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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승환 朴昇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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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박승환
한자명 朴昇煥
본 관 밀양(密陽)
이 명 성환(性煥), 자: 구여(九如), 호: 운파(雲坡)
출신지 서울
생몰년월일 1869. 9. 7 ~ 1907. 8. 1
운동계열 계몽운동
관련 단체 대한제국 육군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
관련 사건 대한제국 육군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
주요 활동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 대대장으로서,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에 임하여 부하들에게 항일 무장봉기를 시사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 이에 시위대 병사들이 해산거부하고 무장봉기하여 일본군과 서울에서 시가전 전개. 전국의 의병 항일무장투쟁을 최고조로 고양시키는 계기를 만듦.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69년 9월 7일 서울 반촌(泮村)에서 아버지 주표(洪周杓)와 어머니 남양(南陽) 홍씨 사이의 3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구여(九如), 호는 운파(雲坡)이다. 어려서 양주(楊州) 목사를 지낸 외숙 홍태윤(洪泰潤)에게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외숙의 영향을 받아 궁술·총사격 등 무술을 중시하여 연마하였다.

1887년 1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인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1895년 (음)8월 일제가 명성황후(민비) 시해의 만행을 일으키자, 통분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한 근대무력 양성을 절감하고 근대적 군사교육을 받아 나라를 지키는데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1896년 1월 11일 『무관학교관제』가 반포되고 사관생도를 모집하자, 그 해 9월 28일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신식군대 장교훈련을 받았다. 1897년 3월 21일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보병 참위(參尉, 소위)에 임관되었다.

당시 왕실은 1896년 2월 11일 일제의 침독(侵毒)을 피하여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에 들어가 정무를 보다가,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하자, 왕실 호위 강화를 위해 1897년 3월 시위대(侍衛隊)를 개편 강화하게 되었다. 이 때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교로 선발 배치되었다. 1899년 11월 11일 육군 부위(副尉, 중위)로 진급되어, 시위 제1연대 제2대대 소대장에 임명되었다.

1900년 7월 23일 육군 정위(正尉, 대위)로 승진하여 친위 제1연대 제1대대 중대장으로 전임되었다가, 같은 해 8월 14일 다시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중대장에 보임되었다.

1904년 2월 15일 육군 참령(參領, 소령)으로 진급하여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대대장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일제는 1905년 9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같은 해 11월 18일 소위 ‘을사조약’을 강요하였다.

조약체결권자인 광무황제(고종)가 끝까지 서명 날인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불법으로 이 늑약이 체결된 것처럼 강제하여 대한제국 외교권을 강탈하고, 1906년 2월 1일 일제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까지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시위대의 육군 참령으로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광무황제는 이 기회에 황제가 ‘을사조약’ 강요에도 서명날인하지 않아서 조약이 체결되지 않았으며 을사조약은 무효이므로 일제의 외교권 침탈은 불법임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偉鍾) 3특사를 헤이그에 파견하였다.

일제는 이 ‘헤이그밀사사건’을 악용하여 1907년 7월 19일 광무황제를 강제로 양위시켰다. 일제는 이완용 내각에 강요하여 7월 24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해서 대한제국 정부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소위 ‘차관통치’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완전 식민지로의 강점 공작을 강행하였다.

광무황제 양위식 날인 7월 20일 휘하 장병을 이끌고 궁중으로 들어가 일본군을 내쫓고 광무황제의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화(禍)가 광무황제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중단하고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가 속한 시위대 지휘관들은 경운궁으로 진주해서 광무황제를 호위함으로써 황제의 양위식 출석을 막아 양위식을 무산시키려 했으나,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가 주한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제보했기 때문에 이것도 실패하였다.

양위식은 광무황제와 융희황제의 참석없이 일제에 의해 강행되었다. 그러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앞장선 광무황제 양위반대의 격렬한 시위가 서울 시내에서 일어나서 종로의 순사파출소를 습격하고 일본 군경을 공격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완전 식민지로 강점하기 위해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켜 군사적으로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두려고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추진하였다.

당시 대한제국 군대의 배치 상황은 서울에 시위대(侍衛隊) 제1연대(3개 대대)와 제2연대(3개 대대)가 있었고, 지방에는 진위대(鎭衛隊)의 명칭으로 8개 대대를 수원·청주·원주·대구·광주·해주·안주·북청에 배치하고 있었으며, 각 진위대 아래 분대(分隊)를 주요 지방에 파견 주둔시키고 있었다. 1개 대대는 약 500~6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의 준비로 다음 기준의 비밀각서를 이완용 매국내각에게 통보하였다.

