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규식 金奎植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김규식
한자명 金奎植
본 관 청풍(淸風)
이 명 세례명 요한(Johann), 호 우사(尤史)·죽적(竹笛), 이명 김성(金成)· 김중문(金仲文)·김일민(金一民)·여일민(余一民)·왕개석(王介石), 별칭 변갑
출신지 경남 동래(東萊)
생몰년월일 1881. 1. 29 ~ 1950. 12. 10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신한청년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민족혁명당, 민족자주연맹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18년 신한청년당 참여, 1919년 파리강화회의 전권대표, 임시정부 외무총장, 1922년 극동민족대회 참석,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로 활동,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조직, 1935년 민족혁명당 창당, 1944년 임시정부 부주석, 1947년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1948년 남북연석회의 참가
포상훈격(연도) 대한민국장(1989)

1881년 1월 29일 경상남도 동래(東萊, 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 일대)에서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과 어머니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판봉상시사공파 22대손이다. 호는 우사(尤史)·죽적(竹笛)·만호(晩湖)·서호(西湖) 등이다.

중국으로 망명하였을 때는 김성(金成)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이 외에도 김중문(金仲文)·김일민(金一民)·여일민(余一民)·왕개석(王介石)·한재강(韓再剛)·한중서(韓中書) 등 많은 가명을 썼다. 특히 파리평화회의 참석을 위해 중국으로 귀화하여 여권을 발급받을 때 이름은 김중문(金仲文)이라고 하였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참석 시에는 박경(Pak Kieng)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우사 김규식’으로 불렸다. 세례명은 요한(Johann)이다.

김규식이 지내던 고아학교 교사와 아이들 [판형2]

1884년에 동래부사의 부관으로 무역 업무를 담당하면서 일본인의 횡포를 목격하였던 부친은 불평등조약의 부당성을 시정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가 유배당하였다. 당시 4세로 어머니와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고 있었으나 6세 되던 1886년 어머니마저 사망하였다. 이후 숙부에게 맡겨졌지만, 숙부 역시 형편이 어려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元杜尤)가 설립한 고아학교에 맡겼다. 언더우드 부인 릴리어스 호튼(Lillias S. Horton)이 양자로 삼고 돌보아 주었다.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만나려고 서울 거리를 헤매고 다니다가 아버지를 만나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다. 1891년 여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데 이어 1892년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등졌다. 1894년 가을에는 할아버지 김동선(金東璇)과 큰형 규찬(奎贊)마저 사망함에 따라 13세의 어린 나이에 천애 고아가 되었다. 1894년 3월에는 한성 관립 영어학교(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하여, 제1반 수석으로 졸업한 다음 생계를 위해 식품점 점원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1896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이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사를 설립하자 영어 사무원 겸 회계직으로 독립신문사에 입사하여 취재 기자로도 잠시 근무하였는데 서재필의 권유로 유학을 결심하였다. 17세인 1897년에 언더우드의 후원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9월에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에 있는 루터교 계통의 인문대학인 로어노크대학(Roanoke College) 예과에 입학하였다.

1898년 가을에는 본과에 입학하였는데 재학 시 로어노크대학에는 고종황제의 아들인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등이 재학하고 있었다. 학교 잡지인 『로어노크 대학생 (Roanoke Collegin)』 1900년 5월호에 「한국과 한국어」라는 글을 기고해 한글의 계통, 음운 및 문법 구조의 특성을 역사비교언어학의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또 1902년 2월호에는 「동방의 아침」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기고하였다.

1900년 6월 학내 강연대회에서 1등을 하였고 웅변 토론 클럽인 데모스테니언문학회(Demosthenean Literary Society)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01년 5월에 개최된 강연대회에서는 「인류문화의 비밀-낙관주의」라는 연제로 2등을 하였고 영어·프랑스어·독일어·라틴어 등 어학 과목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1902년 5월에는 휴학을 하고 뉴욕주의 어빙턴에서 학비를 번 다음 복학하였다.

러일전쟁 발발 1년 전 로어노크대학 잡지 1903년 5월호에 기고한 「러시아와 한국 문제」라는 글에서 일본의 승리를 예상하고 “한국이 지금이라도 깨어난다면 머지않아 드리워질 침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대학 시절 우수한 평점을 유지하였고 1903년 6월 전체 3등의 성적으로 6년 만에 로어노크대학을 졸업하였다. 그해 가을 프린스턴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해 1년 만에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박사학위 과정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학비 지원 제안을 받았으나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귀국을 결심하였다.

