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신규식 申奎植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신규식
한자명 申奎植
본 관 고령(高靈)
이 명 자: 공집(公執), 호: 예관(睨觀), 별호: 신성(申檉), 여서(餘胥), 일민(一民), 청구(靑丘), 한인(恨人)
출신지 충북 청주(淸州)
생몰년월일 1880. 1. 13 ~ 1922. 9. 25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독립협회, 대한협회, 영천학계, 동제사, 신아동제사, 대동보국단, 신한혁명당, 박달학원, 남사, 환구중국학생회, 조선사회당, 임시정부
관련 사건 대동단결선언, 신해혁명
주요 활동 1909년 공업계 창간, 1912년 동제사 설립, 1913년 신아동제사 설립, 1915년 대동보국단 조직, 1915년 신한혁명당결성, 1915년 박달학원 설립, 1917년 대동단결선언 발기인, 1917년 조선사회당 조직 및 만국사회당대회에 대표 파견,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 1921년 임시정부 국무총리대리 겸 외무총장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80년 1월 13일 충청북도 문의군(文義郡) 동면(東面) 계산리(桂山里)(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아버지 신용우(申龍雨)와 어머니 최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공집(公執), 호는 예관(睨觀)이다. 신성(申檉)·여서(餘胥)·일민(一民)·청구(靑丘)·한인(恨人) 등의 별호가 있다.

16살 때 정치문란과 풍기(風氣)의 부패를 우려하여 일본을 배척하고 사악을 배격하는 글로 민중의 경각심을 깨우고자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같은 가숙의 학우들과 소년대를 조직하여 동조하였다.

1896년 봄 고향에서 조정완(趙貞琬)과 혼인한지 3개월 후 신학문 수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관립 한어학교(漢語學校)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중국어와 한국사, 지리 등을 배웠고, 한어학교 재학 중인 1898년에는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주요회원으로 활동하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1900년 9월,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학교 당국의 부패와 불합리한 처사를 비판하곤 하였다. 부패한 군부를 개혁하고자 동기생 조성환(曺成煥) 등과 동맹휴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01년 고향인 인차리(仁次里)에 설립된 문동학원(文東學院)의 교육활동에 관여하였다.

1902년 7월 6일 육군보병 참위(參尉)에 임관되었으며, 견습생활을 거친 뒤 1903년 7월 3일 졸업증서를 받았다. 한편 같은 해, 고향에서 근대식 학교의 면모를 갖춘 덕남사숙(德南私塾)을 설립하고 산술, 측량 등 10여 과목을 가르쳤으며, 유능한 교사를 초빙하는 등 활약하였다. 1904년 육군 참위로서 시위대(侍衛隊)로 배치되었고 1906년 4월 시위 제3대대에 배속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지방군대와 연락한 후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계획 실패로 비관하여 음독자살을 기도하였다가 오른쪽 시신경을 다쳤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군사권을 박탈하였고, 그 해 8월에 발포된 군대해산령에 저항한 시위대 군인들이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사망을 계기로 의거를 일으켰다. 이때 부위(副尉)의 신분으로 병사를 이끌고 대한문까지 진출하여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동지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군대는 해산되었다.

1908년에는 고향 신씨 문중 개혁인사들과 영천학계(靈川學契)를 결성하여 ‘구체신용(舊體新用)’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청주와 문의에 지회를 세우고, 청주에 청동학교(淸東學校)와 문의에 문동학교(文東學校)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9월말,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大韓協會) 실업부 부원과 평의원으로 활동하였고,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도 몸담았다. 식산흥업에 의한 민족자본을 육성하려는 시도로 군복무 중 동료들과 광업회사를 발기하였다. 1909년 1월에는 『공업계(工業界)』란 월간 잡지를 창간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서울 구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사립학교인 중동학교의 중동야학교 제3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1910년 8월 중국 망명을 결심할 때까지 이끌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듣고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나철(羅喆)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1911년 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이후 대종교(大倧敎)의 신도가 되어 한민족의 부흥은 대종교의 발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11년 1월에는 대종교의 지교(知教)에 올라 대종교본사의 경리부장과 종리부장(倧理部長)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4월에는 신정(申檉)으로 개명하였다. 일요일에는 상하이 서이도본사(西二道本司) 교인들과 경배식을 올렸다. 3월 15일의 어천절, 10월 3일의 개천절에는 축하기념식을 거행하였고, 국권 상실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8월 29일에는 국치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단군 초상화와 한국 지도를 들고 다녔으며, 아침저녁으로 단군영정에 경배를 올리고 조국 광복을 기도하였다고 한다.

