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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영 朴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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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박영
한자명 朴泳
본 관  
이 명 박진(朴鎭), 박근성(朴根星), 박영(朴英·朴永), 박성남, 박몽각(朴夢覺)
출신지 함북 경흥(慶興)
생몰년월일 1887. 4. 4 ~ 1927. 12. 17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대한군무도독부, 북로독군부, 고려혁명군, 프리아무르주 한인공산당연합회, 황포군관학교
관련 사건 대한군무도독부, 북로독군부, 고려혁명군, 프리아무르주 한인공산당연합회, 황포군관학교
주요 활동 1908년 의병운동 지원, 1919년 봉오동전투 참가 이후 독립군부대의 자유시 이동 지원, 1921~1922년 연해주해방전쟁 참가, 1922년 베르흐네우딘스크 고려공산당 통합대회 참가, 1926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1927년 광동콤뮨 참여
포상훈격(연도) 독립장(2006)

1887년 4월 4일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아오지에서 박시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박성남이었고, 이후 박영(朴英·朴永)·박응세·박근성(朴根星)·박진(朴鎭)·박몽각(朴夢覺) 등 여러 이명을 사용하였다. 동생으로 박근만(朴根萬)과 박근수가 있다. 아내는 류성희이다. 어릴 적 향리의 서당에서 수학하였다.

1906년 함북 경흥군 일대에서 활동하는 반일의병대를 지원하였다. 1908년 의병부대의 경흥 주둔 일본수비대 습격을 원조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아버지와 함께 2개월간 옥에 갇혔다. 1910년 가족을 데리고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 허룽현(和龍縣) 삼동포(三洞浦)로 이주하였다. 1911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신해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으로 돌아가 삼동포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계몽운동에 참가하였다. 1915년 봉오동(鳳吾洞)으로 이사하였고,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청소년들에게 반일교육을 진행하였다. 1917년 난징(南京)으로 가서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북간도 용정(龍井)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봉오동에서 여러 반일인사들과 함께 반일군중집회를 열었다. 며칠 뒤인 3월 26일 인근 백초구에서 1,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만세시위를 벌였다. 같은 해 6월 최진동(崔振東, 일명 崔明錄)을 도와 대한군무도독부(大韓軍務都督府, 이하 군무도독부)를 세우고 참모장이 되었다. 군무도독부는 봉오동의 대지주인 최진동 3형제가 1910년대 초부터 운영하고 있던 자위단인 도독부가 확대 개편된 것이었다. 대원수는 약 600명이고, 군총 약 400정, 권총 약 50정, 기관총 2문과 수류탄 약 120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군무도독부를 이끌고 두만강을 넘어 1920년 3월 함경북도 온성(穩城)·무산(茂山)에서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다. 군무도독부가 1920년 5월 홍범도(洪範圖) 부대 그리고 국민회(國民會)와 합쳐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로 통합되자 군무부장(軍務部長)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북로독군부는 이후 의군부(義軍府)·의민단(義民團)·신민단(新民團)과도 연합하여 같은 해 6월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봉오동전투 이후 일본군의 ‘간도토벌’에 대응하여 군무도독부를 이끌고 둥닝현(東寧縣)으로 이동하여 그 해 12월 밀산(密山)을 거쳐 러시아 이만(Иман, 현 달레네첸스크)으로 넘어갔다.

이만에서 군무도독부와 국민회군, 의군부 등을 시베리아의 스바보드니(Свободный, 자유시)로 보낸 후 1921년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에서 프리아무르주(연흑룡주) 한인공산당연합회 서기를 거쳐 회장이 되었다. 홍범도 부대와 북로군정서가 이만에 도착했을 때 박공서(朴公瑞)를 보내 러시아 인민혁명군 2군과 교섭하여 부대들을 무사히 자유시로 이동시키도록 하였다. 이후 자유시에서의 부대 통합이 난항을 겪자 뒤늦게 이만에 도착한 군비단 군사부로 하여금 자유시로 이동하지 말고 이만에 그대로 주둔하게 하였다.

1921년 12월 백군이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12월 4일 이만에서 한운용(韓雲用)을 중대장으로 한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 2중대가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전사하는 이만전투를 통해 백군의 진격을 늦췄지만, 백군의 공격은 계속되어 하바롭스크까지 밀려왔다. 이때 하바롭스크 인근 블라디미로프카(Владимировка)에서 프리아무르주 한인공산당연합회 성원들 23명으로 1개 소대를 만들어 대한의용군 제3중대와 함께 백군의 진격을 차단하였다. 이로 인해 하바롭스크에 주둔하던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은 인역까지 안전하게 퇴각하였다. 인역에서의 반격전에서 부상을 당했는데도, 부상을 당한 채 그대로 싸웠다. 그 해 겨울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인근의 한인 빨치산부대에서 활동하던 류성희와 결혼하였다.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를 탈환하는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큰 부상을 당해 이만으로 후송되었다. 건강이 회복된 후 이만시 한인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지방소비에트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러시아 극동소비에트 위원이 되었고, 후에 주석이 되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두 고려공산당의 분쟁이 심해지자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의 주관으로 1922년 10월 19일 베르흐네우딘스크(Верхнеудинск, 현 울란우데)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 참가하였다.

