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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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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찬 李殷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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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이은찬
한자명 李殷瓚
본 관 전주(全州)
이 명 은찬(殷贊), 언찬(諺讚), 헌찬(憲讚)
출신지 강원 원주
생몰년월일 1878 ~ 1909. 6. 16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관동창의대진소, 13도창의대진소, 임진강연합의병, 창의원수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896년 김천의병, 197년 관동창의대진소 결성, 13도창의대진소 결성, 198년 임진강연합의병 결성, 창의원수부 조직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부흥사면(富興寺面) 신성리(薪城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78년생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이명은 은찬(殷贊)·언찬(諺讚)·헌찬(憲讚)이다. 유생(儒生)이나 가계와 학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896년 (음)2월 이기찬(李起燦)·허위(許蔿)·조동호(趙東鎬) 등과 함께 경북 김천(金泉)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경북 김산(金山)과 성주(星州)를 점령하고 대구진격작전을 전개하였으나 대구부 관군 등의 공격에 패하여 체포되었다.

1907년 7~8월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을 계기로 의병전쟁이 일어나자, 고향 원주에서 해산 군인 80여명을 모집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8월 말경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이구채(李球采)와 함께 경북 문경(聞慶)에 은둔하던 이인영(李麟榮)을 방문하여 의병부대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간청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9월 초순 원주에서 이인영을 대장으로 하는 관동창의대진소(關東倡義大陣所)를 조직하였고 이인영을 도와 평안·함경지역을 제외한 각 지역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보내 연합의병 결성을 제의하였다. 그 결과 10월 중순 연합의병 결성에 호응한 경기·충청·강원지역 의병부대 등과 제휴하여 관동창의대진소 부서를 확정하였다. 관동창의대진소 중군장(中軍將)으로 선임된 직후 전국연합의병부대를 결성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자는 격문을 각지 의병부대에 발송하여 경기도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12월 경기도 양주에 허위(許蔿) 등 각지 의병부대가 모이자, 의병장들과 협의 끝에 전국의병연합체인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하였다. 1908년 1월 초순에는 다시 경기·강원·충청·황해 중심의 의병부대인 이인영·허위·민긍호(閔肯鎬)·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개편·정비하는 등 13도창의대진소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3도창의대진소는 1월부터 두 달여 간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하였으나 서울 탈환에 실패하였다.

서울진공작전 실패 후 2월경 경기 동북지역과 임진강 유역으로 근거지를 이동하여 재차 의병부대 연합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허위를 중심으로 김규식·연기우·권중설·조인환·왕희종·김진묵 부대와 박종한·김수민 등과 3~4월경 허위를 중심으로 임진강연합의병을 결성하고 재차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하였다. 4월 21일 전국 13도 의병의 재궐기를 호소하는 통문을 발송하였고 5월 박노천(朴魯天)·이기학(李基學) 등을 서울로 보내어 통감부 폐지, 외교권 반환 등 정치경제적 침략을 철회하라는 30개 요구조건을 제시하면서 항전하였다.

일제는 임진강 연합의병을 소탕하기 위해 의병들에게 회유공작을 전개하는 한편, 각 수비대·헌병대 등이 협력하여 이른바 의병토벌작전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6월 임진강연합의병의 중심인물인 허위가 체포되자, 연합의병은 해체되었다.

허위 체포 이후 경기 동북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겨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6월 22일 의병 100여명과 포천군 청원면(淸原面) 고금리(古琴里)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3시간 동안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27일에는 경기 광주 남쪽에서 의병 80여 명과 함께 이천수비대와 싸웠으나 13명의 부하를 잃었다. 7월 4일에는 포천군 내동면(內洞面) 소학리(巢鶴里)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 끝에 의병 5명이 사망하는 등 패전을 거듭하였다.

이에 해외로 거점을 옮기기로 결심한 뒤 7월 25일경 강원도 철원에서 부하 100여명을 해산시키고, 강본(姜本)과 함께 유인석(柳麟錫)이 있는 중국 지린성(吉林省)을 향해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도에 중국 망명을 포기하고 경기 동북지역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10월경 흩어진 의병부대를 수습·정비하고 경기 동북지역 최대의 연합의병인 창의원수부(倡義元帥部)를 결성하였다.

