회의 청년운동 조직인 청년학우회의 정신을 계승한 흥사단(興士團)을 창단하였다. 흥사단은 캘리포니아(California)주 여러 곳과 하와이, 필라델피아, 멕시코 등지에 지부를 두었다.

이때 전 세계 한인사회를 조직적으로 통일해 독립투쟁을 지도하고 한인들에게 국민국가 건설의 비전을 심어주고 실현해 가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난관에 봉착하였다. 일본이 러시아와 동맹국으로 참전하면서 만주와 러시아를 무대로 한 독립운동 진영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어 1915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7년 10월 뉴욕에서 열린 소약속국동맹회의에 박용만(朴容萬)을 파견하여 한국의 식민지 현실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1918년 12월 1일에는 ‘재미한인전체대표자회의’를 소집해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 선출과 회의 참가를 준비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3월 13일 열린 대한인국민회 긴급위원회에서 ‘3·1운동을 계승하자’는 연설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민족자결주의의 공포 그리고 파리평화회의 개최와 같은 외부적 요인보다는 민족의 실력을 보여준 1919년 만세운동이야말로 훨씬 중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 독립의 기회가 도래했음을 강조하고 독립전쟁 준비를 위해 단결할 것과 재정공급과 선전활동에 주력해 줄 것을 호소했으며, 미주 각지의 여성 단체들도 통합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한편 미국의 윌슨(Thomas W. Wilson) 대통령과 영국·프랑스·이탈리아·중국 등 5개국 대사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대표 김규식(金奎植)의 출석 허락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 해 3월 24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중국 파견이 결의되면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기 위해 5월 25일에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조직 체계를 갖추고 사업을 전개해 나가는 데 힘썼다. 1919년 7월 임시정부의 국내외 연락업무를 위한 비밀행정조직인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하고, 그 해 7월 2일에는 임시사료편찬회를 구성하며 총재를 맡아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 편찬과 발행에 기여하였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하이·한성 등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자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정부의 위치는 상하이에 둔다는 원칙에 합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1919년 9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을 이루었다. 통일정부 내각에서 한성정부의 직책을 계승해 노동국총판(勞動局總辦)을 맡았다. 총판은 국장급의 직책이라 노동국을 노동부로 격상하고 직함도 총장으로 바꾸자는 권유가 있었으나 이를 사양하였다고 한다.

1920년 1월 1일 임시정부 신년축하회 석상에서 ‘우리 국민이 결단코 실행할 6대사’라는 연설을 통해 군사·외교·교육·사법·재정·통일 6대 사업의 구체적 진행 방법과 실행을 제시하며, 한민족에게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일은 ‘통일’임을 강조하였다.

1921년 5월 노동국총판을 사임하고 독립운동의 최고 방략을 결정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의 준비에 전력을 기울였다. 국내외 단체 대표 160여 명이 상하이에 집결한 가운데 1923년 1월 3일부터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현상유지파’,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창조파’의 팽팽한 대결로 치달았다. 그러자 중도적 해결책으로서 ‘개조안’을 내걸고 합의를 끌어내려 했지만, 국민대표회의가 독립운동 세력의 주도권 쟁탈장이 되어버렸고 회의는 마침내 결렬되었다.

이후 유일당운동과 이상촌 건설을 추진하였으며, 1924년 난징(南京)에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본부를 옮기고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창설하였다. 1924년 11월 상하이를 떠나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1926년 2월까지 미국에 머물며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를 지지해 줄 것과 재정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이상촌 건설 운동에 참고하기 위해 유타(Utah)주 솔트레이크(Salt Lake)의 도시개발 상황을 현지 조사하였다.

미주에 체류한 동안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박은식(朴殷植)이 선출되었고, 박은식 대통령 재임 중 임시정부는 국무령제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1926년 5월 미국에서 돌아온 후 국무령에 선출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6년 국무령에 취임한 홍진(洪震)은 이당치국(以黨治國) 원리를 도입해 유일독립당 결성에 보조를 같이 하였다.

1926년 7월 8일 상하이 삼일당(三一堂)에서 ‘우리 혁명운동과 임시정부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고 임시정부의 재정 후원을 목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조직하여 재정 위기에 빠진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 한편 각지에 한국유일독립당 준비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단체를 통일하는 운동을 전개하였고 유일독립당 결성의 행보를 만주지역으로까지 확대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 진영의 고질적인 사상 분열을 극복하고 노선 갈등의 대립을 유화(宥和)시키고자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하는 대공주의(大公主義)라는 제3의 이념을 제시하였다.

대공주의는 각 계파, 진영과의 소통을 멈추지 않고 민족국가 수립의 비전을 제시하며 비타협적 항일투쟁 노선을 견지하고 민족 구성원간의 신뢰에 바탕을 둔 민족 우선의 통일을 강조하는 주의였다.

