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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서재필 徐載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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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서재필
한자명 徐載弼
본 관 대구(大邱)
이 명 Philip Jaisohn
출신지 전남 보성(寶城)
생몰년월일 1864. 1. 7 ~ 1951. 1. 5
운동계열 계몽운동
관련 단체 독립협회, 한국통신부, 한국친우회, 구미위원부
관련 사건 갑신정변, 제1차 한인회의,워싱턴회의
주요 활동 1884년 갑신정변 참여, 1896년 4월 『독립신문』 창간, 7월 독립협회 결성,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 개최, 한국통신부 설립, 5월 한국친우회 결성, 6월 『Korea Review(한국평론)』 발행, 1921년 5월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 9월 워싱턴회의 한국대표단 부단장 등 역임
포상훈격(연도) 대한민국장(1977)

1864년 1월 7일 외가인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 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대구 서씨 가문의 서광효(徐光孝)와 이기대(李箕大)의 다섯째 딸 성주(星州) 이씨 사이의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가는 충남 은진군 구자곡면(현 논산시 연무읍 일대)이다. 호는 송재(松齋)이고 미국명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다.

6~7세경 자식이 없던 7촌 아저씨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들어간 후 충남 대덕군(현 대전광역시 대덕구)에서 살았다. 7~8세경 서울로 상경하여 외숙부 김성근(金聲根)의 사숙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고, 1882년 23명의 합격자 중 최연소로 병과(丙科) 3등에 급제하였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일찍부터 개화에 눈뜬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하여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 교류하며 개화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의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김옥균의 제의를 받고 문관의 길을 마다하고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1883년 5월 일본으로 유학갔다.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일본어를 배운 뒤 도쿄(東京)의 도야마(戶山)육군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신식 군사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이듬해 7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일본에서 함께 군사교육을 받은 사관 생도들과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84년 10월 새로 조련국이 설치될 때 사관장에 임명되었으나, 국내에 주둔한 청군(淸軍)의 간섭으로 무산되었다. 그 해 12월 4일 김옥균·서광범·박영효 등이 급진적인 내정개혁을 위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자 사관 생도들을 이끌고 경호책임자로 참여하였다.

탈중화(脫中華)하여 근대적인 자주 독립국가를 꿈꾼 갑신정변은 청군을 앞세운 수구 세력의 무력 공격으로 3일 천하로 끝났다. 거사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조선 정부로부터 역적으로 낙인 찍혔다. 이번 일로 부모와 처는 음독 자살하였으며, 두 살 된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바로 밑 동생 재창(載昌)은 체포되어 참형되었고, 막내 재우(載雨)는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일본 망명 후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1885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저녁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교회에 다니면서 갖게 된 기독교 신앙은 이후 사상과 인생 행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샌프란시스코의 미국인 교회에 다닐 때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리에서 탄광업을 경영하는 홀렌백(J.W. Hollenback)을 만났다. 그의 호의로 윌크스베리에 있는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에 입학해 고등학교를 마쳤다. 학교생활을 통해 민권에 기반에 둔 민주주의를 배우고 익혔다.

졸업 후 미국 육군 군의감도서관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로 된 의학 관련 책을 번역·정리하는 사서 일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888년 가을 콜롬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의학부에 입학해 1892년 3월 한국인 최초로 의학사 M.D.를 획득하였다. 사서로 일할 때인 1890년 6월 19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의사 면허를 받고 워싱턴DC의 시내에 개업했으나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운영이 쉽지 않았다.

1894년 7월 수립된 갑오정권(甲午政權)이 들어선 후 ‘역적’ 죄명을 벗게 해 주고 동시에 귀국을 요청하자, 1895년 12월 26일 근 1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공식 직함은 중추원 고문직이었으나 정치활동보다 민중을 위한 계몽운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였다. 정·관계의 개혁파 인사들과 외국사절, 개혁의지를 가진 인사들과 차례로 접촉하며 활동 기반을 다졌고 한국 최초로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민중들의 의식을 일깨워 한국의 정치·사회를 근대할 목적으로 1896년 4월 7일 최초의 한글 신문이자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이 신문을 통해 한문으로 무장된 유교 지식인층 보다 한문에 문외한 일반 민중층을 상대로 ‘조선 민중의 이익’과 ‘조선 민중을 위한 조선’의 신문으로 만들어 자주자강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민간 신문의 발간은 조선 사회에 처음으로 정부와 민중간의 원활한 정보 전달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었고 민중들에게 근대 민권의식을 고취시켰다. 아울러 『독립신문』을 계기로 이후 조선 사회에 『매일신문』·『제국신문』·『경성신문』·『대한황성신문』 등 각종 근대적인 신문 발간으로 확산시켜 당시 군주 중심의 폐쇄적인 유교사회에 언론의 역할과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정신을 배양하고 여론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토론문화와 대중강연을 도입하였다. 1896년 11월 배재학당 학생들을 상대로 세계 정세를 가르치고 학생 자치기관인 협성회를 조직해 민주적인 토론 문화를 가르쳤다.

