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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신돌석 申乭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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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신돌석
한자명 申乭石
본 관 평산(平山)
이 명 본명 : 태호(泰鎬), 자 : 순경(舜卿), 아명 : 돌선(乭先)
출신지 경북 영덕(盈德)
생몰년월일 1878. 11. 3 ~ 1908. 12. 12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영릉의진
관련 사건 1906년 영양 관아·울진읍·삼척 장호리·영해 읍성·영덕읍성 공격, 1907년 일월산·백암산 일대 유격전, 신돌석 생포작전.
주요 활동 1906년 영릉의병 창의 후 경북 영덕·영해, 강원도 삼척·울진 일대에서 의병 활동. 일본군경 토벌 작전에 대항하여 일월산과 백암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임. 생포작전을 따돌리고, 의진이 축소되자 만주 망명을 계획하던 중 외가 6촌형제에게 살해당함.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78년 (음)11월 3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축산면(丑山面) 도곡동(陶谷洞) 복평마을에서 아버지 신석주(申錫柱)(족보에는 신석주(申淅柱))와 어머니 분성(盆城) 김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셋째이자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본래 이름은 태호(泰鎬), 자는 순경(舜卿)이다.

어릴 때 돌선(乭先)이라는 아명(兒名)으로 불리다가 돌석이라는 이름이 굳어졌다고 알려진다. 평민 신분이었지만 아버지의 노력으로 이웃의 반촌(班村)인 상원(上元)마을의 진성이씨 문중의 사랑채인 육이당(六怡堂)에서 이중립(李中立)에게 글을 배웠다. 한시 두 편이 전해지는 것도 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96년 초 만 18세 되던 해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을미의병의 여파로 고향에서도 영해의병부대가 일어나자 중군(中軍)으로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확인할 수 없다.

1902~1903년 무렵 영덕군 축산면(丑山面) 축산리(丑山里) 출신의 동갑내기인 청주 한씨 한재여(韓在汝)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결혼 후 집안에 있지 않고 여러 곳을 떠돌면서 엄청난 힘을 발휘한 일화를 남겼고, 경북 동북부 지역 태백산맥 일대에서 활빈당(活貧黨)으로 활약하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 울진군(蔚珍郡) 평해(平海)의 바닷가 명승지인 월송정(月松亭)에 올라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감회를 남긴 우국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처럼 나라를 걱정하던 중 1906년 4월 6일 복더미마을 앞 주점에서 200~300명 병사를 집결시키고 영릉의병(寧陵義兵)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웃 상원마을 앞의 개천가 숲에서 훈련을 시작하였고, 가까운 고래산 중턱에서 군사훈련을 펼치면서 점차 조직을 갖추어 참모장이나 선봉장·중군장·포대장·소모장 등을 두었다.

영릉의병부대는 의병장이 평민 출신임에도 주요 간부진에 양반이나 중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참봉이라 불린 한영육(韓永育)이나 군에서 주사를 지낸 백남수(白南壽)가 그들이다. 거병 직후 첫 번째 작전은 병력과 무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영해부(寧海府)(현 영덕군 영해면)의 속현(屬縣)이던 영양(英陽)과 진보(眞寶)(현 청송군 진보면)에서 인력과 무기·식량을 확보하였다.

소모관이 된 영양 출신 이창영(李昌英), 함께 사형판결을 받게 되는 영양 출신 조준용(趙俊容), 진보 출신 배선한(裵善翰)·윤학이(尹學伊), 진보 출신 보따리상인 신낙선(申洛先) 등이 봉기 직후에 영양과 진보에서 모집된 대표적 인물이다.

의병부대 규모는 시기에 따라 달랐다. 의병을 일으킨 1906년부터 1907년, 곧 전반기에는 수십 명에서 300~400여 명에 이르렀다. 먼저 무기를 확보하기 위하여 관아의 무기고를 공격하거나 민중이 소유한 무기를 수집하였다. 1906년 4월 30일 영양군 관아를 공격해 들어간 것이 첫 사례였다. 또 읍민들로부터 조총 35자루를 확보하였다.

