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건웅 朴健雄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박건웅
한자명 朴健雄
본 관 밀양(密陽)
이 명 이명 : 박건웅(朴建雄), 김건웅(金建雄), 김정우(金政友), 김세보(金世寶)
출신지 평북 의주(義州)
생몰년월일 1906. 7. 1 ~ 미상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임시정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24년 상해청년동맹 발기인, 1926년 김원봉 등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입학,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90)

1906년 7월 1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비현면(飛玄面) 비현리(飛玄里)에서 소작농 부모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이명으로 박건웅(朴建雄)·김건웅(金建雄)·김정우(金政友)·김세보(金世寶) 등이 있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청년동맹·의열단·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3년경 난징(南京)에서 김규식·김순애 부부의 소개로 정봉은(鄭奉恩)과 결혼하고, 슬하에 3녀[정란(正蘭), 의란(義蘭), 혜란(惠蘭)]와 1남[의성(義成)]을 두었다. 부인은 「팔로군행진곡(八路軍行進曲, 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을 작곡하는 등 ‘중국인민음악가’ 칭호를 받은 조선의용군 출신 정율성(鄭律成, 본명: 鄭富恩)의 누나이다. 1937년 아들을 임신한 부인과 큰딸을 친정인 광주로 보내면서 헤어졌다가, 광복 이후 귀국하면서 다시 가족들과 살게 되었다. 그런데 1950년 6·25전쟁이 나자 부인이 큰딸과 막내딸을 데리고 신정완(申貞琬, 신익희의 딸)의 어머니를 모시러 함께 의정부에 갔다가, 피난 대열에 묻혀 북으로 가게 되었다. 얼마 후 그도 북한 정권의 이른바 ‘모시기 공작’으로 북으로 끌려가서 부인과 두 딸을 재회하였지만, 둘째 딸과 아들은 남한에 남겨졌다. 둘째 딸은 부인의 외숙모인 김필례(金弼禮, 김순애의 여동생)가 부모 노릇을 해주어 정신여고와 서울대학교 사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보통학교를 마친 이후 부친을 도와 농사를 지었다. 14살 때인 1919년 만세운동 이후 군관학교에 들어가 군사교육을 받든가, 무장투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1924년 4월 상하이에서 조직된 상해청년동맹(上海靑年同盟) 발기인에 김정우(金政宇)라는 이름으로 참여하였다. 상해청년동맹의 주요 구성원은 안창호의 영향 하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노병회·흥사단·의열단 소속 청년들이었다.

1926년 김원봉 등 의열단원을 비롯한 24명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입교하였다. 1924년 4월 전후부터 1926년 입교 사이 의열단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재학 시기 교장 장제스(蔣介石)는 북벌전(北伐戰)을 지휘하느라 황포군교의 운영은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비롯한 중국공산당 소속 교관들이 주도하였기에, 한인 입교생들은 이들로부터 공산주의를 비롯한 진보적 사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졸업 후 1927년 하반기 결성된 한국유일독립당 무한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武漢促成會)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고, 김성숙(金星淑)·최용건(崔庸健)·오성륜(吳成崙)·김산(金山) 등과 같은 해 12월 11일 시작된 이른바 ‘광주기의(廣州起義)’에도 참가하였다. 이어서 1929년 가을 북경에서 김원봉(金元鳳)·안광천(安光泉) 등과 조선공산당재건동맹과 그 부속 기관인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 및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운영하였는데, 7인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발발한 만주사변을 계기로 독립운동진영의 단결과 통일 움직임이 적극화되었는데, 이 움직임을 주도해 간 각단체연합주비회의 5인 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서 한인독립운동세력의 통일과 단결을 위해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같은 시기인 1932년 10월부터 의열단에서는 흔히 남의사(藍衣社)로 불린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라는 중국 정부 비밀 첩보기구와 합작하여 난징 교외 탕산(湯山)에 있는 선사묘(善祠廟)라고 하는 사찰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운영하였다. 이때 김원봉이 교장으로서 총책임자였고, 왕현지·한일래 등과 함께 정치조 교관으로 1기생 훈련교육에 참여하여 ‘사회학’과 ‘조직방법’ 과목을 가르쳤다. 그런데 1기생을 졸업시킨 후 의열단을 탈퇴하였다.