1896년 7월 2일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사회단체인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회장 안경수, 위원장 이완용 등과 함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독립협회는 당초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건설하기 위한 사무를 관장할 목적에서 관료들의 사교 모임으로 시작했으나 매주 일요일 오후 3시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고 또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면서 활동 범위를 확장시켰다.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絶影島) 조차에 대한 반대를 위해 1898년 3월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주권 수호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여론을 결집시켜 정부에 총의를 전달하는 방식은 자유와 민권을 신장시키는 획기적인 활동이었다.

이밖에 민중들의 호응을 받아 서대문 밖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을 만들고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이 헐린 앞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조선의 자주독립정신을 내외에 선양하였다. 그러나 자유로운 민권신장을 위한 활동은 서재필 추방운동으로 이어졌다. 여론을 결집해 민감한 정치 현안까지 정부를 압박해 나가자 이권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과 러시아 등 외세와 정부 내 수구파의 반발이 커진 것이다.

이들은 민중계몽운동의 배후자로 서재필을 지목하고 조선 정부를 상대로 추방 공작으로 1898년 5월 14일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지난 3년 여의 계몽활동은 당시 봉건적 잔재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던 조선 사회에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운동이었고, 자주독립사상과 주권재민의 민주주의사상을 심어 준 활동이었다.

다시 미국에 건너간 후 1904년부터 1924년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인쇄 및 문방구점을 경영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활동하였다. 이런 가운데 1905년 7월 러일강화회의를 대비해 미주 한인을 대표한 이승만(李承晩)과 윤병구(尹炳九)가 필라델피아에 왔을 때 외교문제를 협의하였고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할 청원서를 보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여운홍(呂運弘)·안창호(安昌浩) 등과 교류하며 한국 독립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어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될 때 1918년 12월 미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50만 달러의 예산으로 영문잡지를 발간할 것을 제의하였다.

영문잡지를 통해 전 세계에 한국인의 독립 열망과 일제의 불법적인 한국 지배 실상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그만한 재정을 감당하기 어려운데다 다른 시급한 시국 현안 등을 이유로 무산되었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 해 4월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이승만·정한경(鄭翰景)과 함께 ‘제1차 대한인국민회총대표회’를 개최하였다.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 동안 150여 명이 참가한 이 회의에는 한국인 외에 톰킨스(F.W. Tomkins) 목사와 밀러(H.A. Miller) 교수 등 유력한 미국인들도 연사로 참여하였다. 모든 회의를 주재한 후 한국 독립의 열망과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방향을 담은 6개의 결의문과 호소문을 작성해 대외에 공표하였다.

이때 작성된 결의문과 호소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 ‘워싱턴의 미국 적십자 본부에 보내는 호소문’,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 ‘일본의 지각있는 국민들에게 보내는 결의문’,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였다.

‘제1차 대한인국민회총대표회’ 결과 본격적인 대외 선전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1919년 4월 22일경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를 설립하고 한국통신부장으로 대외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통신부를 설립한 것은 일본이 대외 선전 매체를 통해 한국의 식민지 실상을 왜곡 선전한 것을 알고 이를 대항해 한국인의 정당한 주장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외교고문으로 선임하였고 재정적으로도 후원해 주었다. 한국통신부의 활동은 첫째, 책자 발간을 통한 출판선전활동, 둘째, 대중집회를 통한 강연활동, 셋째, 미국인들이 조직하는 친한 단체, 즉 한국친우회의 결성과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등으로 전개되었다.

한국통신부의 선전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결성한 북미대한인유학생연맹이 파리강화회의 기간 동안 발간하던 영문 잡지를 인수하였다. 북미대한인유학생연맹은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매월 한 차례씩 영문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다. 이 영문 잡지를 인수해 1919년 6월부터 『KOREA REVIEW』라는 새 이름으로 발행하였다.

