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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문태수 文泰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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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문태수
한자명 文泰洙
본 관 남평(南平)
이 명 본명 : 태진(泰珍), 자 : 태서(泰瑞)·봉진(鳳珍)
출신지 경남 함양(咸陽)
생몰년월일 1880. 3 ~ 1913. 2. 4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문태수 의병부대, 13도 창의대진소
관련 사건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
주요 활동 문태수 의병부대 의병장으로 활동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3)

1880년 3월 경상남도 함양군(咸陽郡) 서상면(西上面) 상남리(上南里)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본명은 태진(泰珍)이고, 자는 태수(泰洙) 또는 태서(泰瑞)·봉진(鳳珍)이며, 일반적으로 문태수로 불린다. 17세 무렵 전라북도 장수군(長水郡) 계북면(溪北面)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1907년 13도 창의군이 결성될 때 호남창의대장에 임명되었지만 실제로 참여하지는 못하였다.

1908년 2월 “원수 왜적은 우리 민족을 없애려고 배로 나르고 차로 날라 바다 속에 넣으려 하니, 우리 백성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오호라! 저들이 있고 우리가 없어지든지 우리가 살고 저들이 없어지든지 사생을 결단해야 하니, 이 형세를 장차 어찌 하리오? 전국의 신민이 모두 창의(倡義)하는 마음으로 뭉쳤으니, 4,000년 역사와 500년 종사, 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라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이종성(李鍾城) 등 60명의 의병들과 무주(茂朱) 일본군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5명을 사살하였다. 곧이어 반격을 받고 붙잡혔다가 탈출하였다.

그해 4월 10일 신명선(申明善)이 이끄는 150여 명의 의병들과 무주 일대의 일제 시설을 공격하였다. 같은 해 11월 21일 최점록(崔點錄) 등 6명과 전북 무주와 충북 옥천(沃川) 인근에서 활동하던 중, 12월 6일 무주군 상곡면((裳谷面), 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北倉里)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고 부대가 와해되었다.

1909년 10월 30일 옥천의 이원역(伊院驛)에서 화물열차에 군수물자를 싣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일본군 3명을 처단하고 역사(驛舍)와 화물열차를 소각시킨 후 근거지인 덕유산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일제 군경의 공격이 집중되자, 소부대로 분산하여 무주·장수(長水)·거창(居昌)·함양 등지를 무대로 산발적인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10년 1월 17일 선산(善山)·무주·개령(開寧) 등지에서 김교관(金敎官)·윤성심(尹聖沈)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1년 여름 80여 명의 의병들과 장수헌병대를 공격하여 10여 명의 일본 헌병을 처단하고 무기를 노획한 후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이동하던 중, 계남면(溪南面)의 갈평(葛坪) 및 계내면(溪內面)의 삼봉리(三峰里) 일대에서 일제 군경의 추격을 받아 전력을 크게 상실하였다. 이후 덕유산을 넘어 함양·안의((安義), 현 함양군) 일대로 피신하였다. 같은 해 8월 17일 고향으로 갔다가 안의헌병분견대에 붙잡혀 거쳐 서울로 이송되었고,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항기⋮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3·별집 1, 1971·1974 ;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 홍영기, 『한말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운동사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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