귀국하자마자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로 일하며 그해 가을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YMCA 교육부 간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YMCA 이사회 이사 겸 서기를 거쳐 YMCA 학관의 교사 겸 학감, 경신학교 교사, 기독교 주일학교 교장, 배재전문학교 영어 강사, 연희전문학교 영어 강사, 조선기독교 대학교 1학년 2개 반 담당 교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배재학당에서 영어와 수사학 과목을 가르쳤다.

신규식과 박달학원 학생 [판형3]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개최된 러·일 강화회의에 참석해 ‘조선 문제’를 변론하고자 상하이(上海)까지 갔으나 돌아왔다. 그해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후 상동청년회의 애국지사들과 교류하였으며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이 되어 강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흥화학교, 광화신숙, 상업전문학교 등에서 영어과 강사로 활동하며 교육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5월 21일에 전 군수 조순환(趙淳煥)의 딸로 새문안교회 교인이며 정신여학교 졸업생인 조은수(趙恩受)와 결혼하였다. 1907년에 장남 진필(鎭弼)이 출생했으나 6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1907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개최된 제7회 세계기독학생연맹세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또 새문안교회 건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10년 5월 29일에 헌당식 행사에서 교인을 대표해 봉헌사를 낭독하였다.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후인 1910년 10월 새문안교회의 두 번째 장로로 선출되었고 YMCA 학생부 담당 간사로도 활약하였다. 1911년 12월 경기·충청도 장로교연합회 서기와 경신학교 교감에 선임되었다.

1912년 2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13년 봄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도쿄 외국어대학교 영어교수직 제안과 도쿄제국대학 동양학과 장학생으로 특별 입학 알선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다.

1913년 4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쑨원(孫文)을 비롯한 중국의 혁명 지사들과 친교를 맺고 중국 혁명에도 참여하였다. 혁명이 실패하고 쑨원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1914년 2월 신규식과 함께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해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가을에 군사학교 설립을 목적으로 유동열(柳東說), 이태준(李泰俊), 서왈보(徐曰輔) 등과 외몽골 우르가(庫倫, 현 울란바토르)로 건너갔다. 군관학교 설립 자금 조달이 쉽지 않자 피혁 장사를 하고 러시아 상업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러시아인들에게 영어 개인교수를 하며 자금을 모았다. 그러다가 화북 지역으로 건너가 성경과 기독교 용품을, 상하이에서는 발동기계를 판매하는 등 화북과 몽골 지방을 오가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였다

1916년에는 미국과 스칸디나비아계의 물산회사인 앤더슨앤드마이어회사(Anderson & Meyer Company)에서 회계 겸 비서로 일하였고 장자커우(張家口) 지점의 부지배인으로도 근무하였다. 이 무렵 아내 조은수가 둘째 아들 진동을 데리고 외몽골로 찾아와 가족이 상봉하였으나 1917년 여름 폐병에 걸린 부인과 사별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볼셰비키 정권이 들어서 제국주의 타도와 약소 민족의 해방을 부르짖는 상황을 배경으로 12월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가 결성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김규식과 김순애의 결혼식 [판형3]

1918년 3월 초 앤더슨앤드마이어상사 몽골 울란바토르 지점장으로 발령이 나서 둘째아들 김진동, 사촌 여동생 김은식(金殷植)과 함께 1918년 6월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바로 톈진(天津)의 미국계 회사인 피어온다니엘주식회사(Fearon Daniel Co, Inc.) 수입부로 옮겨 중국 각지에 델코(Delkor) 전구 판매망을 구축하였다.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 구상이 무르익어갔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Charles R.Crane)이 파리강화회의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하였다. 이때 찰스 크레인을 면담한 여운형은 상하이 한인들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파리강회회의에 한국 대표단 파견을 결의하였다. 1918년 11월 28일 신한청년당 한국대표단 수석대표로 임명되었다.

신한청년단에서 활동한 여운형 [판형2]

파리로 출발하기 전인 1919년 1월 난징(南京)의 한 선교사의 집에서 김순애와 재혼하였다. 중국인 여권을 발급받아 1919년 2월 1일 상하이에서 출발해 3월 13일에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였다. 파리 9구 샤토당 거리(Rue de Chateaudun) 38번지에 사무실을 임대하여 평화회의 한국민대표관(平和會義 韓國民代表館) 즉, 파리한국통신부를 개설하였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걸고 참석한 한국대표단은 프랑스 외교부 측으로부터 회의 참석 대상은 ‘정부의 대표자’ 자격에 국한한다는 통보를 받고, 이 사실을 신한청년당에 알리고 ‘임시정부 대표’ 신임장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열린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총장 겸 파리 주재위원에 선임되었다. 4월 13일 임시정부는 전보로 외무총장 임명장과 파리강화회의 전권대사 신임장을 발송하였다.