1919년 6월부터 1922년 7월까지 월간으로 발간한 이 영문잡지는 초기 1,000부에서 2,000부까지 증간해 미국의 주요 공공기관과 도서관, 각종 정치·사회·종교 단체 등지에 배포하였다. 활발한 선전활동 때문에 일제 정보 당국은 『한국평론』을 해외 한인들이 발간하던 선전 간행물 중 가장 유력한 반일 선전물로 간주하고 예의 주시하였다.

한국통신부는 『한국평론』 발행 외에 『한국의 어린 순교자들(Little Martyrs of Korea)』, 『한국의 진상(The Truth About Korea)』, 『한국의 부흥(The Renaissance of Korea)』 등 다양한 영문 책자를 발행하였다. 또 개인적으로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과 언론을 통한 기고 활동도 전개하였는데,3년여 동안 펼쳤던 그의 강연 횟수는 300회 이상이었고 미국인 청중의 수는 10만여 명이나 되었다.

한국통신부를 통한 선전활동과 강연 그리고 기고 활동을 통해 미국 사회에 전하고 싶었던 주요 내용은 첫째, 미국은 민주주의와 기독교 정신을 갖고 한국인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점, 둘째, 한국의 독립은 장차 미국의 안보와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점, 셋째, 한반도를 식민통치하고 있는 일본은 원래 신의가 없는 나라이고 지금 한국인을 상대로 자행하고 있는 동화정책은 민족말살을 위한 것이므로 이를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의 독립밖에 없다는 점, 넷째, 오랫동안 유구한 문화 민족으로 누려온 한국인은 지금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드시 극복할 능력을 갖춘 민족이라는 점 등을 강조하였다.

한국통신부의 설립과 별도로 톰킨스와 함께 1919년 5월 16일 필라델피아에 한국친우회를 결성하였다. 한국친우회는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통치로 압박받고 있는 한국인들을 돕기 위해 친한 미국인 중심으로 결성한 것으로 필라델피아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 21개가 결성되었다. 그 외 런던과 파리에도 결성되어 한국친우회는 구미 지역에 친한 여론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현순(玄楯)이 주미공사관 설립 문제로 1921년 5월 구미위원부 위원장에서 사임하자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에 위촉되었다. 1921년 7월 미국 대통령 하딩(Warren G. Harding)이 영국·프랑스·일본·중국 등 9개국 열강들과 동아시아와 태평양지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워싱턴회의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임시정부에 외교활동을 전개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해 7월 15일 뉴욕 한인들이 워싱턴회의 외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모임에서 임초(林超)를 수전위원으로 임명하고 미국 각지를 순행하며 모금활동에 나서서 3개월 동안 21,219달러를 모금하였다. 모금 성적은 당초 목표액인 10만 달러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미주 한인들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감안할 때 짧은 기간 동안 놀라운 성과였다. 또 모금활동을 통해 분열되고 있던 당시 미주 한인사회를 독립의 열기로 다시금 일치 단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임시정부는 워싱턴회의를 대비하여 1921년 9월 29일자로 단장 이승만, 서기 정한경, 법률고문 돌프(Fred A. Dolph)로 하는 한국대표단을 구성하였는데, 이때 부단장을 맡았다. 워싱턴회의에 대한 참가권이 없는 한국대표단은 10월 1일 미국대표에게 회의 참가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발송하였다.

10월 중순에는 한국대표단의 이름으로 미국 대통령 하딩에게 한국을 피침략국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한국의 독립이 세계 평화를 위한 토대가 될 것임을 주장하고 대회 참가를 공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적극적인 방해 공작과 식민지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철저한 무관심 등으로 한국대표단은 워싱턴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워싱턴회의는 한국 문제에 대한 아무런 논의나 관심도 없이 폐회하여 임시정부를 비롯한 국내외 많은 한인들에게 실망을 주었으나 대외선전활동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미국 언론을 상대로 한 활동 결과 60여 곳의 신문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신한민보』 1922년 2월 23일 전체 한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이번 회의에서 우리가 아무 이익을 얻지 못한 것은 당장에는 다소 실망하겠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때 이번 회의로 말미암아 상당한 기회를 세운 줄 생각하노라” 하고 이번 국제회의 활동이 결코 무위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즉, 워싱턴회의 외교활동으로 얻은 소득에 대해 첫째, 한국대표단의 민첩한 활동으로 미국 정부 대표 등 9개국 열강 대표들에게 한국문제를 이해시킨 점, 둘째, 비록 공식적으로 한국 의 독립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으나 비밀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논의됨으로써 한국의 독립운동이 전체 한인들의 열망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한 점, 셋째, 워싱턴회의를 통해 영일동맹의 폐기와 중국의 권리인정 등은 장차 한국 독립문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는 점 등은 큰 소득으로 보았다.