1926년 말 지린성(吉林省)을 방문해 유일당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듬해 2월 지린 대동문 밖 최명식의 대동공사에서 ‘조선독립운동의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던 도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이 난입하여 40여 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붙잡힌 이른바 ‘길림사건’을 겪었다. 지린성 당국 및 베이징에 있는 장쉐량(張學良)과 교섭한 결과 20여 일만에 풀려난 후 1927년 4월 1일 길림사건의 현장인 대동공사에서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였다.

한편 정의부(正義部)·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 3부 통합을 위한 신안돈회의에 참석하여 만주지역 유일당운동을 구체화시켰다. 1928년 이후에는 중국 항일운동 세력과 연대하고 민족유일당 결성을 추진하다가 1930년 1월 우익세력 만으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2년 4월 29일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윤봉길(尹奉吉) 의거가 일어난 날 상하이 일본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었다. 4년간 옥고를 겪고 1935년 2월 10일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하여 평남 대보산 송태산장에 은거하였다.

한편 중국 침략을 앞둔 일제가 한국 내 민족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사건’을 일으켰는데, 이때 동우회 회원들과 함께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1937년 8월 15일 예심종결을 거쳐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이후 지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소하였으나, 1937년 12월 24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 내과에 입원하였다가 1938년 3월 10일 사망하였다.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73년 11월 10일 미국에서 가져온 아내 이혜련의 유해와 함께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묘지에 합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안창호 독립협회 시절 사진(가운데가 안창호) [판형3]
안창호 가족 사진 [판형3]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 안창호에게 준 위임장(1912. 1. 23) [판형3]
대한인국민회 본부 앞에서 국민회 회원들과 함께 서있는 안창호(1913, 왼쪽에서 세번째가 안창호) [판형3]
안창호와 흥사단 단원들(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안창호) [판형3]
191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시절의 안창호(1919. 10. 11, 앞줄 가운데가 안창호) [판형3]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판형1]
 
 
⋮이명화⋮

|참고문헌|

在上海 日本總領事館 警察部 第二課,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별책2, 2009) ; 心農 裵亨湜, 『故海石孫貞道牧師小傳』, 基督敎建國傳團事務所, 1948 ; 『공립신보』 ; 『신한민보』 ; 『獨立新聞(상해판)』 ; 『동아일보』 ; 「내가 본 島山과 吉林事件의 眞相」, 『기러기』 133, 1976, 5 ; 노재연, 『재미한인사략 上』, 라성, 1951 ; 김원용, 『재미한인오십년사』, 리들리, 1958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4, 1974 ; 국회도서관 편, 『한국민족운동사료(中國篇)』, 1976 ; 도산안창호전집편찬위원회 편, 『도산안창호전집』, 1~14, 2000 ;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도산학회 편, 『미주 국민회자료집』, 경인문화사, 2005 ; 이명화, 『島山 安昌浩의 獨立運動과 統一路線』, 경인문화사, 2002 ; 장석흥,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안창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6 ; 신용하, 『민족독립혁명가 도산 안창호 편전』, 지식산업사, 2021 ; 이명화, 「도산 안창호의 서대문형무소 투옥과 수감 생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6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 안창호
  • 안창호
  • 공립협회 총회장 당시의 안창호_1905
  • 청도에 가기 전 상해에서 들린 안창호_1910
  • 클래어몬트 학생양성소 교사들과 안창호_1915-1916년경
  • 안창호 가족 사진
  • 멕시코 한인사회 방문당시의 안창호 사진_1918
  • 안창호와 대한인국민회 멕시코 지방회 지도자들_1918
  • 멕시코 한인사회를 순방할 당시의 안창호 여권 사진_1918
  •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겸 국무총리 대리로 활약할 당시의 안창호_1919
  • 김마리아, 안창호, 차경신이 함께 찍은 사진_남경_1924
  • 상해로 돌아온 안창호_1926_1
  • 상해로 돌아온 안창호_1926_2
  •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를 결성하기 위해 각지를 분주히 다닐 당시의 안창호_1920년대 후반
  • 대전감옥에서 출감하는 안창호와 마중나온 여운형이 함께 찍은 사진_1935
  • 안창호 수형 기록표_1932-07-07_1
  • 안창호 수형 기록표_1932-07-07_2
  • 안창호
  • 안창호 독립협회 시절 사진(가운데가 안창호)
  •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 안창호에게 준 위임장(1912. 1. 23)
  • 대한인국민회 본부 앞에서 국민회 회원들과 함께 서있는 안창호(1913, 왼쪽에서 세번째가 안창호)
  • 191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시절의 안창호(1919. 10. 11, 앞줄 가운데가 안창호)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안창호 가족사진
  • 안창호와 흥사단 단원들(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안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