1906년 7월 초에는 영덕관아를 공격하여 무기를 비롯한 물자를 확보하였다. 또 전투를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해서는 화약과 탄알을 만드는 납이 필요하였다. 우선 무기고를 털어 이를 공급하였지만, 해안지방으로 나가 그물추를 가져다가 납 탄알을 만들고, 포수들에게서 화약을 공급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활동하는 동안에는 일반인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경북 진보에서 소를 구입하여 병사들을 먹이거나 식육점에서 소 한 마리를 구입하여 군사를 배불리 먹였다던가, 또 당목 6필을 사서 옷을 지어 포군에게 입혔을 때 부호 집에서 모금한 돈을 사용하고, 신분이 낮은 인물에게서는 정당하게 구입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영덕군 영해면 원구마을이나 영양군 주실마을 등에서는 양반들이 재원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의병부대는 영양과 청송에서 자원을 확보한 뒤에 울진과 삼척(三陟)을 공격하는 것이 기본 작전이었다. 영릉의병부대가 갖추어지자마자 첫 공격 대상으로 울진을 정한 뒤, 이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처럼 울진이 공략 대상이 된 이유는 그곳에 일본의 전초 기지가 마련된 데다 1890년대부터 일본 어부와 수산업자들이 잠수기 어선을 동원하여 전복과 해삼 등 자원을 쓸어가는 행위로 인해 손해를 보게 된 일반 양민의 원성이 높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1906년 4월 25일 의병부대의 첫 북상을 추진하였지만,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에 의해 밀려났다. 그 해 5월 초 2차 북상길에 나서 같은 달 8일 울진에 이르렀다. 일본인을 사살하고, 일본인 집을 집중적으로 부수었으며, 1,500~1,600냥을 빼앗았다. 삼척의병부대와 연합하여 공동전선을 이루며 전투를 펼쳤다. 이어서 삼척 바로 아래에 있는 일본인 전초 기지인 장호관(藏湖館)을 공격하였다.

1906년 6월 상순에 전개된 3차 진공에서 울진관아 공격에 이어 장호관전투를 치렀다. 『황성신문』은 보도를 통해 당시 울진을 공격한 의병 규모가 300명이 넘고, 관아가 의병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무기고를 열어 상당수의 무기를 장악했다는 점을 알렸다. 4차 울진 공략은 1907년 1월 초에 펼쳐졌다. 울진읍내를 공격하고 장호동(藏湖洞)(현 삼척시 근덕면 장호리)에 대한 2차 공략을 감행하여 군수 윤우영을 포박하고, 의병 300~400명이 울진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우편물을 탈취하고 소각하였다.

다른 기록에는 우편국취급소를 공격하여 소장 이하 4명이 부상을 입고 해안으로 피신하여 상선을 이용하여 부산(釜山)으로 후송하였고, 의병들은 귀중품을 갖고서 산으로 올라간 뒤 만세삼창을 하고 흩어졌다고 한다.

1907년 여름인 8월 제5차 울진 진공에 나섰다. 잠시 주실마을에 머물던 영릉의병부대는 울진을 향해 북상길에 올랐다. 삼척 장호관에 대한 세 번째 공략이었다. 9월 7일 부대를 이끌고 강원 삼척군(三陟郡) 원덕면(遠德面) 장호동에 도착하여 전복을 잡고 있던 일본인을 습격하여 사살하고 물자를 빼앗았다.

영릉 의병부대는 태백산맥 속 곳곳에 요새를 두었다. 병사들을 쉬게 하기도 하고, 훈련장으로 사용하기도 하려면,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미리 탐지하면서 피하기도 좋은 요새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의병을 일으킨 초기인 1906년에도 영덕에서 가까운 산 속인 영해부 묘곡면(畝谷面) 대동(大洞)(현 영덕군 영해면 대리) 골짜기를 요새로 이용하였다. 1906년 후반기에는 영덕군 창수면(蒼水面) 삼계리(三溪里)의 수동(水洞)(물골) 희암곡(喜庵谷)이 주로 요새로 이용되었다.

