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영오 朴永五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박영오
한자명朴永五
본 관 
이 명 
출신지전북 익산(益山)
생몰년월일1874 ~ 미상
운동계열의병
관련 단체이규홍 의병부대, 박영오 의병부대
관련 사건이규홍 의병부대, 박영오 의병부대
주요 활동1907년 이규홍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부장으로 활동, 1910년 초 전북 익산군과 김제군 일대에서 부대를 이끌고 군자금 모금 등 의병활동 전개
포상훈격(연도)애국장(2015)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서일도면(西一道面) 관암리(冠岩里)에서 태어났다. 자료에 따르면 1910년 당시 37세로 1874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주막(酒幕)을 운영하였으며, 전북 김제군(金堤郡)과 익산군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들이 봉기할 때 전북 익산·함열(咸悅)·임피(臨陂)·김제를 기반으로 활동한 이규홍(李圭弘, 이원오(李元伍))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11월 이규홍 의병장과 더불어 동료 의병 200여 명과 함께 봉기하여, 부장(部將)이 되었다. 이규홍 의병장은 고산(高山, 현 완주)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29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하기 시작하자, 1908년 5월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이에 소수의 부대원을 이끌고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고향을 거점으로 삼아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1910년 3월 부대원인 이수암(李水岩) 등과 함께 전북 임피군(臨陂郡) 남이면(南二面) 신후리(新后里)의 강성재(康成哉)의 집을 찾아갔다. 이때 군자금과 군수품으로 금전 2원, 백미 약 10승을 모집하였다. 이어서 1910년 4월 3일 김시복 등 4명의 동료 의병과 함께 총기 4정과 단총 2정을 휴대하고, 전북 고산군 서면(西面) 내월곡리(內月谷里) 송병린(宋秉麟)의 집을 방문한 후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였다. 4월 7일 전북 김제군 공동면(公洞面) 난산리(卵山里)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사에키 분타로(佐伯文太郞)의 집을 습격한 후, 무라타식(村田式) 엽총 1정과 그 부속품을 노획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다가 1910년 4월 26일 익산헌병분견소에서 파견된 헌병보조원 2명에게 붙잡혔다. 이때 총기와 탄약 등을 압수당하였다. 1910년 5월 27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강도로 징역 1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신재훈⋮

|참고문헌|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1910. 5. 27 ; 「賊情彙報」, 1910. 5. 3, 『폭도에 관한 편책』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1974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8, 1989 ;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5 ; 홍영기, 『한말 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김상기, 「이규홍의 익산의병과 항일투쟁」, 『전북사학』 54,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