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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장호 朴長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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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박장호
한자명 朴長浩
본 관 밀성(密城)
이 명 호 : 화남(華南), 자 : 양직(養直)
출신지 경기도 가평(加平)
생몰년월일 1850. 6. 22 ~ 1923. 5. 18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관동의병, 보약단, 대한독립단, 친목계, 대한의군부
관련 사건 중기의병, 후기의병, 경신참변, 태평양회의
주요 활동 1906~1908년 의병 활동, 1914년 보약단 조직, 1919~1922년 대한독립단 총재로 활동, 1920년 친목계 조직, 1921년 태평양회의 대책 논의, 1923년 대한의군부 총재 선임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62)

1850년 6월 22일 경기도 가평군(加平那) 북면(北面) 이곡리(梨谷里) 화양동(華陽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기우(朴蘷祐)이고 어머니는 우씨(禹氏)이다.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자(字)는 양직(養直)이고, 호(號)는 화남(華南)이다. 강의혁(姜義赫)의 딸과 결혼하였다. 자녀는 박필보(朴弼輔) 외 3명이다. 1902년 2월 부인 강씨와 사별하였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중암(重菴) 김평묵(金平熱),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유인석(柳麟錫)·유기일(柳基一)·홍재구(洪在龜)·홍재학(洪在鶴) 등과 함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병자연명상소(丙子聯名上疏)를 올렸다.

을사늑약 이후 1906년 강원도 홍천군(洪川郡) 서석면(瑞石面) 풍암리(豐巖里) 일대를 중심으로 관동의병(關東義兵)을 조직하였다. 1907년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영남(嶺南)·호좌(湖左)·관동(關東)·관서(關西)·관북(關北) 등지에서 선도적으로 일본군에 대항하여 항일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11월 3일 민긍호(閔肯鎬)·주광석(朱光錫)과 함께 의병 400여 명을 지휘하여 강원도 양양(襄陽)을 공격하고 일본군과 교전하여 일본군 군조(軍曹)를 사살하였다. 11월 27일 주광석·박내익(朴乃盆) 등과 함께 의병 1,000여 명을 지휘하여 강원도 강릉(江陵)을 공격하고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2월 이강년과 만나 서울 진공 작전에 대해 논의하였다.

1908년 1월 6일 강원도 화천(華川)에서 이강년 의병부대와 함께 일본군과 교전 중 총상을 입었다. 3월 2일 가평군 가계(佳溪)에서 이강년 의병부대와 함께 일본군과 약 3시간 동안 교전하였다. 4월 2일 화천에서 출발하여 황해도로 이동하였다. 10월 화동창의대장(華東倡義大將)으로서 의병과 군자금을 모집하는 통문을 발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1913년을 전후하여 자신이 지휘하던 의병부대와 함께 서간도(西間島)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1914년경 서간도 지안현(輯安縣) 패왕조(霸王槽)에서 이진용(李鎭龍)·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圭)와 함께 자치단체인 보약단(保約團)를 조직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직후 서간도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 조직될 때, 도총재(都總裁)에 선임되었다. 서간도 콴뎬현(寬甸縣) 소아보(小雅堡)에서 백삼규와 함께 유인석의 문인 방인성(方寅聖)을 만나 대한독립단에 참가시켰다. 1919년 5월 김기한(金起漢)을 만나 대한독립단에 가입시켰다.

1919년 8월 만주 각지와 한반도에 대한독립단 지단을 설치하기 위해 도총재로서 총무장(總務長) 조맹선·김원섭(金元燮), 부단장 최영호(崔永浩)와 함께 연서하여 22개조로 구성된 「대한독립단 내지(內地) 분치기관(分置機關) 임시통칙(臨時通則)」을 발표하였다. 같은 시기 대한독립단 경기도지단 설립을 위해 강지형(姜芝馨)을 경기도 도시찰(道視察) 소모(召募) 전권위원에 임명하였다.

1919년 10월 대한독립단 사한원(司翰員) 김기한을 비롯하여 노태희(盧泰熙)·강지형에게 서간도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도록 지시하였다. 같은 해 11월 김인수(金引叟)와 만나 대한독립단에 참가시켰다. 같은 시기 김기한을 만나 한반도 내 대한독립단 지단 설립, 선전문 배포,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김기한·노태희에게 사령서(辭令書), 통지서, 「대한독립단 내지 분치기관 임시통칙」, 「격고(檄告) 국내 진신사림(縉紳士林)」·「경고 국내 동포 중 위왜인관리자(爲倭人管理者)」·「경고 국내 경향(京鄕) 각 부호」·「객고(客告) 국내 황실 종친과 귀족, 문무공경대부(文武公卿大夫), 사림」 등 격문을 지급하여 한반도로 파견하였다.