허위의 부장(部將)으로 활동하다 허위가 체포된 후 관동창의원수부 진영대장으로 독립·활동하던 윤인순(尹仁淳)을 좌군장으로, 군 출신 정용대(鄭容大)를 우군장으로 임명하였으며, 자신은 중군장으로 창의원수부를 이끌었다. 또한 의병부대 보강을 위해 파주군(坡州郡) 순교(巡校) 출신으로 윤인순 의병부대에서 활약하다가 은거하던 김귀손(金貴孫)을 선봉장(先鋒將)으로 임명하였다.

이외에도 부장·참모·군량장·종사·부관 등을 두었다. 그러나 창의원수부는 조직상 정용대·윤인순 의병부대를 좌군·우군으로 포진시킨 것이고 실제로 두 부대는 각기 독립부대로 활동하다가 대규모 전투수행 시 상호연합작전을 구사하였다.

이후 김교성·윤인순 부대와 연합의병을 형성한 뒤 12월 2일 포천군 외소면 하송우리(下松隅里)에 의병을 파견하여 포천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헌병대·경찰의 병력과 배치 등을 탐문하였다. 다음날 포천헌병분견소로 격문을 보낸 뒤 가평으로 이동하여 전투 준비를 하였다. 이때 헌병분견소로 보낸 격문은 포천지역내 일본군 병력인 수비대·헌병대·경찰 등을 섬멸하기 위한 유인책이었다.

격문을 받아 본 포천헌병분견소는 포천수비대와 양주경찰서·포천주재순사 등에게 연락하여 의병토벌을 위한 연합대를 조직하고 그 날 밤 포천에 이르러 의병부대를 정찰하였다. 일본군은 이튿날인 12월 4일 연합의병이 가평군 상면(上面) 서파동(西派洞)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가평으로 추격하였다.

한편 연합의병은 서파동 민가 옥상에 수 명의 보초를 세워 일본군의 진입여부를 살피는 한편, 도로 좌우편 계곡과 일본군 진입 도로 전방에 의병을 3개조로 나누어 매복시켰다. 일본군이 계곡 입구 막다른 도로에 들어서자, 의병부대는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2시간 반 가량의 ‘가평 서파동전투’에서 일본군은 135발의 총탄을 소비할 정도로 싸우다 겨우 탈출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연합의병부대도 선봉장과 5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가평 서파동전투 후 연합부대는 포천방면으로, 윤인순 부대는 양주방면으로 나누어 퇴각하였다. 연합부대는 12월 8일 포천군 동촌면(東村面) 마근담리(麻根潭里)에 도착하여 의병을 ‘적도(賊徒)’라고 주창한 동장(洞長)을 처형하였다. 그 후 다시 윤인순 부대와 합류한 뒤 12월 19일 양주군 별비면(別非面) 연지동(連池洞)에서 퇴계원헌병분견소 헌병들과 전투를 벌였으나 의병 3명이 부상당하였다.

다음날 20일 의병부대를 이끌고 다시 퇴계원을 습격하여 전투를 벌인 뒤 건천면(乾川面) 식동리(植洞里)로 이동하였으나 추격해오는 일제 헌병들과 다시 전투를 벌였다. 이 보고를 접한 용산수비대와 경성헌병분대에서 병력을 급파하였다. 일본군 지휘부는 의병부대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12월 14일 경비선 전화를 설치하였다.

1909년 1월 4일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포천군 장거리(場巨里)와 서면(西面) 송우리(松隅里) 간 경비전화주(柱) 5본(本)을 절단하여 일본군끼리의 연락을 두절시킨 뒤 포천군 현내면 장거리 서쪽에서 포천헌병분견소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1월 7일 윤인순 부대와 함께 양주군 이담면(伊淡面) 유산리(杻山里)의 헌병분견소를 습격한 뒤 부대를 2대로 나누어 퇴각하였다. 이때 직접 100여 명을 인솔하고 8일 파주군 천현면(泉峴面) 후발리(後發里)에서 다른 부대와 합류를 기다렸다. 의병부대의 기습공격에 타격을 입은 일본군은 1909년 1월 8일부터 이른바 연합의병 토벌작전을 개시하였다.

강원도 금성수비대장은 김화·삭령(朔寧)·철원(鐵原)·포천·적성지역 일본군은 물론 서울 용산의 일본군까지 동원하였다. 파주에 도착한 의병부대는 부근 산 정상에 주둔하면서 수 개소의 초소를 세우고 잔여 병력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월 8일 의병부대가 광탄면을 경유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파주주재 순사대는 문산주재 순사대와 연합하여 9일 의병부대를 공격하여 3시간여 동안 교전하였다.

