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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노백린 盧伯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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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노백린
한자명 盧伯麟
본 관 풍천(豊川)
이 명 자 : 경보(景輔), 호 : 계원(桂園), 이명 : 노진방(盧鎭邦)
출신지 황해 송화(松禾)
생몰년월일 1875. 1. 10 ~ 1926. 1. 22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대한협회, 해서교육총회, 대한공업회, 대한광복회, 대한인국민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윌로우스비행학교, 태평양시보사, 보합단
관련 사건 국민대표회의, 의용단사건
주요 활동 신민회 조직, 국민군단 창설, 󰡔태평양시사󰡕 창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총장, 군무총장, 국무총리 역임, 비행학교 설립하여 공군 독립군 양성,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75년 1월 10일 황해도 풍천군(豊川郡) 풍천면(豊川面) 성상리(城上里, 현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상리)에서 부친 노병균(盧秉均)과 모친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어렸을 때 이름은 진방(鎭邦)이었으나, 뒤에 백린(伯麟)으로 바꾸어 불렀다. 자는 경보(景輔)이고, 호는 계원(桂園)이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서울 계동(桂洞) 1번지(현, 중앙 중·고등학교)에 거주한 데서 ‘계원’이라 불렸다.

1880년 6세 때부터 14세까지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비롯한 『사략』·『통감』 등을 배웠다. 1876년 1월 이른바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 체결되어 일제가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할 때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도 어린 시절부터 총명한 기지로 학문에 힘쓰고, 뛰어난 무예(武藝) 기질을 지니고 있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촉망받았다.

1895년 조선 정부는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일본에 유학생을 선발해 파견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에 응시하여 윤치성(尹致晟)·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이조현(李組鉉)·어담(魚潭)·어윤적(魚允迪)·원응상(元應常)·유문환(劉文煥)·김형섭(金亨燮) 등과 함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이때 뽑힌 관비유학생은 모두 114명이었는데,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 위해 인천항(仁川港)을 출발하기 전에 단발(斷髮)하였다. 4월 7일 일본에 도착한 일행은 6월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설립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였다.

게이오의숙에서는 일본어를 비롯한 기초 교육과정을 이수하였는데, 1895년 6월에 입학하여 이듬해 8월에 졸업하였다. 이어 장차 무관이 되고자 사관 예비학교 성격을 지닌 세이조학교(成城學校)에 윤치성·김희선(金羲善) 등 20명과 함께 입학하여 1898년 8월에 졸업하였다. 이 시기 국내에서는 1895년 10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하고, 1896년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이러한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학업을 지속하여 1898년 11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이듬해 11월 제11기로 졸업하였다. 임관과 동시에 도쿄(東京)에 소재한 보병 제1연대와 제3연대 포병대와 공병대에서 견습사관 생활을 시작하였다. 일본에 유학한 청년 장교들의 목표는 귀국하여, 부국강병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이들에게 귀국을 지시하거나 봉급 등을 마련해주지 않아 하루하루의 생계마저 곤란하였다. 정부에 이러한 사정을 탄원하기 위하여 어담·윤치성·김성은(金聖恩) 등과 유학생 대표로 국내로 돌아왔다.

1900년 6월에 귀국하였는데, 그 해 7월에 대한제국 육군 참위(參尉)로 임명되었다. 일본 유학 5년 만에 육군 장교로 부국강병의 기틀을 다지게 된 것이다. 1901년 4월에는 김희선·김형섭·김성은 등과 함께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1908년 육군무관학교 교장을 사임할 때까지 대한제국 간성이 될 사관 양성에 매진하였다.

1904년 4월 부위(副尉)로 진급하였고, 8월부터 군제의정소(軍制議定所) 위원을 맡았다. 그 해 9월 정위(正尉)로 승진되어 학도대장에 보임되었다.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생도 교육에 한창일 때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1904년 10월 윤치성과 함께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수행하여 관전위원(觀戰委員) 자격으로 일본군을 따라 중국 뤼순(旅順)·다롄(大連)·선양(瀋陽) 등의 전선을 시찰하고 11월 27일 귀국하였다.