① 육군 1개 대대만 존치하여 황궁경호에 임하게 하고 기타는 해산한다.

② 군부를 비롯하여 육군에 관계되는 기관을 모두 폐지한다.

③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로서 한국군에 필요한 자를 제외하고 일본군에 복속시킨다.

④ 해산한 하사와 병졸 가운데 경찰관 자격이 있는 자는 경찰관으로 채용하고, 기타는 간도로 이주시켜 개간에 종사하게 하거나 둔전병으로 황무지 개간에 종사시킨다.

일제의 이 기준계획에 의하면 대한제국은 황궁호위 1개 대대만 남겨두고 서울 시위대의 2개 연대와 지방 진위대 8개 대대를 모두 해산하며, 남겨진 황궁호위 1개 대대도 장교는 일본군에 복속시켜 일본군이 지휘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을 완전히 무장 해제시켜 단숨에 강점하려는 날강도의 간책이었다.

일제는 이완용 매국 내각에게 7월 31일부터 대한제국 군대에 금족령을 내리게 하고, 일본군을 서울시내와 전국 각 지방에 증파시킴과 동시에 한국군 탄약고를 모두 접수하였다. 그 다음, 주한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총리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를 앞세우고 창덕궁 융희황제(순종)를 알현하여 작성해 간 『군대해산조칙』에 서명하도록 협박해서 재가를 받아내었다.

하세가와는 이튿날인 8월 1일 아침 7시 군부대신 이병무, 시위대 여단장 양성환(梁性煥), 참장 이하 각 연대장·대대장, 기병, 공병대장 등을 하세가와 관저에 긴급 소집해 놓고, 군부대신에게 융희황제의 『군대해산조칙』을 낭독케 하였다.

하세가와는 사색이 된 대한제국 육군 장교들에게 이번 해산대상에서 장교는 제외하여 그대로 존속시킬 뿐 아니라 은사금도 지급할 계획이니 동요하지 말고 병사만 해산시킬 것이니, 8월 1일 10시 훈련원에서 열 예정인 해산식에 ‘군대해산’은 비밀에 부치고 ‘맨손 체조훈련’이 있다는 명목으로 병사들을 총을 휴대하지 말고 집합시키라고 설명하였다.

8월 1일 아침 7시 하세가와의 긴급소집에는 응하지 않고 중대장 김재흡(金在洽)을 대리참석시켰다가, 김 중대장의 긴급보고로 군부대신의 『군대해산조칙』 낭독과 10시 군대해산식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라가 망해감에 비통함을 금치 못하여 대성통곡하였다. 그는 ‘군대해산’의 사실과 ‘국가존망의 위기’를 병사들에게 알려 그들의 애국심·충성심으로 일제에 대항하고 조국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대한제국 시위대 병사들은 ‘맨손체조훈련’이 있으니 10시에 훈련장에 집합하라는 명령을 받고 비가 내리는 속에서 운동복 바람으로 집합하였다. 그들은 빈손 상태에서 대한제국 『군대해산』의 기막힌 조칙 낭독을 듣고 경악하였다.

일본군과 한국군 수뇌들은 늘어서서 해산을 명하고 은사금이라고 하면서 하사관에 80원, 1년 이상 근무 병사에게 50원, 1년 미만 병사에게 25원씩을 주면서 각자 귀가하도록 명령하였다. 병사들은 분개하였으나 손은 맨손이고, 무기고는 이미 봉쇄되어 일본군들이 지키고 있었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 대대장으로서 국가존망의 위기에 부하장병들에게 최후의 결의를 보이기 위해,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번 죽어 아깝지 않다(軍人不能守國 臣不盡忠 萬死無惜)”라는 유서를 써놓고,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다음 차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이것은 살신성인의 자결로써 부하 장병들에게 목숨을 바치는 항일무장투쟁을 명령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부하 장병들이 총소리에 놀라 대대장실에 뛰어 들어가 보니 이미 순국해 있었다. 이에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병사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을 들고 봉기하였다.

제1연대 제1대대가 봉기했다는 통보를 받은 시위대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도 견습 참위 남상덕(南相悳)의 지휘 아래 봉기하였다. 봉기한 대한제국 육군 병사들은 병영을 미리 포위하고 있던 일본군과 8월 1일 오전 11시 40분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다음 시가지로 나와 남대문과 서소문 사이에서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하였다.

