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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노응규 盧應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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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노응규
한자명 盧應奎
본 관 광산(光山)
이 명 호 : 신암(愼菴), 자 : 성오(聖五)·경오(景五)
출신지 경남 함양(咸陽)
생몰년월일 1861. 3. 15 ~ 1907. 1. 4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노응규 의병부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노응규 의병부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77)

1861년 3월 15일 경상남도 함양군(咸陽郡) 안의면(安義面) 당본리(堂本里)에서 한사(寒士) 노이선(盧以善)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자는 성오(聖五) 또는 경오(景五)이고, 호는 신암(愼菴)이다. 합천군(陜川郡) 초계(草溪)에서 세거(世居)하다가 선대(先代)에 안의로 이주하였다.

기호유림의 권위자인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배웠다. 30세 전후 최익현(崔益鉉)을 만나 존화양이(尊華攘夷) 사상을 바탕으로 한 실천적 학문을 익혔다. 1894년 6월 최익현의 편지를 받고 의병 봉기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인 송병선(宋秉璿) 문하에도 출입하며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1896년 2월에 서재기(徐再起)를 비롯하여 정도현(鄭道玄)·박준필(朴準弼)·최두원(崔斗元)·최두연(崔斗淵)·임경희(林景熙)·성경호(成慶昊) 등과 고향 안의에서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의병장이 되었다. 그 해 2월 20일 진주(晉州)를 점령하고 부산(釜山)을 공격하기 위해 김해(金海)까지 진출하면서, 경남 서남부지역을 무대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1896년 4월 12일 구포(龜浦)에서 파견되어 김해로 접근하는 일본군 정찰병 1개 분대를 격퇴하였으나 다음날 일본군이 증파되자 창원(昌原)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4월 24일 서울에서 내려온 경군 500명과 대구진위대 지방군 200명 등 700명의 공격을 받고, 소수 병력만 이끌고 진주를 빠져 나갔다. 이 무렵 안의에서는 부친과 형 노응교(盧應交)가 서리들에게 살해당하고, 가산이 몰수되었다. 이에 정모(鄭某)로 성명을 바꾸고 광주(光州)의 일족 노종룡(盧鍾龍)을 찾아가 기우만(奇宇萬) 등을 만나 재기를 도모하며 순창(淳昌)의 이석표(李錫杓) 집에서 반 년가량 머물렀다.

1897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도움으로 부형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요청하였고, 그해 말에는 고종에게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를 올려 특사(特賜)를 받았다. 1898년 부형을 살해한 안의 관아의 서리들을 단죄하고, 1899년 고향에 돌아와 형의 장사를 지냈다. 1902년 규장각 주사에 임명되었고, 1905년까지 경상남도 사검(査檢) 겸 독쇄관(督刷官)·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동궁시종관(東宮侍從官) 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노승용(盧昇容)과 족손(族孫) 노종룡을 찾아가 재기를 모색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이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일으킨 의병부대에 합류하였으나 패산(敗散)하여, 노승용의 향리인 창녕(昌寧) 이방면(梨房面) 용배동(龍背洞)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1906년 가을 충북 황간(黃澗)에서 의병을 일으켜, 매곡면(梅谷面) 일대를 사병훈련소 삼아 인근의 문태수(文泰洙)·이장춘(李長春) 의병부대와 합동훈련을 실시하고, 경부철도 파괴, 열차 전복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1월 21일 서은구(徐殷九)·엄해윤(嚴海潤)·노승용·김보운(金寶雲)·오자홍(吳自弘) 등과 황간분파소 순검들에게 붙잡혔다. 한성경무소 감옥에서 옥중 투쟁을 벌이다가 그 해 2월 16일(음력 1월 4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노응규 열전 보도(『독립신문』 1920. 5. 8) [판형1]

 

⋮김항기⋮

|참고문헌|

「판결문」, 평리원, 1907. 5. 18 ; 허선도, 『창의대장신암노응규선생항일투쟁약전』, 1967 ; 박민영, 『화서학파 인물들의 독립운동』, 역사공간, 2019 ; 홍순권, 「한말 경남 서부지역의 의병활동」, 『지역사회연구』 5, 한국지역사회학회, 1997 ; 김준형, 「노응규 의병활동과 사상적 특성」, 『남명학연구』 24, 남명학회, 2007.
  • 노응규 열전 보도(『독립신문』 1920. 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