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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영산 朴榮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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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박영산
한자명 朴榮山
본 관  
이 명 박병곤(朴炳坤), 박영산(朴永山)
출신지 경북 청송(靑松)
생몰년월일 1887. 1. 2 ~ 1931. 10. 11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부민단, 한족회, 정의부, 서로군정서, 재만농민동맹
관련 사건 부민단, 한족회, 정의부, 서로군정서, 재만농민동맹
주요 활동 1909년에 만주로 이주하여 부민단, 한족회, 정의부, 서로군정서와 재만농민동맹 등에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5)

1887년 1월 2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진보면(眞寶面) 월전동(月田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고, 1909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판쓰현(磐石縣)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명으로 박병곤(朴炳坤)·박영산(朴永山)을 사용하였다. 부인은 임씨이고, 슬하에 정규·순규를 두었다.

1912년 만주 퉁화현(通化縣) 합니하(哈尼河)에 본부를 두고, 허혁(許赫)·김동삼(金東三) 등을 중심으로 한인자치기구 부민단(扶民團)을 설립하였다. 부민단은 한국인들의 자치 생활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교육을 중시하였다. 당시 부민단에 가입하여 박주영(朴周榮) 등과 같이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浦)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19년 4월 서간도의 류허·퉁화·환런(桓仁)의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부민단을 확대 개편하여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다. 이탁(李鐸)·김동삼 등을 중심으로 설립되었고, 산하에 군정부를 편성하여 한인 자치와 독립군 양성, 군자금 지원 활동을 병행하였다. 당시 한족회에서 활동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에 따라 군정부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편되자, 서로군정서에서 김정제(金定濟)·이근진(李根眞) 등과 같이 선전위원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0년 10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서간도 지역에서는 ‘경신참변’으로 한인 사회가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한인 사회와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하고자 1922년 통의부(統義府)가 설립되었으나, 지도층의 이념과 노선이 맞지 않아 분열되었다. 그 후 1924년 11월 24일 서간도 지역의 8개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설립하였다. 한국인의 자치·교육·군사·민생 등을 망라하는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1923년 5월 지린성 화뎬현(樺甸縣)에서 단조기념회(檀祖紀念會) 발기회에서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단조기념회는 기념비를 세우고 백두산 산하에 중앙본부를 두며, 국내외에 지회를 설치하고 상호간의 연락을 취하고자 하였다. 1923년부터 이듬해 초까지 정현사(正縣社)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에는 한족노동당(韓族勞働党)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2월 판쓰현에서 한족노동당을 확대 개편하여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조직하였다. 만주의 대부분 한국인들은 농민 신분이기에, 강령과 노선을 바꾸어 농민들의 경제적·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고자 하였다. 1931년 10월 11일 판쓰현 동우(東隅)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영산 사망 보도(『동아일보』 1931. 10. 22) [판형1]

 

⋮김호걸⋮

|참고문헌|

「公 제46호 不逞鮮人 宣傳文 押收에 관한 건」, 1923. 5. 3,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滿洲의 部 36』 ; 「關機高秘收 제1508호 臨時報 제38호 吉林 附近 鮮人情報」, 1924. 1. 30,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滿洲의 部 38』 ; 「機密 제36호 韓族勞働黨의 組織에 關한 件」, 1925. 2. 25,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滿洲의 部 40』 ; 「機密送 제8호 朝鮮獨立運動費 募集에 관한 건」, 1919. 4. 21,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滿洲의 部 9』 ; 『동아일보』, 1931. 10. 22 ; 『조선일보』, 1931. 10. 2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4, 1978.
  • 박영산 사망 보도(『동아일보』 1931. 10.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