희암곡은 그 입구가 암벽으로 막힌 좁고 꼬불꼬불한 골짜기로 그 속이 물병 속 같아 입구만 틀어막으면 적의 침공을 웬만큼 막아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병이 비교적 장기간 주둔할 수 있고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다른 곳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곳을 요새로 삼는 전략을 세웠다.

1907년 겨울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결성될 때 교남창의대장(嶠南創意大將)으로 선정되었으나 이때는 참가하지 않았다. 1907년 11월 이강년(李康埏)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순흥(順興)을 공략한 기록이 있으나, 이는 별동대의 활동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07년 겨울 이후 새로운 요새와 전초 기지를 마련하였다.

울진군 백암온천이 있는 온정곡(溫井谷)과 그 이웃 선미동(仙味洞)(현 온정면 외선미리)이 전초 기지였고, 그곳에서 백두대간의 척추 속 검마산 바로 아래 독곡(獨谷)(독실)이 요새였다. 영릉의병부대가 마지막을 장식할 때까지 이용하던 최후의 요새는 바로 이 독곡이었다. 독곡은 백암산(白巖山)(울진군 온정면)과 검마산(劍磨山)(영양군 수비면) 최정상 봉우리가 맞붙어 서 있는 사이로 마치 절벽처럼 내리 꽂힌 깊은 골짜기이므로 ‘항아리’ 같이 생긴 골짜기의 생김새에서 독곡 혹은 독실이라 하였다. 의병은 토벌대에게 쫓기거나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는 사실 밥 한 끼 제대로 먹기 힘들고, 잠 한 번 마음껏 잘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 점에서 이 요새지는 의병에게 상당히 요긴하게 이용되었다.

1907년 말 이후부터 신돌석 의병부대의 투쟁 양상은 많이 바뀌었다. 우선 일본군이 적극 공세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일본군의 이른바 ‘토벌작전’을 맞받아치는 반격작전을 펼쳤다. 본격적으로 일본군과 마주치게 되는 시기는 제5차 울진 공격 직후 평해를 거쳐 백암온천 근처 선미동을 지나 태백산맥을 파고들던 1907년 9월이었다. 평해에 도착한 이틀 뒤인 1907년 9월 15일 영릉의병부대는 영양 동북방 20리 지점에서 일본군 토벌대 제1종대(縱隊)와 부딪쳐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일본군을 따돌리고 북상하였다.

1907년 11월부터 1월까지 혹한기에 접어들자 일본군은 제2차 토벌작전을 펼쳤다. 11월이 되자 일본군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은 대구(大邱)지역에 주둔한 보병 제14연대 제1대대장 아카시(赤司) 소좌에게 3개 중대에 기관총 2정까지 지원해 주면서 재차 의병을 토벌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1907년 12월 8일에는 삼척 주둔 제49분대 제1중대로부터 니시무라(西村) 중위가 41명을 인솔하고 울진 수비를 위해 출발해왔고, 울진분서 순사부장 스즈키 쓰루지로(鈴木鶴次郞)는 이와 동시에 순사 4명과 함께 삼척에서 우편선을 타고 울진에 도착하는 등 일제군대와 경찰까지 동원되었다.

이와 같은 일제군대와 경찰 연합 토벌대의 공격에 맞서 혹한기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 앞서 부대를 소규모의 여러 부대로 나누어 산발적인 기습전을 펼쳐나가기로 전략을 짰다. 그러나 1908년 1월 10일 무렵 백암산과 검마산 사이의 독곡 요새가 일본군에게 알려지면서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고 말았다. 일단 위기를 넘긴 후 영양군과 울진군 사이를 넘나들며 20명에서 50명 정도 소규모로 구성된 여러 부대를 이끌면서 집중적인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리고 사라졌다.