가평 서파동전투·퇴계원전투·장거리전투·유산리전투 등 의병부대의 공격에 대해 일본군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의병부대의 기습 소문이 나돌 때마다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리하여 일본 헌병대는 1월 14일자로 포천분견소에 배치되어 있는 하사 이하 12명을 장교 이하 25명으로 증원함과 동시에 양주군 후평리에도 하사 이하 10명을 증원시켰다. 또한 일본군 수비대 역시 종래 장거리수비대 외에 따로 포천군아(郡衙) 소재지에 보병 제13연대 제2중대를 1월 16일자로 주둔시켜 병력을 강화하였다.

양주 후발리 전투 후 포천으로 이동한 부대원 300여 명과 함께 1월 15일 밤 포천군 서면 내동(內洞)과 가산면(加山面)을 기습·공격하였다. 이즈음 순종의 평안도 순시 계획을 전해 듣자, 순종의 순시 저지와 함께 대대적인 일본군 습격작전을 세우고 전투에 필요한 군자금과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월 25일부터 28일까지 의병부대를 이끌고 양주군 석적면(石積面), 적성군 남면, 석적면 덕두리(德頭里)에서 헌병대 등과 교전하였다.

1월 30일 포천군 송현리(松峴里)에 포진한 의병부대에 김준식(金俊植)·맹군집(孟君集)·윤인순·오수영(吳守泳) 등 의병장들이 합류하여 200여 명의 연합의병을 형성하였다. 이때 양주·포천 방면을 담당하였고, 윤인순은 양주·파주 방면, 정용대는 가평·영평 방면으로 각기 분산·이동한 후 다시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

1월 30일 송현리를 출발하여 2월 3일 영평군 일동면으로 이동하였다. 2월 4일 영평군 이동면에 의병이 집결했다는 보고를 받은 영평헌병분견소장은 병력을 인솔하여 정찰 중 이동면 중진리(重進里)에서 의병부대의 기습 공격을 받고 겨우 탈출하였다. 탈출 후 영평헌병분견소는 포천헌병대와 연합부대를 구성하여 2월 5일 다시 의병부대를 공격하였다.

미리 송림 사이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본 헌병분견대가 이동면 노곡리(蘆谷里) 부근에 도착하자, 맹렬히 기습 공격하였다. 또한 뒤늦게 주포(周浦)헌병대가 도착하자, 두 시간가량 전투를 벌였다.

2월 3·4일경 영평 일동면과 이동면에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통감·일본군 고위간부·경찰관 등을 처단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는 소규모 부대로 인한 의병전쟁의 한계성을 느끼고 의열투쟁을 의병전쟁의 일환으로 채택하여 소수의 테러를 통한 파급의 효율성을 고취하고자 한 것이다. 2월 6일 양주 어등산면(於等山面)에서 의병토벌에 나섰던 가와노(川野)수비대 제2분대와, 7일에는 포천 내동면(內洞面) 오림리(五林里)에서 양주헌병분견소원들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11월부터 3개월 동안 포천·양주지방 산악을 배경으로 줄기찬 활동을 벌였던 연합의병부대는 2월 상순경 연일 계속된 전투로 군량미·탄약 결핍, 부상·사망으로 인한 병력 감소, 부상 등으로 이탈자가 발생하는 등 의병진영 내부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이에 연합의병은 당분간 부대를 수습, 정비하기 위해 분산을 결정하였다. 이때 부대를 이끌고 포천·영평로 향하고, 윤인순·김교성 부대는 영평·양주 방면으로 분산한 후 2월 21일경 먼저 분산된 정용대 의병부대를 포함하여 양주에서 다시 합류하기로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군자금을 모집하여 무기와 군량미를 확보하며 병력을 보충하는 등 부대 재정비계획을 세웠다. 그 일환으로 가장 먼저 세운 계획이 우편물 탈취계획이었다. 당시 우편물에는 재무서에 납부된 공금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탈취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2월 13일 영평군 내면(內面) 양문리(梁文里)에서 군자금을 요청하는 한편, 당일 밤 양주군 이담면에 부하를 파견하여 밀정 조석근(趙錫根)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영평 일대 각 면·동장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군자금 확보에 주력하였다. 또한 영평군 이동면 연곡리에서 동민들 뿐 아니라 헌병보조원과 한인 순사에게 고시서를 배포하여 의병 가입을 권유하였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의병부대는 1월보다 100여 명이 늘어난 250여 명, 윤인순 의병부대는 30여 명이 늘어난 103여 명의 의병을 확보하고 진영을 정비하여 전투를 재개하였다. 2월 20일 15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포천 가산면(加山面) 용단동(龍但洞) 부근 고지에서 포천수비대·순사대의 토벌연합대와 교전하였으며 그 후 정용대 의병부대와 합류하였다. 정용대 의병부대와의 연합의병을 이루어 2월 25일 17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양주군 석적면 항동(項洞) 부근에 잠입하였다.