파리강화회의 대표단(앞줄 오른쪽 김규식) [판형2]

1919년 5월 12일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 독립 항고서(抗告書)’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또한, 『한국 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비롯해 독립운동 홍보 문서를 각국 대표와 언론에 배포하여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전 세계에 알렸다. 하지만,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열강들은 한국민의 요구를 철저히 외면하였고 회의가 종료되었다.

8월 6일 외국 기자들과 파리 주재 외교관들을 초빙하여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의 지리와 역사를 소개하고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역설하였다. 이후 파리위원부 위원장직을 부위원장 이관용(李灌鎔)에게 넘기고 8월 9일 미국으로 출발하여 8월 22일 워싱턴DC에 도착하였다.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에 추대되어 미국 정부와 정치인들을 상대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9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 국내 한성정부가 통합하여 임시정부가 출범하였을 때 학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9월 말까지 구미위원부와 대한인국민회와 협력하에 미국 서부 지역을 순회하며 독립공채 판매대금으로 약 5만 2,000달러를 모금하여 임시정부로 송금하였다.

1920년 10월 3일 미국을 떠나 하와이,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등을 경유하여 1921년 1월 18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1월 27일 인성학교에서 열린 환영회 석상에서 “복잡한 임시정부 내부 사정과 관련하여 우리가 반성하고 합하여 책임을 다해야 한다”라는 답사를 하였다. 1921년 4월 25일 임시 대통령 이승만과의 갈등으로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사임하였고 4월 29일에는 임시정부 학무총장도 사임한 다음 남화학원(南華學院)을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1921년 5월 국민대표회의 기성촉성회 조직위원으로 회의 개최를 준비하였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소비에트 노농 정부가 주관하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여운형·김시현·나용균·정광호 등과 상하이를 출발해 장자커우와 몽골의 고비사막을 횡단하여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였다. 마침 ‘자유시참변’ 관련 재판이 이르쿠츠크에서 열리던 중이어서 여운형과 함께 배심원 자격으로 재판을 참관하였다. 당초 극동피압박민족대회는 이르쿠츠크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모스크바로 변경되는 바람에 시베리아열차 편으로 모스크바로 향하였다.

1922년 1월 21일부터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개막되었다. 총 144명의 각국 대표 중에 한국은 가장 많은 수인 56명이 참가하였다. 한국 대표 단장 자격으로 “한국은 농민을 주력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항쟁하는 민주혁명을 해야 한다”라는 요지의 개회 연설을 하였다. 레닌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5월 말에 상하이로 돌아왔다.

특파 주차구미위원장의 서명을 기재한 독립공채 [판형2]

극동피압박민족대회는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이론과 정책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종래 민족통일전선 노선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강령과 배치된다고 인식하던 데서 벗어나 민족 혁명 단체들과 제휴하여 민족통일전선 기관을 설립할 필요성이 인정되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창조파 편에 서서 국민위원회 위원과 외무위원장을 맡았다. 5월에는 프랑스 조계에서 열린 중한호조사 창건 2주년 기념회에서 “3·1정신과 5·4운동 정신을 발양해 민족자강을 위해 분투”할 것을 호소하였다. 6월 7일 창조파는 전문 18조의 한국 임시헌법을 제정 발표하였으나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됨에 따라 8월 20일 창조파 일행과 함께 상하이를 출발하여 8월 30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제3인터내셔널 밀사를 만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정부를 창조하고자 했던 창조파의 여망은 레닌의 사망으로 인한 정책 변화로 이루지 못하였다. 1924년 1월 창조파 국민위원회 위원들은 러시아 국경 밖으로 추방되었고 그해 5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만주를 경유해 상하이로 돌아왔다.

1925년 1월 23·26일 자 『동아일보』 지상에 「반성과 단결의 필요」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1927년 2월 난징에서 한국·중국·인도·대만·베트남 등의 민족운동 대표들이 조직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동아시아의 피압박 민족이 연합 단결하여 제국주의에 항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합의하였다.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는 매월 기관지 『동방민족』을 중국어와 영어, 한국어로 간행하였다.

선전부장 김규식의 재미동포 방송 원고 [판형3]

1927년 4월 상하이에서 결성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의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7월 5일자 『연합(Union)』지에 영국과 미국을 배척하는 기사를 투고하였다가 톈진(天津)의 영국 조계 당국에서 체포 명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1929년 1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가 유호(留滬) 한국독립운동자동맹과 한국독립당으로 분리되자 톈진의 북양대학(北洋大學)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를 침공해 괴뢰국 ‘만주국’을 건설하고 이어서 1932년 1월 상하이를 침공하자 안창호와 함께 통일 전선 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러던 중 4월 29일 윤봉길 의거 날 안창호가 체포되어 한국으로 압송되었다. 이후에도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운동에 진력한 결과, 1932년 11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1933년 3월에는 중국 국민당의 민간 사절단 대표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한국 대일전선통일동맹 운동을 전개하였고, 중한민중대동맹 미주 지부를 발족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임시정부 외무장에 임명되었다.