1908년 2월 일본군이 제2차 공격에 나서자 치고 빠지는 반토벌작전으로 대항했다. 제1구사령관 야마다(山田) 소좌가 봉화군(奉化郡)을 거쳐 예안(禮安)(현 안동시 예안면)으로 출동하였고, 일본군의 ‘의병토벌대’는 모두 6개 중대로 편성된 채 일월산(日月山) 지역을 동서와 남북으로 나누어 그물을 치듯 공격해 왔다. 그러나 이때도 이를 따돌리고 포위망을 빠져 나갔다.

이를 추적하던 니나가와 소위는 의병들을 놓쳐버린 이유에 대해 “준험한 비탈에 절벽일 뿐 아니라 한 척 이상의 적설(積雪)로 움직임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추격의 효과가 극히 적었다”라고 보고하였다. 눈 위에 발자국이 남는 한겨울 산악전투에서 발자취조차 찾지 못할 만큼 그와 의병들은 날래게 빠져나가며 일본군의 추격망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일본군이 2월 이후에 벌인 세 번째 ‘토벌작전’은 ‘신돌석 생포 작전’이라고 불리었는데, 이 작전마저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1908년 3월 일본군은 아내 한재여를 찾아내 안동으로 연행한 후 후하게 대접한 뒤 회유하는 글을 주어 남편에게 전달하게 만드는 등 회유작전을 펼쳤다. 그러자 가족이 더 이상 이용당하지 않도록 칠보산(七寶山)(현 영덕 병곡면) 서쪽 기슭에 숨겨 두었다.

1908년 4월 들어서 주로 평해·진보·영해 등 자신의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다시 전투에 나서기 위한 준비작업에 몰두하였다. 4월에 280명이나 되는 의병을 이끌고 주요 거점의 하나인 희암곡(喜庵谷)으로 들어갔고, 주변에서 의병을 모으면서 군자금도 확보하였다. 그리고 이 병력을 바탕으로 그 해 5월 30일에 제6차 울진 공략을 추진하여 상죽전(上竹田)으로 북상해 갔다.

이에 1908년 5월 30일부터 울진에서 일제경찰과 정면으로 부딪치자 불영계곡을 거쳐 일월산 동쪽 산자락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치고 빠지는 작전을 순식간에 벌였다. 그러나 반토벌전을 벌이면서 의병부대의 규모는 점차 작아졌다. 그 결과, 전반기에는 200~400명 정도의 대규모 부대로 움직였지만, 후반기에 들어 산악전투를 치르면서 부대의 규모가 줄어들었고, 작은 규모의 부대로 쪼개지면서 작전 반경도 좁아졌다.

일본군과 경찰의 집요한 추적과 ‘토벌작전’을 따돌려야 하는 부담 때문에 활동지역은 일원산을 비롯한 태백산맥 오지로 바뀌었다. 이때 무기는 주로 화승총이 쓰였다. 그러면서도 소수의 양총(洋銃)도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일본군과의 전투 속에서 확보한 것이었다.

1907년 말 당시에 소유한 무기가 ‘91자루의 화승총’, 혹은 ‘양총 5~6정과 화승총 250~260정’이라고 한 기록에서 무기가 비교적 넉넉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납을 이용하여 탄환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자 전반기처럼 후반기에도 납으로 만들어진 그물추를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해안지역을 왕래하였다.

1908년 5월 30일부터 사흘 동안 울진공략을 벌인 후 같은 해 7월에 들어서는 북으로 울진군 남면(南面)(현 후포면)에서 남쪽으로 영양군 석보면(石保面)과 진보 사이까지 넓은 활동 범위를 보인다. 그러다가 그 해 8월 중순에 들면서 의병부대가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이 5월부터 민간인처럼 꾸며 투입한 ‘변장부대’가 의병 부대에 타격을 입히기 시작하였고, 일본군 수비대가 계속 늘어난 결과였다. 특히 『귀순법』이 발표되면서 대열을 이탈하는 의병들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활동도 자연 위축되었고, 대규모 전투도 잦아들었다.

