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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이인영 李麟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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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이인영
한자명 李麟榮
본 관 경주
이 명 자는 공진(公振), 호는 중남(中南), 이명: 이인영(李寅榮), 이시영(李時榮)
출신지 경기 여주
생몰년월일 1868. 9. 23 ~ 1909. 9. 20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관동창의군, 13도창의대진소
관련 사건 정미의병
주요 활동 1896년 원주·제천 의병활동, 197년 관동창의장 활동, 197~198년 13도 창의대장 활동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68년 9월 23일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북면(北面) 교항동(橋項洞)에서 이현상(李顯商)과 청주(淸州) 한씨(韓氏)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공진(公振), 호는 중남(中南), 이명은 인영(寅榮)·시영(時榮)이다. 집안은 대대로 여주군 북면에 거주하며 관직과 문필을 계승한 양반가문이다.

어려서 서울 선비 정동현(鄭東鉉)에게 유학을 배워 어릴 적부터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부친상 중에 국내의 시사문제를 다룬 『도기기언(道基記言)』이란 책을 집필하는가 하면 무신이었던 고조부·증조부의 영향을 받아 군사분야에도 지식이 있었다. 한편 관상·천문·방위(方位)와 같은 분야에도 조예가 깊었고 성품은 호탕하면서도 엄격하고 효성이 깊었다. 직책으로는 무임직인 대성전(大成殿) 재임(齋任)을 지냈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하여 1896년 2월 초에 경기도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는 영월에서 의병장에 오른 제천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이 각지에 보낸 창의격문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여주에는 심상희(沈相禧)가 창의하여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주를 떠나 원주로 이동하여 일본군의 전신선을 절단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민심의 변화와 군량 부족으로 의병운동의 열기가 식어가자 자신의 부대를 떠나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합류했다. 이는 개화파 정부의 의병해산 권유를 받아들여 주변의 소규모 의병부대에 해산을 강요하는 심상희 의병장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1896년 5월 중순 의병부대를 이끌고 충북 수안보와 가흥의 일본군 수비대를 여러 번 공격했으나 무기 열세와 군량 부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96년 5월 하순 제천의병이 전열을 재정비할 때 별영장(別營將)을 맡았고, 이어 후군 소모장 별진에 소속되어 의병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였다. 제천의병이 개화파 정부의 해산 권유를 거부하고 북상할 때 유인석에게 의병부대를 원주군 안창으로 옮기도록 권했다. 그러나 제천의병이 강원도 정선을 거쳐 다른 길을 택하자 따라가지 않고 개화파 정부의 해산권유에 응하여 귀가했다. 이후 정미의병이 일어나기 전까지 부모를 모시고 문경에 은거했다.

1907년 8월말 여주·지평·원주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구채(李球采)와 이은찬(李殷瓚)이 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찾아왔다. 이들은 4일간이나 시사를 논하며 의병장에 오를 것을 간곡히 청했다. 게다가 병석에 누워있던 부친도 창의(倡義)를 적극 권했다. 이에 9월 2일 원주에서 거의(擧義)의 깃발을 들었다.

의병장에 오른 후 각지에 격문을 보내 창의를 독려했다. 그러자 많은 군사들이 몰려들어 대규모 연합부대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제천 일대에서 활동하던 이강년(李康秊) 의병의 휘하 부대와 합동작전을 펴면서, 군사들의 약탈 행위를 엄히 금하고 부족한 군량과 물자는 친일파의 것을 빼앗아 사용했다. 이어 원주는 교통이 불편해 큰일을 도모할 곳이 못되기 때문에 친일파와 일본군을 축출하고 고종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양주(楊州)로 진격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였다.

의병활동의 목표를 고종 구출로 정한 후 관동지역 의병부대의 편성작업에 착수했다. 서울진공작전의 주축을 이룬 관동창의군의 대장이 되었다. 그 휘하에 총독장 이구채, 중군장 이은찬, 좌군장 방인관(方仁寬), 우군장 권중희(權重熙), 유격장 김해진(金海鎭), 좌선봉장 정봉준(鄭鳳俊), 우선봉장 김병화(金炳和), 후군장 채상준(蔡相俊), 운량관 현이보(玄履甫), 재무장 신창선(申昌先)·민춘원(閔春元), 좌총독장 김현복(金顯福), 우총독장 이귀성(李貴成), 진위대사령부 민긍호(閔肯鎬) 등을 임명하였다.