황해도 도시찰 소모 전권위원에 임명된 김기한은 1920년 초 한반도로 이동하여 대한독립단 황해도지단을 설립하였다. 황해도지단 설치를 마치고 류허현 삼원포로 귀환한 김기한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후 평안남도지단 설립을 지시하였다. 김기한은 평안남도로 이동하여 지단을 설립하였다. 김기한으로부터 평안남도지단 설치에 관한 보고를 받은 후 서울로 이동하여 강지형과 함께 경기도지단을 설립하라고 지시하였다.

1919년 12월경 류허현에서 평안북도 독판부(督辦府) 대표 조병준(趙秉準)·김승만(金承萬), 청년단연합회 대표 안병찬(安炳贊)·김찬성(金贊聖), 독립단 대표 김승학(金承學)과 만나 독립운동 단체 통합 방안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들은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조직하였다. 12월 28일 대한독립단 총단장 조맹선을 통해 독립군 부대 8영 동병령(動兵令)을 발하였다. (음)12월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대한독립단 재무부장 전덕원(全德元)을 한반도에 파견하였다.

1920년 1월 10일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대한독립단 단원 김정백(金正白)·김진화(金振華)·백운한(白雲翰)을 평양에 파견하였다. 콴뎬현 소아하(小雅河) 후구(後溝)에 거주하다가 가족과 함께 서간도 싱징현(興京縣) 평정산(平頂山)으로 옮겼다.

1920년 3월 11일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 회장 최정규(崔晶圭)가 제우교(濟愚敎) 교도, 중국 순경을 대동하고 지안현 패왕조에 도착하였다. 당시 한족회와 대한독립단 구성원 500여 명과 함께 조직 개편 등에 관한 집회를 열고 있었다. 대한독립단 청년들과 제우교 교도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고 중국 순경들이 대한독립단 단원 약 100명을 체포하였다. 중국 순경의 체포를 피하여 조맹선 등과 함께 서간도 퉁화(通化)로 이동하였다. 3월 조맹선과 대한독립단 단원 40명을 노령에 파견하여 무기를 조달하고 청년 단원을 모집하도록 지시하였다.

1920년 6월 13일 안둥일본영사관 퉁화분관에서는 대한독립단 지도부를 체포하기 위해 서간도 환런현(桓仁縣)과 지안현 일대에 무장경관대를 파견하였으나 체포에 실패하였다. 9월 2일 환런현과 지안현 경계인 신개령(新開嶺)에서 박창렬(朴昌烈)·조맹선·김효선(金孝善)·이웅해(李雄海) 등과 만나 일제 토벌대 대응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10월 보약단을 개편하여 친목계(親睦契)를 조직하고, 본부를 콴뎬현 소아하에 두고 싱징현 평정산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대한독립단을 비롯한 독립군 부대들의 활동은 일제의 한반도 식민통치는 물론이고 나아가 그들의 대륙침략 정책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는 간도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단체를 탄압하기 위하여 1920년 8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을 토대로 일제는 10월에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며 대규모 병력을 간도에 파견하여 독립군 부대들과 전투를 벌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제는 간도 한인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켰다.

일제는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간도에 침입하였다. 1920년 10월 23일부터 관동군(關東軍) 소속 톄링(鐵嶺) 주둔 보병 제19연대와 궁주링(公主嶺) 주둔 기병 제20연대는 “무력행군”이라는 구실로 서간도에서 ‘토벌’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독립운동단체들과 항일근거지로 지목되는 마을과 학교 등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독립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서간도에서 일본군에 의해 한인 1,323명이 사살되고 125명이 체포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가 간도를 침공하자 1920년 11월 초 대한독립단 단원 200여 명과 함께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가산면(加山面) 방산리(方山里) 대안(對岸) 북방 약 5~6리 소재 한인 가옥으로 이동하여 은신하였다.