그밖에 당시 내부 분열로 침체되고 있던 미주 한인사회와 임시정부 그리고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들에게 독립운동의 열기를 불러일으킨 점은 적지 않은 성과였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성과를 기대했던 국내외 많은 한인들에게 이번 외교활동은 적지 않은 실망감을 주었고 대미 외교 위주의 독립운동 방략에 큰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워싱턴회의가 끝난 직후인 1922년 2월 본업인 사업에 전념할 것임을 밝힌 후 그 해 7월 『한국평론』 마지막 호를 간행한 후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다 다시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전면에 나선 때는 1925년 7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대표단으로 참가하면서다. 태평양회의는 미국에 있는 세계 YMCA 주관으로 설립된 ‘태평양문제연구회(Institute of Pacific Relation)’가 추진한 비정치적인 민간대회였다.

이 대회는 태평양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각국 대표가 개인 자격으로 각 국가의 현실 문제를 자유로운 토론과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문제의 본질을 구명하고 우의를 증진할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1925년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는 미국과 하와이·필리핀·일본·한국·중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에 파견된 140여 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대회 의장은 스탠포드 총장 윌버(Ray Lyman Wilbur)이고 사무총장은 데이비스(J. Merle Davis)였다.

회의는 호놀룰루의 교외의 푸나호우(Punahou)학교에서 개막되었다. 한국대표단은 국내와 미주 대표로 구성되었다. 먼저 국내에는 YMCA 총무·단장 신흥우(申興雨), 동아일보사 사장 송진우(宋鎭禹), 연희전문학교 교수 유억겸(兪億兼), 『조선일보』 기자 김양수(金良洙), 보성전문학교 교수 김종철(金鍾哲) 등이 참석하였다.

미주 한인을 대표해 참석하였고 한국대표단의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한국대표단은 조선에 대한 민족자결의 원칙, 경제문제, 교육문제, 조선·만주에 대한 인종적 감정 해소문제 등 4가지 문제로 회의에 임하였다. 일본대표단의 방해 책동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대회 참가 대표들에게 한국의 주권문제를 상기시켜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알렸다. 아울러 하와이에 체류하는 동안 하와이 한인들에게 한국 독립을 위해 상호 단결할 것을 호소하였다.

번창하던 문구 및 인쇄사업은 1924년경 완전히 파산하였다. 이렇게 되자 유일한의 도움을 받아 이희경(李熙景)·정한경과 함께 1925년 4월 유일한회사(New Ilhan Company) 필라델피아지사를 설립하였다. 유일한이 설립한 유일한회사는 디트로이트에 본부를 둔 회사로 한국 물품을 수입하고 미국의 약품과 화장품 등을 국내로 수출하는 무역회사였다. 필라델피아지사는 사장 서재필, 부사장 정한경, 전무 이희경으로 구성되었고 필라델피아 시내 부동산신탁빌딩(Real Estate Trust Building) 1092호에 사무소를 두었다.

필라델피아지사는 1927년까지 필라델피아의 상공록에 회사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1926년경 사업을 접었다. 무역업이라는 새로운 사업이 적성과 맞지 않았던 데다 사업을 총괄하던 유일한이 1926년 귀국하면서 사업을 계속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또 개인적으로 의사로서 새 출발할 결심한 때문이었다. 1926년 9월 62세의 나이에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특별학생으로 입학해 다시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의사 인턴 생활 때 여러 병원을 거치며 고된 연구 활동에 전념하다 1927년 11월 한인 최초로 병리학 전문의 자격증을 획득하였다.

사업과 독립운동 그리고 새로운 의사로서의 삶을 사는 분주하고 고달픈 생활속에서 국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미국 내 『신한민보』를 비롯한 여러 한인 신문과 잡지에 수많은 글을 기고하였다.