1922년 10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가 해방되고 다음 달인 11월 2일 마지막 백군 잔여 병력이 중국 국경을 넘음으로써 4년여에 걸친 내전이 끝났다. 같은 해 11월 연해주 고려혁명군과 한인 빨치산부대 군사혁명소비에트의 해산과 국민전쟁 참가자 귀가에 대한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우보레비치(Уборевич)의 명령 799호가 내려졌다. 한인부대들의 해산과 무장해제가 실시되었다. 해산 명령에 대한 한인 빨치산부대의 대응은 대략 3가지 정도로 구분된다. 먼저 명령을 즉각 수용하여 부대를 해산하고 명령에 따라 소비에트 건설로 나간 경우이다. 다음은 부대는 해산하여 소비에트 건설의 길로 나아가고, 부대의 지도자들은 개별적으로 항일운동의 길을 찾아 나선 경우이다. 마지막으로 부대해산을 거부한 경우이다. 이 중 두 번째 길을 택하였다.

쑨원(孫文)의 연소용공(聯蘇容共) 정책으로 제1차 국공합작이 실현되고 난 후, 1924년 6월 소련의 지원 아래 중국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에 혁명군사학교인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가 개교하였다. 중국 각지에서 혁명 청년들이 여기로 모였고 조선·베트남·몽골 등 아시아 피압박 국가의 혁명가들도 여기로 집결하였다. 이때 러시아내전 종료 이후 곧바로 중국으로 가서 중국국민혁명군 포병대 대장인 옛 대한의용군사회 사령관 이용(李鏞)으로부터 빨리 광저우로 올 것을 요청하는 편지가 왔다. 결국 1926년 말 두 동생 근만, 근수 그리고 아내 류성희를 데리고 광둥성 광저우로 이주하였다. 광저우에 도착한 이후 “몽골·시짱(西藏)·신장(新疆) 과 조선의 학생들은 우대하여 접수한다”는 황포군관학교의 규정에 따라 3형제는 이용 등 한인 공산당원들의 소개로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서는 이름을 몽각(夢覺)으로 고치고 교도대(敎導隊)에서 활동하였다. 두 동생은 보병과에 입학하였다.

1927년 4월 장제스(蔣介石)가 반공쿠데타를 일으키자, 동생들과 함께 당의 배치에 따라 상하이(上海)를 거쳐 우창(武昌)으로 와서 우한(武漢) 중앙군사정치학교로 옮겨갔다. 우한 중앙군사정치학교는 원래 황포군관학교 분교였는데 1927년 2월에 완전히 독립적인 군사학교로 바뀌었다. 이 학교는 중국 각지에서 많은 혁명청년들을 모집하여 양성하였는데, 개교 초기부터 1927년 초까지 한인청년회의 소개로 수십 명의 한인 청년들이 여기에 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형제들과 함께 우한중앙군사정치학교 훈련부에 편입되어 사업을 수행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국민당 군벌 하두인(夏斗寅)과 양삼(楊森)의 우한 공격에 맞서 장발규(張發奎) 휘하의 국민혁명군 제2방면군 제2영 제5련 포병부대를 지휘하며 방어전투에 참가하였다.

1927년 11월 말, 중국공산당 광둥성위원회는 활동분자비밀동원회를 열고 12월 13일에 광저우에서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우한중앙군사정치학교 출신의 급진적인 사관후보생을 주력으로 하는 교도단(敎導團)에 속해 광저우로 이동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영향 아래 있는 교도단이 봉기의 주력부대로 결정되었다. 교도단 대원 2,000명 중 80명이 한인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정세가 변함에 따라 봉기 기일이 이틀 앞당겨졌다. 다음 달인 12월 11일 이른 새벽 봉기군은 광저우 시내를 장악하였으나 ‘광저우 코뮌Commune’은 ‘3일 천하’로 끝났다. 일본군 등의 지원을 등에 업은 국민당군과 군벌군의 반격으로 봉기는 실패하였다.

이때 한인 청년 60명을 포함한 200명의 교도단 대원들을 이끌고 영남대학(嶺南大學)(현 중산대학) 부근의 진지를 점령한 후 그곳에 진을 치고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런데 봉기에 실패한 교도단 본대가 퇴각하면서 영남대학의 동지들에게 철퇴 명령을 전달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결국 퇴각 명령이 떨어진 것도 모른 채 12월 17일까지 6일 동안 진지를 고수하던 한인 60명을 포함한 200명의 돌격대를 지휘해 영남대학에서 결사항전을 벌이다가 이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대한군정부에 대한 일제 측 보고(1920. 3. 29) [판형1]

 

⋮윤상원⋮

|참고문헌|

「機密 第14號 間島 不逞鮮人 團體와 그 動靜에 관한 調査書의 件」, 1920. 3. 2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6』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誠齋 李東輝 全書』 下卷, 1998 ; 국가보훈처 편,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20, 1997 ; 김산, 님 웨일즈, 『아리랑』, 동녘, 1984 ;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 반병률, 『1920년대 전반 만주 러시아 지역 항일무장투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1918~1922)」,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2010.
  • 대한군정부에 대한 일제 측 보고(1920. 3.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