경신참변 이후 1920년 12월 중순경부터 대한독립단 단원을 남만주 안투(安圖)·푸쑹(撫松)·창바이(長白)·린쟝(臨江)·지안 각지에 파견하여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12월 하순 김두만(金斗萬) 외 50명을 콴뎬현 하루하(下漏河)에 파견하여 친일행위자를 처단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1921년 5월경 조맹선 등 대한독립단 단원들과 함께 콴뎬현 우모장(牛毛場)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9월경 백운균(白運均), 박창렬, 이웅해 등과 함께 회의를 열고 태평양회의 대책에 관해 협의하였다. 회의에서는 ①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활동할 것, ②항일무장단체를 통합하여 태평양회의 제1일을 기해 한반도로 진입하여 활동할 것, ③남만주 소재 일제 관청과 친일단체를 공격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1922년 이청천(李靑天)·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대민(李大民)·윤기섭(尹琦燮) 등과 함께 대종교(大倧敎) 서일도본사(西一道本司)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4~5월 류허현 하횡행(下橫行)에서 대한독립단 단원 약 50명과 함께 활동하였다. 남만주 각지에 대한독립단 단원들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친일행위자를 처단하였다.

1922년 8월 남만주에서 대한독립단,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한광복군영(大韓光復軍營) 등 단체들이 더욱 효율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었다. 대한통의부에서는 성립 초기부터 구성원들 사이에 공화주의(共和主義)와 복벽주의(復辟主義) 이념 갈등이 나타났다. 이념 갈등에 군사 지휘권 문제까지 더해져 양 세력 간의 반목이 크게 확대되었다. 1923년 2월 복벽주의계 인사들은 대한통의부에서 나와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조직하였다. 이때 대한의군부 총재에 선임되었다.

1923년 5월 18일 남만주 푸슌(撫順) 요령자(腰嶺子)에서 일제가 파견한 밀정에게 암살당하였다. 사망 후 톄링현(현 랴오닝성 톄링시) 백기색촌(白基塞村) 앙방하(昻邦河) 남산연미형(南山燕尾形)에 안장되었다가, 1993년 3월 28일 가평군 북면 이곡리로 반장(返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남북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활동중인 조선인에 관한 일제 측 보고(1921. 5. 13) [판형1]
대한독립단원 체포 기사(『매일신보』 1919. 12. 26) [판형1]

 

⋮최병도⋮

|참고문헌|

「철원군 산내면에서 적도와 충돌하여 12명을 죽인 건」, 1908.4.6, 『隆熙 2年 1月暴徒에 관한 編冊 2』 ; 「鮮人騷擾事件」, 1919.12.2,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滿洲의 部 1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上海假政府 國務員 等 會議의 건, 1920.1.22,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上海假政府 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國外情報-韓族會 및 獨立團員의 潰走 및 歸順」, 1920.4.13,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滿洲의 部 1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不逞鮮人 取締狀況 報告의 건」, 1920.6.4,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滿洲의 部 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鴨綠江沿岸地方 不逞鮮人 狀況에 관한 건」, 1920.6.25,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滿洲의 部 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不逞鮮人 行動에 관한 건」, 1920.9,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滿洲의 部 2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不逞鮮人狀況에 관해 報告의 건」, 1920.10.6,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滿洲의 部 2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情報 第637號 鴨綠江 上流 地方에 있어서 親日 및 不逞鮮人 狀況」, 1920.10.28,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滿洲의 部 2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不逞團 및 馬賊 狀況에 관한 건」, 1921.2.1,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滿洲의 部 2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大韓獨立團幹部及同團江西支團檢擧」, 1921.2.12,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內地 1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大韓獨立靑年團及義勇隊員檢擧ノ件」, 1921.2.22,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內地 1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鮮人騷擾事件, 南北滿洲 및 西伯利 방면에서의 不逞鮮人 일반의 상황」, 1921.5.13,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西比利亞 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柳河縣下 不逞鮮人 狀況報告의 건」, 1922.6.21,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滿洲의 部 3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金起漢 신문조서 제2회」, 1920.11.14(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36, 2000) ; 「不逞鮮人ニ關スル基礎的硏究」, 1924.6.1(朴慶植 編, 『朝鮮問題資料叢書』 6, 川岐 : アジア問題硏究所, 1982) ; 『자해자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3·10, 1971·1976 ; 『독립신문』 1923.5.2 ; 『매일신보』 1923.5.31 ; 『조선일보』 1923.9.9 ; 국사편찬위원회 편,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5, 1970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 2, 1987 ; 국사편찬위원회 편, 『재외동포사총서』 13, 201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1·5권, 1970·1973 ; 정제우, 『운강 이강년 의병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 강대덕, 「華南 朴長浩의 學統과 抗日獨立運動」, 『毅菴學硏究』 第6號, 毅菴學會, 2008.12 ; 김춘선, 「경신참변 연구 -한인사회와 관련지어」, 『한국사연구』 제111집, 한국사연구회, 2000.
  • 남북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활동중인 조선인에 관한 일제 측 보고(1921. 5. 13)
  • 대한독립단원 체포 기사(『매일신보』 1919. 1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