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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민용호 閔龍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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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민용호
한자명 閔龍鎬
본 관 여흥(驪興)
이 명 호 : 복재(復齋), 자 : 문현(文賢), 이명 : 민진호(閔晋鎬)
출신지 경남 산청(山淸)
생몰년월일 1869. 10. 29 ~ 1922. 8. 23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896년 관동창의군 결성, 원산진공작전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77)

1869년 10월 29일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오곡(梧谷, 현 오부면)에서 민치겸(閔致謙)과 연안 이씨의 5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자는 문현(文賢), 호는 복재(復齋)이다. 이명으로 민진호(閔晋鎬)를 사용하였다. 신분상 사족이었지만 1886년 부친이 급사하자 가족과 함양(咸陽) 오봉산(五峯山)에서 화전을 일구고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1894년 무렵 경기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여흥 민씨 여주(驪州) 삼방파(三房派) 민치우(閔致禹)의 양자가 되었다.

1895년 여주로 내려가 민병성(閔丙星)의 서재에서 지내던 중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1896년 1월 15일 여주에서 송형순(宋炯淳)·민영채(閔泳采) 등과 원주(原州)로 이동하여 이병채(李秉埰)·안성호(安聖鎬) 등과 의병을 규합하고, 1월 17일 원주 남쪽 신림(神林)에서 관동창의군을 조직하고 대장이 되었다.

1월 29일 대관령을 넘어 강릉(江陵) 인근 구산까지 이동하며 병력을 증원하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영입하여 부대 규모가 확대되었다. 좌군장에 김원섭(金元燮), 우군장에 이병채, 전군장에 강우서(姜禹瑞), 후군장에 박한옥(朴漢玉) 등을 선임하고, 2월 1일 강릉을 점령하였다. 강릉지역 토착 세력과도 연대하였으며, 강릉 입성에 방해가 된 경무관 고준식(高俊植)을 처단하고, 민망(民望)이 두터웠던 관찰사 이위(李暐)와 참서관 고승혁(朴承赫) 등은 유임시켰다.

1896년 1월 하순 원산(元山) 공략을 시작할 때까지 주변 세력을 규합하며 전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남북 12진(津)의 육지와 해안에 봉수장(烽燧將)과 망해장(望海將)을 두어 관군과 일본군의 접근을 탐지하였다. 무사청(武士廳)을 설치하여 척후의 임무를 원활히 하였다. 또 인재 영입을 위해 예빈소(禮賓所)를 두었다.

경북 안동(安東) 지역 의병과도 연계하여 이만윤(李晩胤)과 권옥연(權玉淵) 등 22명에게 군무첩을 내리고, 송명옥(宋鳴玉)과 김운락(金雲洛) 등을 소모사(召募使)로 임명하였다. 또 함경도를 비롯해 각지로 의병 모집을 위해 권익현(權益顯)·권명수(權明洙)·이경환(李景煥)·김윤희(金允熙)·김형윤(金亨倫) 등을 파견하였다.

1896년 3월 2일 원산을 공략하기 위해 2천 3백여 명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강릉을 출발하여 당일 주문진(注文津)에 이르렀고, 양양(襄陽)·간성(杆城)·고성(高城)을 거쳐 3월 17일 원산에서 80리 떨어진 안변군(安邊郡) 선운평(仙雲坪, 일명 (仙坪場))에 이르렀다. 하지만 비로 인해 병력 이동이 어려웠고, 3월 19일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퇴각하였다.

잔존 병력을 이끌고 4월 3일 강릉으로 복귀하였다. 4월 11일에는 원산에서 남하한 일본군을 별영장 김연상(金演常)이 통천(通川)에서 격파하였고, 4월 20일에는 일본 선박 3척이 풍랑을 만나 묵호(墨湖)에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선봉장 강우서 등과 격침시켰다.

1896년 5월 4일 신임 강원관찰사로 임명된 서정규(徐庭圭)가 서울의 관군을 이끌고 강릉을 공격하자, 삼척(三陟)을 중심으로 활동 계획을 세웠다.

관군이 삼척으로 들어오자, 삼면에 의병을 분산 배치하여 포위 공격하였지만, 탄약이 고갈되어 오십천(五十川)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재종손 민항식(閔恒植)과 재증손 민병성 등이 의병 해산을 권유하는 서신을 계속 보내왔고, 공동항쟁을 펼치던 제천 의병이 서북행에 오르자, 포고문을 발송하고 북상 길에 올랐다. 이때 참여한 의병은 5백여 명 정도였고, 춘천에서 온 성익현(成益賢)과 이경응(李景應), 그리고 권인하(權仁夏)·신무섭(申懋燮)·민동식 등이 동행하였다.

북상 중 인제군(麟蹄郡) 귀둔(鬼屯)에서 관군과 전투를 치렀고, 이후 금성군(金城郡) 창두(倉頭)를 지나 평강(平康)·곡산(谷山)·안변·고원(高原)·영흥(永興)·정평(定平)을 거쳐 함흥(咸興)에 당도하였다. 이어서 청산령(靑山嶺)을 넘어 삼수(三水)에서 10월 5일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이동하여, 백두산 아래에서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이후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선양(瀋陽)으로 갔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897년 1월 8일 평안북도 태천(泰川)으로 가서 박문오(朴文五)의 문하에서 한동안 머물며 그동안의 의병항쟁 내용을 정리한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을 편찬하였다.

1897년 3월 22일 서해안 선천(宣川) 내림포에서 배편으로 중국 망명길에 올라 3월 27일 산둥성(山東省) 옌타이(煙臺)에 도착한 뒤 톈진(天津)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만나 협력을 요청하였지만 실질적인 원조는 불가능하였다. 그 해 8월 유인석(柳麟錫)과 고종의 소환 조칙을 받고, 같은 해 겨울 귀국하였다. 귀국 후 독립협회 활동을 저지하면서 1898년 보부상의 행상 조합인 상무사(商務社) 설치에 관여하였다. 1899년 말 평북 도공사원(都公事員)이 되어 영변(寧邊)으로 가서 창성(昌城)·초산(楚山)·벽동(碧潼)·위원(渭原)·강계(江界)·자성(慈城)·후창(厚昌) 등과 압록강 대안 서간도에까지 상무사 조직을 확대하였다.

1900년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자 서울로 돌아왔고, 1901년 3월 인천(仁川)에서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중국을 여행한 뒤 1902년 여름 귀국하였다. 1902년 10월 천릉도감을 시작으로 1903년 중추원 의관과 우원군수에 연임되고, 12월 비서원승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관동창의록 [판형1]

 

⋮김항기⋮

|참고문헌|

『관동창의록』 ; 『복재집』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1권, 1970 ; 박민영, 『한말 중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박민영, 『화서학파 인물들의 독립운동』, 역사공간, 2019 ; 박민영, 「민용호의 강릉의병 항전에 대한 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 한국민족운동사학회, 1991 ; 이상찬, 「1896년 의병장 민용호의 실체」, 『규장각』 20, 규장각한국학연구소, 1997 ; 박민영, 「민용호의 강릉의병 투쟁」, 『의암학연구』 9, 의암학회, 2012 ; 이상찬, 「1896년 京元間 지역 의병 활동의 양상과 그 성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4,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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