이때 일본 미즈노(水野) 순사대가 연합의병부대가 이곳에 주둔한 것을 탐지하고 하타(畑) 순사대와 연합하여 정찰을 개시하였다. 이에 인근 부락민의 제보로 토벌대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전투를 준비하였다. 석적면 돌압산에서 매복과 협공 등 기습 공격으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돌압산전투 승리 후 연합의병부대는 의병장 윤인순의 고향인 석적면에서 다시 윤인순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부대를 강화하고 두일리(斗日里) 부근에서 주둔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양주경찰서 소속 정찰대는 2월 27일 양주경찰서와 양주헌병분견소에 연락·출동하던 도중 유산리 헌병분견소원들을 만나 세 부대가 연합·추격하였다.

이 무렵 덕도리(德道里) 부근에서 고양헌병분견소와 북한산파견소 헌병들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 세 부대가 협공하자 탄약을 모두 소모하는 등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이후 탄약 등 물자를 확보할 때까지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행동한 다음, 재집결할 것을 약속하고 윤인순 의병부대와 결별하였다.

윤인순과 분리 후 3월 1일 의병 80여명을 이끌고 양주군 회암면(檜岩面) 귀율리(貴栗里)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3월 2일 일본 토벌연합대의 공격으로 사망자 1명과 부상자 10명 등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포천으로 이동한 의병 100여 명은 3월 4일 외소면(外所面) 무림리(茂林里)에서 의정부헌병대의 공격을 받고 퇴각하였다.

탄약 결핍과 전투력 상실을 포착한 일본군은 의병부대 토벌의 최적기로 판단하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단행하였다. 먼저 양주헌병분견소 관구장(管區長) 특무조장(特務助長) 요시모토(吉本龜吉)는 3월 5일 관내의 모든 헌병과 보조원을 동원하여 의병대토벌계획을 수립하고 포천헌병분견소에서 출장·지휘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같은 날 양주경찰서 역시 경찰대원을 전부 동원하여 토벌대를 편성하였다.

3월 6일 양주군 어등산면 현암리(玄岩里) 부근으로 이동·잠복해 있었다. 이때 양주경찰서 소속 고노(河野)토벌대가 정찰 중 눈 위의 발자욱을 보고 의병들을 추적하여 교전하였다. 현암리 전투 후 의병부대를 해산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일망타진할 기회로 인식한 경기북부지역 일본군은 양주관내 주둔 헌병과 분견소 외 임시주둔소 4개를 합친 100여 명, 상비수비병 90여명 등 약 200여명으로 3월 8일부터 이른바 대토벌에 나섰으며, 15일부터는 서울의 용산수비대 기토(木藤) 소좌가 인솔하는 1대대까지 가세하여 총 300여 명의 일본군이 연합의병 대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이같이 그물망처럼 짜여진 일본군의 배치는 의병 상호간의 연대를 차단, 고립시켰다. 또 일본군은 의병과 지역 주민과의 강력한 유대관계를 차단하고 의병의 활동근거지를 뿌리 뽑을 목적으로 의병 거점이나 그들이 지나간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등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하였다.

이른바 일본군의 대토벌로 인해 해산 의병은 각지로 잠적하였다. 이 과정에서 3월 16일 윤인순이 전사하였다. 포천·양주 내에서는 더 이상의 활동근거지가 없음을 깨닫고 간도로 거점을 옮기고자 하였다. 이 계획을 눈치챈 밀정 박노천(朴魯天)·신좌균(申左均) 등은 함께 의병 활동을 하다가 변절한 조수연(趙壽淵)을 시켜 의병 활동비용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유인하였다. 3월 30일 박노천·신좌균을 만나기 위해 용산으로 갔다가 오전 12시 용산정거장 부근에서 용산경찰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4월 21일 경성지방재판소로 넘겨진 후 심문을 받았다. 재판정에서 “나의 거의는 홀로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함이니, 오늘에 이르러 어찌 자신의 영욕을 생각하랴”고 답변하였다.