1905년 4월 참령(參領)으로 승진되어 잠시 무관학교 학도대장에 보임되었고, 7월에는 장교와 하사관 재교육 기관인 연성학교(鍊成學校)로 전직되어 교관과 교성대장(敎成隊長)을 맡았다. 그 해 12월 부령(副領)으로 진급하여 육군 헌병대장을 겸직하였다. 1906년 10월 정령(正領)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연성학교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강직한 성격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군부(軍部) 고위 인사들과 마찰을 일으켜 1907년 4월 이른바 군기문란죄로 정직 처분을 받았다.

2개월 후 징계가 면제되면서 군부 교육국장을 맡았다. 이어 육군각병과조규전범편찬위원장(陸軍各兵科條規典範編纂委員長)에 보임되었고, 8월에는 사관 양성의 최고책임자인 육군무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일제가 1907년 7월 24일 한일신협약을 통해 내정을 장악하고 8월 1일 전격적으로 군대 해산을 감행해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당하였지만, 무관학교는 명목상으로 존속되었기에 교장을 맡게 된 것이다. 결국 1908년 5월 무관학교장을 사임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무관 양성에 주력하면서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애국계몽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이미 1906년부터 서북지방 우국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서우학회(西友學會)에 가입하여 교원 양성에 나섰으며, 1907년 12월에는 보성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상무정신을 고취하였다. 이 시기 안창호(安昌浩)와 교류하며 같은 군인 출신이었던 이동휘(李東輝)·이갑·유동열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창건에 참여하였다. 1907년 11월에는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흥사단은 유길준(俞吉濬)이 국민들의 교육 확대 방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조직한 것이다.

육군무관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난 후, 국권회복방안을 모색하다가 1908년 11월 고향인 풍천으로 내려갔다. 황해도에서도 안악(安岳)을 중심으로 교육구국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풍천에 광무학당(光武學堂)을 설립하여 문무쌍전(文武雙全) 교육을 실시하였고, 이 지역 학회인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에도 가입하였다. 해서교육총회는 면(面) 단위마다 소학교를 설립하여, 황해도 일대 교육을 촉진시키고자 하였다. 1909년 개최된 제2차 총회에서는 회장으로 선출되어 지역 사회 교육 진흥에 앞장섰다.

한편, 경제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실업 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1909년 9월 퇴역한 장교들과 함께 대한공업회(大韓工業會)를 조직하였다. 대한공업회는 그 해 10월 대한흥업회(大韓興業會)로 명칭을 바꾸고 가죽 제품 제조 회사를 차리기로 방침을 세웠다. 단발령 이후 신식 복장이 유행하면서 가죽 구두 수요가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 동기인 윤치성과 가죽 제품을 만드는 기계를 구입하고 기술자를 영입하기 위해 직접 일본에 다녀왔다. 이외에 식료품점, 철공소, 금광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벌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으나, 밀려오는 일본 자본의 공세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고 이에 반대하고자 하는 계획도 마련하였지만, 일제의 삼엄한 경계로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그 해 1월에 발표된 ‘회사령’은 그동안 지속해 왔던 실업 활동도 어렵게 만들었다. 회사를 계속하려면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여기에서도 탈락하였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국외로 망명을 모색하였다. 5년이 넘게 은둔하는 것처럼 지내다가 1916년 7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갔다. 여기서 약 2개월간 체류하면서 각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 해 10월 여권도 없이 유학생 신분으로 위장하여 상하이(上海)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12월 초에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에 도착하였다.