1934년 3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대표대회에서 송병조·김두봉·최동오·윤기섭·윤세주 등과 강력한 결속력과 통제력을 갖는 신당 조직의 필요를 선언하였다. 이리하여 1935년 7월 난징에서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다. 민족혁명당 규칙제정위원으로 참여한 이래 중앙집행위원·국민부 부장 등으로 활동하며 쓰촨대학(四川大學) 교수로 재직하였다.

1942년 10월 중한문화협회 창립대회에서 쑨원의 아들인 쑨커(孫科)가 이사장에 선임되었고, 상무이사에 선임되었다. 이어서 10월 25일에 열린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좌파 세력이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23명이 새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됨으로써 좌우 합작을 성사하였다. 1943년 1월 임시정부 선전부장에 임명되었고, 2월 22일에는 조선민족혁명당 주석에 선출되었다. 이어서 1944년 임시약헌 개정으로 임시정부 부주석에 취임하였다.

중앙청에서 연설하는 김규식(1946.12) [판형3]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그해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 환국 제1진으로 귀국하였다.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간 신탁통치 결정 사실이 발표되자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나섰다. 이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본질이 임시정부 수립에 있음을 간파하고 여운형과 함께 좌우 합작 운동에 앞장섰다.

1946년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부의장에 선임되었으며 2월 18일 민족혁명당을 탈퇴하고 3월 19일 민주의원 의장직을 겸임하였다.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자 적극 지지 의사를 밝혔다. 5월 25일 좌우 합작을 위한 첫 모임 이래 좌우 합작 운동에 적극 나섰으며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과 함께 의장에 선출되어 좌우 합작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47년 10월 1일 민족자주연맹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남북을 통한 총선거안이 의결되고 유엔한국위원단이 한국을 방문하였지만 북한이 유엔 한국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자 남북 지도자 회담을 적극 주선하며 통일 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임시총회에서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 안이 가결되자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였다. 4월 22일 평양에서 개최된 전 조선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려고 민족자주연맹 대표단과 함께 월북하였으나 남북연석회의 전체 회의에는 참석치 않고 남북 요인 회담에 참석하여 남북한의 단독 정부 수립과 분단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으나 5·10 총선거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김구와 통일독립촉진회 등을 결성하여 통일운동에 힘을 기울이던 중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피난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9월에 북한군에 납치되어 끌려가던 중, 그해 12월 10일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명화⋮

|참고문헌|

『청풍김씨 족보』 ; 코민테른, 『극동근로자대회』, 뻬쩨르부르그, 1922(일문판, 1970년) ; 여운홍, 『몽양 여운형』, 청하각, 1967 ; 이정식, 『김규식의 생애』, 신구문화사, 1974 ; 이태호, 『압록강변의 겨울』, 다섯수레, 1991 ; 이명화, 『김규식의 생애와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2 ; 김규식(황건 역), 『양자유경(The lure of the Yangtze)』, 한울, 2000 ; 우사연구회,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1), 도서출판 한울, 2000 ; 우사연구회, 『우사 김규식 통일·독립의 길 가다』(1·2), 논형, 2007 ; 이준식, 『민족의 독립과 통합에 바친 삶 김규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4 ; 임경석, 「극동민족대회와 조선대표단」, 『역사와 현실』 제32호, 한국역사연구회, 1999.
  • 특파 주차구미위원장의 서명을 기재한 독립공채
  • 선전부장 김규식의 재미동포 방송 원고
  • 선전부장 김규식의 재미동포 방송 원고
  • 선전부장 김규식의 재미동포 방송 원고
  • 중앙청에서 연설하는 김규식(1946.12)
  • 김규식
  • 김규식이 다닌 관립영어학교
  • 김규식(SAN FRANCISCO GOLDEN GATE 1933)
  • 신규식과 박달학원 학생
  • 김규식과 김순애의 결혼식
  • 신한청년단에서 활동한 여운형
  • 『한국위원이 강화회의에 제출한 13개조』(1919.4.3)
  • 김규식
  • 김규식이 지내던 고아학교 교사와 아이들
  • 파리강화회의 대표단(앞줄 오른쪽 김규식)
  • 특파 주차구미위원장의 서명을 기재한 독립공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