많은 우국지사가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망명지로 택한 것과 달리, 상하이를 망명지로 택한 배경은 중국혁명의 성공이 곧 한국의 독립해방을 가져올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상하이에서 중국혁명파 잡지 『민립보(民立報)』의 사원 쉬쉬에얼(徐血兒)과 친분을 쌓았고, 그를 통해 중국혁명의 지도적 인물인 쑹자오런(宋敎仁),황싱(黃興), (黃克强), 천치메이(陳其美) 등과도 친교를 맺었다.

1911년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입한 이래 천치메이와 우창혁명(武昌革命)에 동참해 중국 신해혁명에 참여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1913년 7월 ‘위안스카이(袁世凯) 타도운동’이 일어났을 때 천치메이를 도와, 베이징정부의 ‘요주의(要注意)’ 감시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912년 (음)5월 20일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였다. ‘친목융화’ ‘간난상구(艱難相救)’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였다. 동제사는 최성기에 회원이 3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발전하여 상하이 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축이 되었다. 또 상하이에서 결성된 한국 독립운동단체의 효시로, 이후 상하이 지역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 협력단체인 한·중 연합 비밀결사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통해 중국 혁명세력의 지원도 확보하였다. 동제사는 1922년 9월까지 존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동제사의 이사장직을 맡아 총재 박은식(朴殷植)과 동제사 운영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동제사는 시민적 민족주의사상, 개량적 사회주의 사상, 대동(大同)사상과 국혼(國魂)을 중시하는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대종교의 국가적 신앙을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동제사 결성 후, 1912년 말~1913년 초 사이, 상하이에서 천치메이 등과 신아동제사도 조직하였다. 감독을 맡은 천치메이를 비롯해 쑹자오런·랴오중카이(廖仲愷)·다이지타오(戴季陶)·후한민(胡漢民) 등이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중국혁명동맹회 회원으로 신해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들이었다. 신아동제사는 동제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양국 혁명가들의 협력단체로서 최초의 한·중 양국 혁명운동의 호조(互助)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 1913년 12월 17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명덕리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개설하고 한국에서 온 청년들을 교육하였다. 한국청년의 중국, 구미(歐美) 유학을 위한 예비교육이 주요 목표였으며, 영어, 중국어, 지리, 역사, 수학 과목을 가르쳤다. 수학기간은 1년 반으로, 조성환(曺成煥)·박은식·신채호(申采浩)·홍명희(洪命憙)·문일평(文一平)·조소앙(趙素昻) 이외에 중국인 혁명운동가 농죽(農竹)과 미국계 화교 마오따웨이(毛大衛) 등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3기에 걸쳐 졸업생 100여 명을 배출하였고, 중국 내 대학과 구미로 유학을 보내거나 학자금을 알선해 주었다.

이와 함께 바오딩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 텐진군수학교(天津軍需學校), 난징해군학교(南京海軍學校), 후베이강무당(湖北講武堂), 원난군수학교(雲南軍需學校), 광둥강무당(廣東講武堂) 등 중국의 각급 군사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함으로써, 독립운동 인재 양성에 주력하였다.

한편 1913년 말 또는 1914년 초, 중국 혁명지사들이 결성한 문학단체인 남사(南社)에 가입하여, 중국 혁명지사와 문인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방향을 확보하였다. 이어 학생들의 유학알선, 직업지도 및 교육적 기능을 주 업무로 한 환구중국학생회(寰球中國學生會)에도 가입하였다. 이때 리덩훼이(李登輝)·탕원즈(唐文治)·왕페이순(王培蓀)·위르치(余日奇)·주자화(朱家驊) 등과 접촉하였다.

1915년 3월 상하이에서 박은식·이상설(李相卨)·유동열(柳東說)·성낙형(成樂馨) 등과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이후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독립운동의 호기로 활용할 목적으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였다. 당의 규칙과 취지서는 박은식이 기초하였으며, 본부장에는 이상설을 추대하고, 외교부장 성낙형, 교통부장 유동열, 재정부장 이춘일, 감독 박은식이 각각 임명되었다. 이때 상하이지부장을 맡았다.

신한혁명당은 고종을 당수로 추대하고 중국 정부와 신한혁명당의 한국 망명정부 사이에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을 체결하여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하는 군사동맹 체결을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낙형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일제경찰에 붙잡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하여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국제적 지위가 높아진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이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신한혁명당의 계획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전의 시점에서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 정부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방향성을 제시했고, 외교중심론적인 상하이지역 독립운동세력과 무장투쟁론적인 베이징지역 독립운동세력이 연합하는 방법으로 추진하였다는데서 의미가 있다.