하와이에서 박용만(朴容萬)이 설립한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 별동대 주임으로 군사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5년 창설된 국민군단은 1917년 재정난으로 운영을 중단하게 되었다. 하와이에서 독립군 양성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자, 한인 단체와 언론을 통해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8년 11월 『태평양시사(太平洋時事)』를 창간하여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며, 한국의 절박한 사정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 동포들에게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데 주력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제국 장교 출신의 무관 경력은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 해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에서 군무부 총장으로 이름을 올렸고, 9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면서 군무총장(軍務總長)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당장에 국내나 중국으로 돌아가 군사 책임을 맡을 수 없는 처지였다. 우선 미주 한인사회에 자신의 독립전쟁론을 전파하기 위해 1919년 10월 하와이를 떠나 시애틀을 시작으로 시카고·뉴욕·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 한인사회 순방에 나섰다.

1920년 1월 샌프란시스코 방문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는 대대적인 환영회를 개최하는 동시에 그의 독립전쟁론에 대해 찬사와 지지를 보냈다. 이때 주장한 ‘독립전쟁론’은 독립을 위해서 전쟁을 치러야 하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외교도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전쟁과 외교에 앞서 우리 민족의 통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하였으며,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할 것도 당부하였다.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미주 순방에서 동포들에게 독립전쟁론을 펼치면서, 우선 군인 양성계획을 실행에 옮길 기회를 갖게 되었다. 대한인국민회 총무를 맡고 있던 곽림대(郭林大)는 캘리포니아에서 군인 양성을 제안하였으며, 윌로우스(Willows)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던 김종림(金宗林)·이재수(李在洙)·신광희(申光熙) 등은 군사운동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를 통해 윌로우스에 비행가 양성을 위한 군단을 설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김종림을 비롯한 재미 한인들의 경제적 지원과 당시 일본을 능가할 공군력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미국 각지의 비행학교에 입학해 비행술을 연마하는 한인 청년들이 있었고, 김종림은 실습용 비행기 구입과 군단 운영에 필요한 경비로 2만 달러를 출연하고 40에이커 규모의 토지를 제공해 비행훈련소를 설립하는 기반이 갖추어졌다.

1920년 2월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훈련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이동휘에게도 보고되었다. 그 해 6월 윌로우스 비행학교에 연습용 비행기 2대가 도착하여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에 돌입할 수 있었다. 이처럼 비행학교 운영에 필요한 준비를 거의 마치자,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미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1920년 7월 호놀룰루로 가서 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 등과 교류하면서 중국으로 갈 준비를 하였고, 1921년 1월 출발해 2월 2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2월 18일 민단사무소에서 거행된 환영회에는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하여 각부 총장과 교민 300여 명이 참석할 정도로 환영을 받았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총장은 과연 대장군의 기상이 있어 한번 호령하매 가히 만군(萬軍)을 움직이고 한번 검을 휘두르며 족히 적중을 멸하겠도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답하여 자신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 양성을 위한 학교의 설립을 보고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대동단결하여 투쟁할 것을 강조하였다.

하와이에 있으면서도 군무총장 명의로 임시정부의 기본적인 군사정책을 발표하였다. 1920년 1월에 발표한 군무부 포고 제1호에는 군대양성과 편성을 통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겠다는 자신감이 드러나 있었다. 이러한 군사 위주 정책은 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미 이동휘는 1921년 1월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고, 학무총장 김규식과 노동국총판 안창호도 사퇴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에 임시정부의 혼란이 계속되자, 대통령 이승만과 정부 각료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승만은 1921년 5월 20일 태평양회의를 대비한다는 구실로 미국으로 돌아갔고, 신규식(申圭植) 국무총리 대리를 비롯하여 이동녕(李東寧)·손정도(孫貞道)·이시영(李始榮) 등의 남은 국무위원들과 임시정부의 국정을 책임지게 되었다.