대표적인 기고문은 『동아일보』에 실린 「고국동포에게」, 「개인주의와 협동주의」, 「회고 갑신정변」, 『조선일보』의 「고국을 바라보고: 구하라, 과학적으로」, 잡지 『산업』 1930년 5월호의 「조선경제발전에 대한 관견」, 미주 한인 주간신문인 『신한민보』에 기고한 「Random Thought」와 「My Days in Korea」 등이 있다. 이러한 글을 통해 국내외 한인들에게 단합된 힘을 호소하였고 강인한 독립정신을 갖고 독립을 대비한 실력을 양성할 것을 당부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의 부름을 받아 군정청 수석고문이자 과도정부특별의정관의 자격으로 1947년 7월 1일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정치적인 활동보다 신생 한국의 민주주의 국가건설과 민족통일을 위한 계몽활동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먼저 한국 도착 직후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국민의 소리’라는 라디오방송을 통해 대국민 방송 연설을 시작하였다. 해방 당시 라디오는 가장 효과적인 정보 전달 매체여서 이러한 방송활동은 국민 계몽에 매우 유용하였다. 국민계몽을 위한 활동은 1948년 9월까지 라디오방송 외에 각종 강연과 저술 활동을 통해서 펼쳤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1948년 9월 11일 한국을 떠났다. 미국으로 떠나면서 국민들에게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라는 것이요,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평생의 소원”임을 밝혔다.

자택이 있는 미국 미디아시로 돌아와 다시 의사로 활동하다 한국에서 6·25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근교 노리스타운의 몽고메리병원에서 87세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컬럼비아대 의과대학 졸업장과 졸업기념 사진_1892_2 [판형3]

 

『한국평론(Korea Review)』(1919) [판형3]

 

하와이 호놀룰루 태평양회의 한국대표단(왼쪽 세 번째가 서재필, 1925. 7) [판형3]

 

서재필과 안창호(로스앤젤레스, 1925) [판형3]

 

 

 

 

⋮오영섭⋮

|참고문헌|

『독립신문』 ; 『신한민보』 ; 『Korea Review (한국평론)』 ; Philop Jaisohn, Hong, Sun-pyo, ed. My Days in Korea and Other Essays, Institute for Modern Korean Studies, Yonsei University, 2000 ; 이정식, 『서재필-미국망명시절』, 정음사, 1984 ; 신용하, 『독립협회연구』, 일조각, 1985 ; 송재문화재단 편, 『인간 송재 서재필』, 송재문화재단편집부, 1986 ; 임장영 저, 유기홍 역, 『위대한 선각자 서재필박사 전기』, 공병우글자판연구소, 1987 ; 이택휘·김운태·양재인·신복룡·이상철·이우진, 『서재필』, 민음사, 1993 ; 홍선표, 『서재필 생애와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 서재필기념회, 『서재필과 그 시대』, 서재필기념회, 2003 ; 이정식, 『구한말의 개혁·독립투사 서재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홍선표, 『서재필 개화 독립 민주의 삶』, 서재필기념재단, 2008 ; 최기영 편, 『서재필이 꿈꾼 나라』, 푸른역사, 2010 ; 김승태, 『독립협회를 창설한 개화·개혁의 선구자 서재필』, 역사공간, 2011 ; 이광린, 「서재필의 『독립신문』 간행에 대하여」, 『진단학보』 39, 진단학회, 1975 ; 이광린, 「서재필의 개화사상」, 『동방학지』 1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78 ; 홍선표, 「서재필의 독립운동 연구(1919-192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3.
  • 갑신정변의 주역들(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서재필)
  • 컬럼비아대 의과대학 졸업장과 졸업기념 사진_1892_1
  • 컬럼비아대 의과대학 졸업장과 졸업기념 사진_1892_2
  • 농상공부 임시 고문관직 겸임 지령_1896
  • 독립신문 제1권 제1호_1896-04-07
  •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건립한 독립문
  • 2차 미국 망명 시기의 서재필
  •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_1919-04-16
  • 구미위원회 위원장 임명장과 위원장 시기의 모습_1
  • 구미위원회 위원장 임명장과 위원장 시기의 모습_2
  • 제1회 범태평양회의에 참가한 서재필과 한국대표단_1925_호놀룰루
  • 안창호와 서재필_1925_로스엔젤리스
  • 흥사단원 김평윤에게 보낸 전보_1932-05-06
  • 존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과 그의 요청으로 귀국한 서재필_1947
  • 노년의 서재필_1947
  • 대통령 출마 요청서와 각계 인사들의 날인_1948_1
  • 대통령 출마 요청서와 각계 인사들의 날인_1948_2
  • 서재필 기념비_펜실베니아 메디아 로즈트리 공원 내
  • 콜롬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턴대학교) 의학부 졸업 사진(맨뒷줄 왼쪽 세 번째가 서재필)
  • 『한국평론(Korea Review)』(1919)
  • 하와이 호놀룰루 태평양회의 한국대표단(왼쪽 세 번째가 서재필, 1925. 7)
  • 서재필과 안창호(로스앤젤레스, 1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