관동창의군을 이끌고 원주에서 지평으로 이동하여 1개월간 머물며 일본군과 수차례 전투를 치렀다. 이때 친일 세력과 일본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하려면 서울진공작전이 반드시 필요하고, 서울진공작전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대규모 연합부대를 편성해야 한다는 인식 하에 군사력 보강에 나섰다. 이에 16진의 병력을 합하여 수천 명의 의병을 모았다. 이렇게 관동창의군의 군세를 성대하게 갖춘 후에 전국 의병부대의 통합과 의병운동이 독립전쟁임을 널리 알렸다.

1907년 10월경 서북 양도를 제외한 전국 각 지역의 의병장들에게 격문을 보내 경기도 양주에 모일 것을 촉구했다. 이는 전국적인 통합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서울로 진격하여 고종 구출작전을 벌이려는 계획에 따른 것이다. 이와 동시에 10월 중순 일본의 대한침략을 규탄하는 격문을 13도 관찰사, 대한매일신보사, 각국 공사관, 일본 통감에게 보냈다.

또한 1907년 9월 25일자 대한관동창의장(大韓關東倡義將) 명의의 격문을 각국 영사관과 미국주재 한인들에게 보냈다. 이는 한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일본세력을 물리치고 국가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관동창의군을 이끌고 지평에서 양주로 이동하여 13도창의대진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수비대와 수십 회의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전투는 1907년 11월 7일부터 9일까지 전개된 지평군 상동면 일대에서 벌어진 삼산(三山)전투와 연천군 마전읍 일대에서 벌어진 마전(麻田)전투였다.

이 두 차례 전투는 을사늑약 후 항일의병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전개한 전투 중 1906년 5월 민종식(閔宗植)의 홍주의병이 치른 홍주성전투와 함께 규모와 피해가 가장 컸던 전투였다. 수천 명의 의병들과 5~600명의 일본군이 동원된 2차례의 전투는 양측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그야말로 대격돌이었다.

격문에 호응하여 양주에 집결한 의병부대는 총 48진, 약 1만 명에 달했다. 구체적으로 직접 통솔하는 부대가 1천 명, 민긍호 부대가 2천 명 등 강원도 의병이 약 6천 명, 경기도의 허위 부대가 약 2천 명, 평안도의 방인관 부대가 80명, 함경도의 정봉준 부대가 80명, 전라도의 문태수 부대가 100명 등이었다. 다만 충북에서 활동 중이던 이강년 부대는 합류하지 못했다.

의병장들이 양주에 집결하고 긴밀한 협의를 거쳐 13도창의대진소를 성립시킨 후, 의병장들의 총의로 13도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대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의병장으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각지 의병을 양주로 집결시키는 데 성공한 점, 을미의병운동 때 공정하게 행동하여 타인의 신뢰를 얻은 점, 양주에 집결한 여러 의병장들 중 신분과 문벌이 가장 높은 점 등이 다각도로 고려된 결과였다.

1만여 명이 양주에 모여 전국적인 연합의병 부대가 성립되자 13도창의군의 직임을 배정했다. 1907년 말에 부대 편제를 전국적 의병조직에 맞게 재편했지만,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느라 상경하여 합류하지 못하는 의병부대가 생김에 따라 1908년 1월경에 다시 부대 편제를 재편했다.

이때 다시 13도창의대장에 올랐고, 군사장에 허위, 관동창의대장에 민긍호, 호서창의대장에 이강년, 교남창의대장에 박정빈, 진동창의대장에 권중희(權重熙), 관서창의대장에 방인관, 관북창의대장에 정봉준 등이 임명되었다. 이는 영·호남 지역에서 활동 중인 문태수·신돌석을 빼고 조만간 상경이 가능한 충청도의 이강년을 그대로 두고, 경기도를 맡은 진동창의대장 허위를 군사장(참모장)으로 승급시킨 재편이었다.

13도창의대진의 서울진공작전 기본구상은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모여 대오를 정비한 후 1908년 1월을 기해 서울에 입성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일제 통감부를 타격하여 항복을 받고 신협약(정미7조약) 등 망국조약들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또 한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인정한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제1조의 내용대로 한국의 독립과 황실의 안전을 꾀하는 것이었다.