대한제국 서울에서 봉기한 시위대 군인들은 탄약이 떨어져 더 이상 시가전을 벌일 수 없게 되자 시민들의 비호를 받으며 성 밖으로 나가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서울 시위대 봉기 소식을 들은 지방 진위대 병사들도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8월 5일 원주(原州) 진위대가 해산을 거부하여 대대장 대리 김덕제(金德濟)와 특무정교 민긍호(閔肯鎬)의 지휘 아래 시민들과 함께 봉기해서 원주읍을 점령하고 우편국·경찰서·군청 등을 습격하여 무기고를 열어서 무장을 강화하여 의병부대로 전환하였다. 또한 여주(驪州) 분견대도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여 여기에 합류하였다. 그들은 도처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면서 치열한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뒤이어 8월 9일 수원(水原) 진위대 소속 강화(江華) 분견대 병사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그들은 부교(副校) 지홍윤(池弘允)과 연기우(延基羽) 등의 지휘 아래 주민들과 함께 약 600명이 무기고를 점령하여 무장하고 강화읍을 점령한 다음, 일진회(一進會) 회원인 친일파 군수를 처단했으며, 찾아온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하여 물리치고 경기도와 황해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청주(淸州) 진위대 소속 홍주(洪州) 분견대의 48명 전체 병사들도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대구(大邱) 진위대 소속 진주(晋州) 분견대와 안동(安東)분견대 병사들도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북청(北靑)진위대의 일부 병사들도 해산을 거부하고 개별적으로 의병에 합류하였다. 대한제국 군인들은 군대해산 즉시 봉기하지 않은 경우에도 귀가 후 다수 군인들이 지방 의병부대에 들어가 민간 의병들을 지휘하면서 의병으로 전화되었다.

군대해산 후 군인들의 봉기와 의병으로의 합류로 항일 의병전쟁이 1907년 8월 1일부터 1909년 10월까지 최고조의 고양기에 들어가서 일제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일제의 식민지 강점을 일정기간 지연시켰다. 이 성과의 최초의 신호탄은 1907년 8월 1일 아침 박승환 참령의 고귀하고 순결한 ‘유서’와 장렬한 자결 순국의 봉기명령 신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어 나라가 완전히 무방비상태에 놓이게 된 엄중한 사태에 직면하여 죽음을 각오한 무장봉기를 시사 명령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함으로써, 해산 군인들로 하여금 즉각 무장봉기해서 한말 항일 의병전쟁을 비약적으로 고양시킨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살신성인의 애국군인의 모범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종2품 가선대부 박승환을 가의대부에 봉한다는 고종의 칙명, 1907 [판형1]
대한제국 무관학교 장교와 생도들(1896. 7. 12) [판형1]
박승환 자결 보도(『황성신문』 1907. 8. 3) [판형1]

 

 

 

⋮신용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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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산군인들이 항일의병으로 전환되었다는 '고등경찰요사'_1934
  • 박승환의 자결순국 기록화_박기태_1976
  • 박승환의 자결순국을 기록한 기려수필_1
  • 박승환의 자결순국을 기록한 기려수필_2
  • 박승환의 자결순국을 기록한 기려수필_3
  • 장교복 차림의 박승환
  • 승 가선대부 칙명_1903
  •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장교와 생도들
  • 대한제국군 군가
  • 훈련 중인 대한제국군
  • 광화문 앞에 도열한 대한제국군
  • 노즈시즈타케의 대한제국 군부고문 채용 계약서_1904
  • 승 가의대부 칙명_1907
  • 군대해산 전 일제에 장악된 황실과 한국군_Illustrated London News_1907
  • 군대해산전말과 박승환의 자결을 대서특필한 신문기사_대한매일신보_1907-08-02_2면1단,공립신보_1907-08-02_2면2단,황성신문_1907년 -08-03_2면1단_1
  • 군대해산전말과 박승환의 자결을 대서특필한 신문기사_대한매일신보_1907-08-02_2면1단,공립신보_1907-08-02_2면2단,황성신문_1907년 -08-03_2면1단_2
  • 군대해산전말과 박승환의 자결을 대서특필한 신문기사_대한매일신보_1907-08-02_2면1단,공립신보_1907-08-02_2면2단,황성신문_1907년 -08-03_2면1단_3
  • 잇따른 자결순국_대한매일신보_1907-08-03_2면3단
  • 박승환의 자결을 보고한 일제 문서_1907-08-30
  • 박승환_profile
  • 대한제국 무관학교 장교와 생도들(1896. 7. 12)
  • 박승환 자결 보도(『황성신문』 1907. 8. 3)
  • 종2품 가선대부 박승환을 가의대부에 봉한다는 고종의 칙명, 1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