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식 朴春植 |
한글명 | 박춘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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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朴春植 |
본 관 | 밀양(密陽) |
이 명 | 창씨명 : 행산창길(杏山昌吉) |
출신지 | 경북 청송(靑松) |
생몰년월일 | 1928. 1. 6 ~ 1987. 4. 14 |
운동계열 | 학생운동 |
관련 단체 | 조선회복연구단, 명성회, 안동농림학교 |
관련 사건 | 안동농림학생사건 |
주요 활동 | 1944년~1945년 조선회복연구단에 가입해 활동 |
포상훈격(연도) | 대통령표창(2004) |
1928년 1월 6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진보면(眞寶面) 진안리(眞安里)에서 아버지 박세원(朴世源)과 어머니 김임이(金任伊) 사이에서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행산창길(杏山昌吉)로 고쳤다. 이무학(李茂學)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1936년 경북 임동공립보통학교(臨東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며, 연초경작조합(煙草耕作組合) 지도원인 아버지의 전근으로 석보심상소학교(石保尋常小學校)와 진보국민학교(眞寶國民學校)로 전학하여 1942년 3월 졸업하였다. 같은 해 4월 경북 안동공립농림학교(安東公立農林學校) 10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44년 안동농림학교 3학년 재학 중 선배의 권유로 비밀결사 조선회복연구단(朝鮮回復硏究團)에 가입하였다. 조선회복연구단은 안동농림학교 학생 황병기(黃炳基)·권영동(權寧東)·이갑룡(李甲龍)·장인덕(張寅德) 등이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독립운동을 펼쳐 독립을 쟁취하려는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였다. 이상룡(李相龍)의 손자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귀향한 이대용(李大用)을 비롯한 안동의 지도층 인사들도 참여하여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이들은 일제 관공서를 파괴하여 후방을 교란하고, 연합군의 상륙을 지원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방안을 세웠다. 이를 위해 조직 산하에 참모부·연락부·교화부·신풍부·특공부를 두어 단원들의 체력 증진을 위해 무술을 익히고 통신 절단 등의 훈련을 받았다. 또한 일제의 기밀을 빼내기 위해 우체국 직원을 포섭하고, 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벌이기 위해 철도와 전기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접촉하여 활동에 합류시켰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에서 수세에 몰리자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수업 연한을 5년에서 4년으로 1년 단축시키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회복연구단 회원 가운데 졸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회원들이 졸업할 경우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동안 비밀리에 교류하고 있던 안동농림학교와 경주중학교 학생들로 결성된 또 다른 항일비밀결사 명성회(明星會)도 같은 처지였기 때문에 두 조직이 연합하여 무장투쟁을 실행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1945년 2월 두 비밀결사는 안동농림학교의 무기고를 공격하여 무기를 확보한 뒤 안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고 인근의 의성(義城)까지 진출하기로 계획하였다. 나아가 대구에서 출동하는 일본군 제24부대와 결전을 벌이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거사는 조선회복연구단의 단원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 문제로 일부 단원이 붙잡히는 바람에 연기되었다. 두 비밀결사는 일제가 러일전쟁에서 중국 펑톈(奉天)을 점령한 날을 기념하여 육군 기념일로 제정한 3월 10일에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날 일제가 기념식을 비롯한 여러 행사를 치르기 때문에 경비가 허술할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붙잡힌 단원의 조사 도중 단원 명단을 포함한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1945년 3월 10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미결 상태에서 옥고를 겪다가 광복을 맞아 1945년 8월 17일 풀려났다.
안동농림학교에 복교하여 1946년 6월 졸업하였고, 1954년 경북대학교 농예화학과에 입학하여 1958년 졸업하였다. 1947년부터 전매청 안동지청 관리가 된 이후 농림부 농정국 관리를 거쳐 1967년부터 1971년까지 경북 청송군 진보면 면장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