이 복안에 따라 허위로 하여금 300명의 선봉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토록 하였다. 그러나 허위의 선봉대는 무기와 화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1908년 1월 15일경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패퇴하고 말았다.

허위를 응원하기 위해 약 2천의 휘하 병력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당도했으나 선봉대의 패배로 인해 의병의 사기가 꺾인 상태였다. 곧이어 1월 28일 부친의 부음을 접하고 “나라에 불충함은 부모에 불효함이고 부모에 불효함은 나라에 불충함이다. 그 도(道)는 하나며 둘이 아니다. 국풍(國風)을 지켜 3년상을 치르고 효도를 마친 후 재기하겠다”며 후사를 군사장 허위에게 당부하고 문경의 본가로 내려갔다. 귀향하면서 활동을 중지하라는 통문을 각 진에 배부했기 때문에 모든 의병부대는 서울진격작전을 중지했다.

3년상을 마치면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일제의 헌병과 경찰이 13도창의대군 주요 인사들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유인석으로부터 외국으로 피신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일본군의 수색이 날로 심해지자 이름을 ‘시영(時榮)’으로 바꾸고 숨어 지냈다. 검문을 피해 노모와 두 아들을 데리고 충북 황간군 금계동에 이거했다. 그러나 끝내 부친의 3년상을 마치지 못하고 1909년 6월 7일 문경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을 때 13도창의대장으로서의 의연함과 당당함을 유지하며 일본인들을 준열하게 꾸짖고 독립정신과 충효정신을 분명히 밝혔다. 창의 목적을 추궁하는 일본인들에게 “시모노세키조약의 내용대로 한국의 독립과 황실의 안전을 꾀하고자 했다”, “우리의 국권을 회복하고 우리의 독립을 공고히 한 후에 간신을 살육하려 충군애국했다”, “충군애국의 뜻은 성의에서 나온 것이다”, “일러전쟁과 군대해산으로 한국의 독립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거의했다”고 말했다.

이는 유교사상에 기반한 충국애국론·반일의식·근황(謹皇)의식·독립정신에 따라 일본군과 친일파를 물리치고 황실을 공고히 하고 한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의병운동을 벌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심문조서 작성이 끝날 무렵 최후 진술을 권하는 일본인들에게 “국가를 위하여 충군애국의 정신으로 창의하여 성의를 나타냈으나 세상사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또 부친의 임종도 뵙지 못하고 말았다. 충효(忠孝) 공히 죄인으로 천지에 몸 둘 바가 없게 되었으니 죽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하였다. 1909년 8월 13일 경성 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내란 조의(造意) 및 지휘범’으로 교살형을 받고, 같은 해 9월 20일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교수대에서 생애를 마쳤다.

임종 시에 서양의 침략을 막아내려면 한일 간의 평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동양평화론이 담긴 한시를 남겼다.

“밝고 밝은 해와 달이 중주(中洲)에 걸렸는데 / 온 세상의 바람과 물결이 넘쳐 흘러드네 / 도요새와 조개는 어찌 그리도 다투는가 / 서주(西洲)가 힘도 안들이고 그 둘을 잡아가겠네.”

유해는 가족에게 인계되어 처음에는 처가가 있는 원주에 묻혔다가 나중에 김천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3도 창의군 서울진공 관련 보도(『황성신문』 1907. 11. 10) [판형3]
이인영 체포 관련 일제 측 보고(1909. 6. 8) [판형3]
『신한민보』에 실린 이인영 격문(『신한민보』 1919. 1. 23) [판형3]
이인영이 사망한 경성감옥(현 서대무형무소역사관) [판형3]

 

⋮오영섭⋮

|참고문헌|

『대한매일신보』, 1909. 7. 28~8. 1 ; 宋相燾, 『騎驢隨筆』(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料叢書』 2, 1971)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1, 1965 ; 오영섭, 『고종황제와 한말의병』, 선인, 2007 ; 정달웅, 「한말 의병장 이인영 연구-13도의병항전을 중심으로-」, 고려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73 ; 신용하, 「전국‘십삼도창의대진소’의 연합의병운동」, 『한국근대민족운동사연구』, 일조각, 1988 ; 오영섭, 「한말 13도창의대장 이인영의 생애와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9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2 ; 오영섭, 「한말 의병운동의 발발과 전개에 미친 고종황제의 역할」, 『동방학지』 12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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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영
  • 13도 창의군 서울진공 관련 보도(『황성신문』 1907.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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