이와 함께 1932년 11월 14일 한·중 연대기구로서 중한민중대동맹이 결성되었는데, 중앙집행위원과 재무·조직·선전부장 등을 맡았다. 그리고 1933년 말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군에 복귀하여, 중국군 장교 신분으로 한인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5년에 들어서면서 일제가 화북사변을 일으켜 중국 화북지역까지 침략함으로써 중국 전역에서는 항일 기운이 고조되었고, 국공합작을 통한 ‘적극 항일’의 당위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1936년 상하이에서 김성숙·김산 등과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을 결성하였다.

해방동맹은 ‘광주기의’에서 중국 혁명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한인들이 무의미하게 희생되었던 사실에 대한 반성적 성찰 등을 바탕으로 비록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중국을 위한 혁명보다는 조선을 위한 혁명, 곧 ‘민족혁명’을 지향해야 한다는 노선을 내걸었다. 광주기의 시절 내걸었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나 ‘중국 혁명을 통한 한국독립’이 아니라, ‘한국 독립’의 기치를 표방하였다.

한편 “나는 이때부터 박건웅과 아주 가까워져서 해방 뒤 국내에 돌아와서도 일을 같이 해 박헌영파와 싸웠어”라는 김성숙의 회고처럼 난징에서는 김성숙의 집에서 딸 의란과 함께 살았고, 후일 충칭에서는 김성숙과 함께 가족과 떨어져 대나무 집에서 생활하였다. 이러한 김성숙과의 교분으로 사고와 논리가 더욱 다듬어지고 정치해졌던 것 같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였고 같은 해 8월 이후 일본군의 공격으로 상하이가 함락될 상황에 처하자, 해방동맹도 상하이를 떠나 난징으로 옮겼다. 한인독립운동진영은 중일전쟁이 장차 소일전쟁(蘇日戰爭), 미일전쟁, 나아가 세계대전으로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견하였다. 아울러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인민전선 전술’이 채택되는 것을 계기로 반파시즘 국제통일전선이 형성되었으며, 중국에서도 1936년 시안사변(西安事變)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던 사실 등을 배경으로 한인들도 협동전선을 결성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강조되었다.

그 결과 민족주의 우파세력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 민족주의 좌파세력은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 11월 한커우(漢口)에서 결성된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조선민족혁명당·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3개 단체의 협동전선이었다.

그리고 두 단체는 1939년 8월 27일 스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서 ‘한국혁명운동통일7단체회의’를 소집하여 민족주의 좌·우파의 통일을 논의하였는데, 김성숙과 함께 해방동맹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각기 상대방의 양보와 굴복을 요구하며, 자파 중심의 통일을 고집하다가 회의는 결렬되었다. 이후 조선청년전위동맹과 합병하여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기도 하였으나, 전위동맹원들이 중국공산당 항일 근거지로 이동해 버림에 따라 1941년 11월 경 다시 해방동맹의 간판을 내걸었다.

1941년 1월 원난사변(晥南事變)을 신호탄으로 중국 정부의 반공노선이 강화되었고,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추축동맹체제(樞軸同盟體制)’와 미·영·소 3국의 ‘연합국체제’ 간의 대결이 전면화되었다. 또 이해 여름에 이르면 조선의용대 주력의 중국공산당 항일 근거지로의 이동이 완료되었다. 이 같은 급박한 상황 변화를 배경으로 1941년 11월 1일 「조선민족해방동맹 재건 선언」을 발표하였다.