1922년 4월 자신을 제외한 임시정부 국무위원 전원이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태평양회의가 한국인들에게 실망만 남긴 채 종료되자,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이 가중되었고 임시정부도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새로운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개최 요구가 일어나면서 상하이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1922년 9월 25일 국무총리 대리를 맡았던 신규식이 사망하였다. 이에 그 해 10월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임시정부의 무정부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23년 1월 5일 국무원 포고를 발표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하였다. 포고문에는 그 해 1월 3일부터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대한 대응과 기대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대표회의는 회의가 계속되면서 임시정부의 존폐 문제로 의견이 갈려 각지에서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또 다시 갈리는 결과를 낳았다. 국무총리로서 이들 각 파의 의견을 조정하고자 시도하였지만, 사태는 오히려 극단적인 대립으로 흘러갔다. 마침내 김구(金九)가 내무총장에 취임하고 1923년 6월 6일 내무부령을 발표하여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켰다.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 결렬로 정부 존립의 위기는 넘겼지만, 계속되는 재정난과 갈등으로 파행을 거듭하였다. 대의기구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도 정족수 미달로 개원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침내 1924년 4월 국무총리로서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였다. 미국에 있던 대통령 이승만은 이동녕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였고, 이동녕 내각에서 군무총장과 참모총장을 맡았다. 이동녕 내각은 당시 상하이 한인 사회의 소요로 오래가지 못하였다.

1924년 12월 박은식(朴殷植)이 새롭게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이어 박은식은 1925년 3월에 열린 제13회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탄핵, 면직되고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박은식의 천거로 다시 국무총리에 임명되면서 군무총장과 교통총장을 겸임하였다. 당시 임시정부의 인력난이 그만큼 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임시정부의 중책을 맡으며 독립운동계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힘썼으나, 지병인 심장병과 정신 쇠약으로 정상적인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1925년 들어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고, 언어 장애와 시력도 잃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1926년 1월 22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군무총장 노백린 명의로 발표된 「군무부포고 제1호」 [판형1]

 

1920년 5월 19일 노백린이 이동휘에게 보낸 편지 [판형1]

 

일본 육군사관학교 시절의 노백린 [판형1]

 

노백린과 이승만 [판형1]

 

 

 

 

⋮김국화⋮

|참고문헌|

『고종실록』 ; 『승정원일기』 ; 『일성록』 ; 『大韓每日申報』 (국한문혼용판) ; 『대한매일신보』 (한글판) ; 『황성신문』 ; 『대한민보』 ; 『경향신문』 ; 『만세보』 ; 『해조신문』 ; 『독립신문』 (상해판) ; 『동아일보』 ; 『조선일보』 ; 『중외일보』 ; 『시대일보』 ; 『서우』 ; 『서북학회월보』 ; 『삼천리』 ; 『개벽』 ; 『관보』 ; 『시사신보』 ; 『豊川盧氏族譜』 ; 노선경, 『盧伯麟將軍傳記』 (필사본), 1959·1979 ; 노선경, 『盧伯麟將軍實記』 (필사본), 1980 ; 김원용, 『재미한인오십년사』, Reedley(California), 195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1~10, 1971~1978 ;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제국관원이력서』, 탐구당, 1972 ; 국가보훈처 편, 『미주 한인민족운동 자료』, 1998 ; 국가보훈처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 1999 ; 이종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활동」, 『한국사론』 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 홍윤정, 「노백린의 항일독립운동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8,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98 ; 이현희, 「노백린장군의 국권회복운동」, 『김진봉교수정년퇴임기념한국사학논총』, 충북대학교, 1999 ; 이현희, 「노백린 국무총리의 임정지휘정책」, 『정명호박사정년기념논총』, 2000 ;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계원 노백린장군 연구』, 『실학사상연구』 제14집, 신지서원, 2000 ; 이현희, 「노백린의 서울에서의 항일투쟁」, 『향토서울』 61,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1 ; 박민영 외 4인, 『노백린의 생애와 독립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3 ; 이현희, 「노백린의 미국에서의 독립운동(1916~1921)-하와이의 국민군단, 윌로우스의 호국독립군단·비행기학교를 중심으로」, 『백산학보』 70, 백산학회, 2004 ; 홍윤정, 『독립공군 육성에 헌신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8.
  • 일본 육군사관학교 시절의 노백린
  • 군무총장 노백린 명의로 발표된 「군무부포고 제1호」
  • 노백린_profile
  • 1920년 5월 19일 노백린이 이동휘에게 보낸 편지
  • 노백린과 이승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