옥중에서는 “오얏나무 가지 하나로 배를 만들어 / 창생을 건지고자 해변에 띄웠는데 / 조그마한 공도 이루지 못하고 먼저 물에 빠지게 되었으니 / 누가 동양의 만년을 기약하리오”라는 시 한 수를 남겼다.

1909년 5월 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을 받고 6월 16일 서문 밖 경성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때 “지금 내가 의병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여 천하에 대의를 펴고자 하다가 지금 너희에게 죽임을 당하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너희 나라는 천하대세를 알지 못하고 우리나라를 삼켰으니, 반드시 천하의 시기를 받아 곧 망하리라. 나는 죽어도 내 눈은 마땅히 썩지 않고 너희가 망하는 꼴을 볼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정미의병 때 호남지역에서 사용했던 의병 무기 [판형3]
이은찬·정용대 연합의병 전투지 항동 마을입구(경기도 양주) [판형3]
지역민들의 이은찬 환대에 관한 일제 측 보고(1909. 1. 6) [판형3]
이은찬 활동 관련 일제 측 보고(1909. 1. 19) [판형3]
판결문(경성지방재판소, 1909. 5. 8) [판형3]
이은찬 사형 보도(『황성신문』 1909. 6. 17) [판형3]

 

⋮김도훈⋮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지방재판소, 1909. 5. 8 ; 『황성신문』, 1909. 5. 12, 6. 17 ; 『대한매일신보』, 1909. 4. 1·3·24, 5. 12, 6. 17 ; 『신한민보』, 1935. 5. 2 ; 『폭도에 관한 편책』 ;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維新社, 1920 ; 宋相燾, 『騎驢隨筆』(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料叢書』 2, 197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 김순덕, 「경기지방 의병의 조직과 활동(1907~1911)」, 『역사연구』 창간호, 구로역사연구소, 1992 ; 김도훈, 「한말 이은찬의 연합의병운동과 창의원수부의 활동」, 『북악사론』 5, 북악사학회, 1998 ; 박진태, 「한말 포천·양주지역 의병장 이은찬의 사상」, 『인문학연구』 4, 대진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7
  • 한국진위대에 보낸 격문_1907-11-15_1
  • 한국진위대에 보낸 격문_1907-11-15_2
  • 한국진위대에 보낸 격문_1907-11-15_3
  • 한국진위대에 보낸 격문_1907-11-15_4
  • 의병들의 양주군 방곡령에 관한 일제 보고 문서_1908-10-23_1
  • 의병들의 양주군 방곡령에 관한 일제 보고 문서_1908-10-23_2
  • 지역민들이 이은찬을 환대한다는 일제 보고 문서_1909-01-06_1
  • 지역민들이 이은찬을 환대한다는 일제 보고 문서_1909-01-06_2
  • 이은찬이 국외에서 무기를 수입한다는 일제 보고 문서_1909-01-19_1
  • 이은찬이 국외에서 무기를 수입한다는 일제 보고 문서_1909-01-19_2
  • 이은찬.정용대 연합의병 항동 전투지_양주시 은현면 도하리_1
  • 이은찬.정용대 연합의병 항동 전투지_양주시 은현면 도하리_2
  • 1909년 2월 의병세력비교표_1909-03-16_1
  • 1909년 2월 의병세력비교표_1909-03-16_2
  • 1909년 2월 의병세력비교표_1909-03-16_3
  • 1909년 2월 의병세력비교표_1909-03-16_4
  • 1909년 2월 의병세력비교표_1909-03-16_5
  • 1909년 2월 의병세력비교표_1909-03-16_6
  • 의장의 강개어_신한국보 제2권 11호_1909-05-04_3단
  • 이은찬 판결문_1909-05-08_경성지방재판소
  • 의병장이은찬공추모비_원주시 학성동
  • 계봉우의 의병전_독립신문_1920-05-08_1면1단
  • 정미의병 때 호남지역에서 사용했던 의병 무기
  • 이은찬·정용대 연합의병 전투지 항동 마을입구(경기도 양주)
  • 지역민들의 이은찬 환대에 관한 일제 측 보고(1909. 1. 6)
  • 이은찬 활동 관련 일제 측 보고(1909. 1. 19)
  • 판결문(경성지방재판소, 1909. 5. 8)
  • 이은찬 사형 보도(『황성신문』 1909.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