해방동맹의 ‘재건’ 선언은 국제정세와 한인독립운동의 환경 변화에 대한 자구적 노력의 표현이었던 셈이고, 대응 방안의 결론은 임시정부 활동에 합류하여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방안이었다. 향후 중국 정부 관할구역에서의 활동을 위해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과 태도의 정리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이르렀고, 그 결과로써 임시정부 참여가 결정된 것이었다.

이어서 1941년 12월 7일 아시아-태평양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충칭의 독립운동 진영은 대일전에 적극 참여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국제적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전후 한반도 문제 처리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1942년 4월 20일 제28차 국무회의에서 임시정부는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통합을 결의하였다. 이와 함께 5월 15일 중국군사위원회는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합류를 명령하고, 김원봉을 광복군 부사령에 임명하였다. 이해 7월 조선의용대는 해체를 선언하고,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다.

앞의 임시의정원 사건 1942년 8월 4일 소집된 제35차 국무회의에서는 임시의정원 의원 선거규정을 개정하여,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파 민족주의세력의 임시정부 참여 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10월 24일 개원한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김원봉·김상덕·최석순 등 10명의 조선민족혁명당원과 유자명(조선혁명자연맹)·유림(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김재호(조선민족해방동맹)·손두환(한국독립당통일동지회) 등과 함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김규식(선전부장)·유동열(교통부장)·장건상(학무부장)·황학수(생계부장) 등이 선임되었다. 이로써 중국 관내지역 한인 세력의 통일전선운동은 결실을 맺었다.

임시정부 참여 후에는 군무부 비서·군사학편찬위원·선전부 선전위원·외교부 외교위원·생계부 생계위원과 임시의정원 의원 및 임시약헌개정위원·건국강령개정위원, 중한문화협회 감사 등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한 단결과 통합을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임시의정원 의원 활동의 한 사례로 1942년 10월 28일 이연호·심광식·이상만·최동오·엄항섭·안훈·조시원·이복원·유동열·김관오·유자명·방순희·신환·이정호 의원과 연명으로 중국군사위원회의 「한국광복군9개행동준승」의 취소를 요구하는 제의안을 제출하였다. 이들은 제의안에서 ‘9개준승’을 중국이 유럽제국주의의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시발이 되는 “난징조약 이상의 위험성을 가진 것”으로 규정하고, 이는 “우리 민족에게 만대의 치욕을 가하는 동시에 폭력으로써 폭력을 갚는 화근을 불러일으키는 우매한 행동에 다름 아니다”고 지적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군사·선전·외교 부문의 전문기구라 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실무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광복이 되고 1946년 3월경 귀국하여 8월 사회민주당에 참여하였고,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위하여 힘썼다. 그 해 12월에는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입법의원이 되었고, 산업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으며, 이후 북한에서 명예연구사 칭호를 받고, 『고려사』·『리조실록』·『팔만대장경』 등의 고전번역 사업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포군관학교 [판형1]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34차임시의정원 의원 일동(3열 우측 첫번째가 박건웅) [판형1]

 

박건웅 제의안(1942. 10. 28) [판형1]

 

⋮한상도⋮

|참고문헌|

대한민국국회도서관 편,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 1974 ; 대한민국국회도서관 편,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1974 ;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0, 2006 ; 이태호, 『압록강변의 겨울』, 다섯수레, 1991 ; 한상도, 『韓國獨立運動과 中國軍官學校』, 문학과지성사, 1994 ; 박의란·송지영, 『박건웅, 딸보다 조국을 더 사랑한 아버지』, 엠-에드, 2008 ; 한상도, 「박건웅의 미군정기 현실참여와 정치활동의 성격」, 『한국사연구』 107, 한국사연구회, 1999 ; 한상도, 「해방정국기 박건웅의 정치사상과 국가건설론」, 『한국근현대사연구』 13, 한국근현대사학회, 2000 ; 한상도, 「제2차 세계대전기 박건웅의 임시정부 활동과 시대인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1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2.
  • 황포군관학교
  •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34차임시의정원 의원 일동(3열 우측 첫번째가 박건웅)
  • 박건웅 제의안(1942. 10.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