신한혁명당의 계획이 무산된 이후, 박은식과 함께 상하이에서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하였다. 대동보국단의 본부는 프랑스 조계 내 명덕리(明德里)에 설치하였다. 1917년 7월 조소앙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대동단결(大同團結)선언』을 발표하였다. 『대동단결선언』은 박은식·신채호·박용만(朴容萬)윤세복(尹世復)·조소앙·신석우(申錫雨)·한진교(韓鎭敎) 등 14명이 발기하였으며, 선언서는 조소앙이 작성하였다. 모든 해외독립운동 세력을 단결시키려는 취지로, 통일된 최고기관 즉 정부의 수립이라는 방향을 제시하면서 대동단결 운동은 진행되었다.

1917년 8월에는 조소앙 등과 조선사회당 명의로 스웨덴 스톡홀름(Stockholm)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선의 독립’을 촉구하는 전문을 보내었다. 전문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이 발칸반도의 문제인 것처럼 일본의 노예상태에 있는 한국문제는 전쟁발발의 요인이 될 것이므로, 모든 민족의 정치적 균등, 국제정의 실현, 피압박민족의 원상복귀, 국제적인 독립한국의 실현 등을 회의의제에 반영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1918년 11월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민족 대표 파견을 결의하자, 본인의 이름으로 한국독립 지원을 요구하는 전문을 발송하였다. 또 1919년 1월 하순 펑톈(奉天)의 정원택(鄭元擇)에게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 파견 및 국내 및 미국 동지와 연계한 거족적 독립운동의 추진 구상을 알리고, 이 사실을 서북간도에 전해 대기응변(待機應變)토록 지시하였다.

이어 1919년 2월 만주, 러시아지역 독립운동가들 39명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다.

그 해 2월 초경 선우혁(鮮于爀)을 평안도지방에 잠입시켜 양전백(梁甸伯)·이승훈(李承薰)·길선주(吉善宙) 등에게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를 파견한 사실을 알리고,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도록 촉구하였다. 또 조소앙을 도쿄에 밀파하여 한국 유학생들에게 파리강화회의 계획을 알리고, 이를 지원하는 독립운동을 거사하도록 종용하였다.

이어 장덕수(張德秀)를 도쿄를 거쳐 국내로 잠입시켜서 일본에서 운동은 2월 초순, 서울에서 운동은 3월 초순에 거사할 예정이니, 양 지역에서의 정황을 통신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도쿄의 2·8독립선언에 이어, 국내에서 1919년 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1919년 3월 하순 상하이 여운형(呂運亨)·선우혁·한진교·김철(金澈)·손정도(孫貞道)·이광수(李光洙) 등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착수하였다. 1919년 4월 1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을 제정 선포하면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19년 4월 제4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또 충청도 구급의연금모집위원으로 선임되어, 같은 해 5월 초 정원택과 김덕진(金德鎭)을 국내로 밀파하였다. 이어 7월 14일 부의장직과 의원직을 사퇴하고 임시정부에서 물러났다. 1919년 9월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 국내에 있는 한성정부를 통합한 통합 임시정부의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3월 이시영과 협성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김규식(金奎植)·안창호(安昌浩)가 내각에서 물러나 국민대표회의 추진을 본격화하고,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태평양회의 참석을 위해 워싱턴으로 떠났다. 같은 해 5월 16일 국무총리대리를 맡게 되었고, 5월 26일에는 외무총장직도 겸하게 되었다. 이때 워싱턴회의에 한국대표단을 파견하여 대한민국의 ‘요구서’를 제출하였고, 신익희(申翼熙)와 함께 중국 남방지역 외교활동의 책임자가 되었다. 1921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친선전권대사 자격으로 광동호법정부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11월 3일 쑨원(孫文) 총통을 접견하고 5개조의 외교문서를 전달하였다. 호법정부와 임시정부의 상호 승인, 한국 학생의 중화민국 군사학교 수용, 차관 지원, 한국독립군 양성을 위한 조차허용 등 조항으로 포함되었다. 이때 호법정부의 임시정부 승인을 이끌어 냈으며, 중국의 각급 군사학교에 한인청년 수용 지시와 북벌 완성 후 한국독립운동 원조 약속을 받아내었다.