1907년 말부터 투항자가 생겨난 이래로 1908년에 들면서 투항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1908년 9월에서 10월 사이에 투항한 부하들은 약 한 달 열흘 남짓한 기간에 무려 53명이나 투항되었다. 10월 25일에는 의병부대의 핵심인물인 이오촌(李梧村)과 교련장(敎鍊將)으로 알려진 이화진(李華鎭)이 투항하였다. 이에 갈 길을 고민하던 중 만주로 가기로 작정하였다.

1908년 12월 들어 만주행을 결심하고 마지막 준비 작업에 몰두하였다. 12월 11일 밤 9시 영덕군 북면(北面) 눌곡리(訥谷里)(현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에 도착하였다. 외가 집안 6촌인 김상렬(金相烈) 형제의 집에 네 시간 동안 머물렀다. 이후 집을 나오던 길에 김상렬형제에 의해 살해되었다. 일본군은 살해범을 김도룡(金道龍)·(金道用) 형제라고 기록하였는데, 김상렬형제로 판단된다. 사망 시각은 1908년 12월 12일 새벽 1시 무렵이다.

사망을 둘러싸고 일제 경찰과 민중의 시각은 큰 차이를 보였다. 일제 경찰은 사건 발생 원인을 의병에 대한 의견 충돌에서 빚어진 것으로 묘사하였다. 이에 반해 민중은 현상금에 눈이 먼 인척들의 잘못된 욕심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사망을 너무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최후 모습을 장렬하게 묘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 박은식(朴殷植)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은 일월산과 백암산을 근거지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고 평가한 대목은 그 활약상을 잘 요약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신돌석 생가(경상북도 영덕) [판형3]
신돌석 의진이 활약했던 고래산(경상북도 영덕) [판형3]
신돌석과 이강년 의진이 연합하여 순흥 등지를 공격했다는 일제 측 보고(1907. 11. 16) [판형3]
신돌석 사망에 관한 일제 측 보고(1908. 12. 14) [판형3]

 

⋮김희곤⋮

|참고문헌|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안동독립운동기념관, 『국역 고등경찰요사』,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자료총서 3, 2010) ; 『황성신문』, 1906. 6. 21·3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0·197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1권, 1970 ; 조동걸, 『의병들의 항쟁』 1, 1982 ;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1975 ; 김희곤, 『신돌석 : 백년만의 귀향』, 푸른역사, 2000 ; 강윤정, 『시대를 뛰어넘은 평민 의병장 신돌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6.
  • 신돌석 초상
  • 신돌석 생가_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 신돌석 의진이 활약했던 고래산_영덕군 영해면
  • 신돌석의 우국시
  • 신돌석의 부하 체포 기사(대한매일신보_1907-08-07_2면4단)와 판결문_1907-09-04_경북재판소_2
  • 신돌석과 이강년 의진이 연합하여 순흥 등지를 공격했다는 일제 보고 문서_1907-11-16_1
  • 신돌석과 이강년 의진이 연합하여 순흥 등지를 공격했다는 일제 보고 문서_1907-11-16_2
  • 부하 배선한의 판결문_1908-09-28_대구지방법원_1
  • 부하 배선한의 판결문_1908-09-28_대구지방법원_2
  • 신돌석의 피살 상황을 보고한 일제 문서_1908-12-19_1
  • 신돌석의 피살 상황을 보고한 일제 문서_1908-12-19_2
  • 일제의 '폭도수령조서'_1909-03-11_1
  • 일제의 '폭도수령조서'_1909-03-11_2
  • 순국의사신돌석장군기념비_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신돌석장군 유적지)
  • 태백산 전투 기록화_1975_정창섭
  • 신돌석
  • 신돌석 생가(경상북도 영덕)
  • 신돌석 의진이 활약했던 고래산(경상북도 영덕)
  • 신돌석과 이강년 의진이 연합하여 순흥 등지를 공격했다는 일제 측 보고(1907. 11. 16)
  • 신돌석 사망에 관한 일제 측 보고(1908. 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