1921년 11월 18일, 호법정부가 북벌서사(北伐誓師) 기념식 때,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하여 정식 외교절차에 따라 쑨원을 접견함으로 임시정부와 호법정부와의 공식적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22년 2월 임시정부는 외무부 외사국장 박찬익(朴贊翊)을 광둥주재 임시정부대표로 파견하여 외교업무를 관장토록 하였다.

1922년 2월, 태평양회의가 기대와 달리 성과 없이 끝나자 임시정부는 안팎으로 큰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해 3월 내각은 외교적 실패 등을 이유로, 노백린(盧伯麟) 군무총장을 제외하고 사퇴하였다. 이어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민대표회의 찬성안이 통과되었고 대통령 이승만 불신임이 결의되었다.

1922년 5월 이후 심장병과 신경쇠약으로 병석에 누워 한인들의 분열을 통탄하면서, 25일 동안 단식하며 말하지 않고, 약도 거부하다가 1922년 9월 25일 사망하였다. 이후 상하이 프랑스조계 홍챠오만국공묘(虹橋萬國公墓)에 안치되었다가, 1993년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사론집인 『한국혼(韓國魂)』과 시집인 『아목누(兒目淚)』가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장교 시절 신규식(앞줄 오른쪽) [판형3]
상해 망명 당시의 신채호, 신석우, 신규식(맨 오른쪽이 신규식) [판형3]
신규식(가운데)과 박달학원 학생들 [판형3]
신규식이 쑨원에게 보낸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호법정부에 요청하는 편지 [판형3]
신규식 사망 보도(『동아일보』 1922. 9. 28) [판형3]

 

⋮강영심⋮

|참고문헌|

在上海 日本總領事館 警察部 第二課 編,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국사편찬위원회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별책2, 2009) ; 민족운동연구소 편, 『민족독립투쟁사사료』 제1권, 여론사, 1956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1·3, 東京: 原書房, 1967 ; 宋相燾, 『騎驢隨筆』(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料叢書』 2, 197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7·8·9·12·별집 2, 1973·1974·1975· 1977·1976 ; 추헌수 편, 『(자료) 한국독립운동』 2, 연세대학교출판부, 1971 ; 국회도서관 편, 『임시정부의정원문서』, 1974 ; 일본정부외무성 편찬, 『한국민족운동사자료(중국편)』, 국회도서관, 1976 ; 정원택, 『지산외유일지』, 탐구당, 1983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애국동지원호회, 1956 ; 민석린 편, 『한국혼』, 三省印刷廠(대만), 195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2·3·4·5권, 1971·1972·1973 ; 대종교총본사, 『대종교중광60년사』, 1971 ; 석원화·김준엽 편, 『신규식과 한중관계』, 나남출판, 2004 ; 강영심, 『시대를 앞서간 민족운동의 선각자 신규식』, 역사공간, 2010 ; 신승하, 「睨觀申圭植과中國革命黨人과의 관련」, 『金俊燁敎授華甲記念中國學論叢』, 중국학논총간행위원회, 1983 ; 김희곤, 「同濟社의 結成과 活動」, 『한국사연구』 48, 한국사연구회, 1985 ; 강영심, 「신한혁명당의 결성과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 신규식의 동제사 창립 취지문_1912
  • 신규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엽서_1
  • 신규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엽서_2
  • 신규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엽서_3
  • 신규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엽서_4
  • 신규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엽서_5
  • 신규식과 중국인 동지들 기념
  • 신규식이 중국우인과_남경
  • 신규식이 손문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한 편지_1921
  • 신규식 소장 태극기
  • 신규식 명함_1
  • 신규식 명함_2
  • 신규식 순국 보도기사_동아일보_1922-09-28-3면 5단_1
  • 신규식 순국 보도기사_동아일보_1922-09-28-3면 5단_2
  • 신규식 묘_상해 만국공원_1923
  • 대한제국 군인 신규식
  • 신규식
  • 신규식(대종교)
  • 신규식과 엄주동_상해_1917
  • 상해 망명 당시의 신채호, 신석우, 신규식
  • 신규식과 박달학원 학생
  • 신규식
  •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장교 시절 신규식(앞줄 오른쪽)
  • 상해 망명 당시의 신채호, 신석우, 신규식(맨 오른쪽이 신규식)
  • 신규식(가운데)과 박달학원 학생들
  • 신규식이 쑨원에게 보낸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호법정부에 요청하는 편지
  • 신규식 사망 보도(『동아일보』 1922. 9.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