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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영만 朴英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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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박영만
한자명朴英晩
본 관밀양(密陽)
이 명호 : 화계(花溪)
출신지평남 안주(安州)
생몰년월일1914. 5. 19 ~ 1981. 11. 28
운동계열광복군
관련 단체한국광복군
관련 사건한국광복군
주요 활동1929년 광주학생운동 참가, 1940년 친일 문인을 규탄하는 유인물 배포, 1942년 광복군 제2지대 입대
포상훈격(연도)애국장(1990)

1914년 5월 19일 평안남도 안주군(安州郡)에서 박치옥(朴治玉)과 김진옥(金振玉)의 5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호는 화계(花溪)이다. 부친 박치옥은 1919년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바 있다.

안주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진남포공립상공학교에 진학하였다. 3학년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퇴학당하였다.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문부성 주관 검정시험을 통과하고, 와세다(早稻田)대학에 들어가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방학 때에는 국내 각지의 민담을 수집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교신하던 편지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대학을 중퇴하였다. 문필가로 활동하며 희곡 대본 「선구자」와 장편소설 『성곡(聖曲)』 등을 집필하였다. 1940년에는 대학 시절 수집한 민담을 집대성한 『조선전래동화집』을 출간하였다.

1940년 2월 이광수·최재서 등 조선문인협회 소속 문인들의 친일 행적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배포하여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자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펑톈(奉天)·톈진(天津)을 거쳐 11월 옌시산(閻錫山) 군벌 치하의 산시성(山西省) 커난포(克難坡)에 도착하였다. 산시대학(山西大學)에서 한국어를 강의하며 지내던 중, 1941년 12월 광복군 총사령관 명의의 소환장을 받고 한국광복군에 입대하기로 하였다.

1942년 6월 광복군 제2지대 본부가 있는 시안(西安)에서 광복군에 합류하였다. 군가 ‘압록강행진곡’을 작사하는 등 정훈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43년 11월 정훈처 선전과원에 임명되었고, 1944년 8월 이후 선전과장으로 활동하였다.

영어와 일본어·중국어에 능통하여, 1943년부터 제2지대 소속으로 이원범(李元範)과 주중 미국대사관 내 설치된 한국인공작반의 첩보활동을 지원하였다. 이후 한국인공작반 소속으로 일본·한반도의 언론 동향 파악과 정보수집 및 번역, 광복군과 전략사무국 사이의 연락 사무, 한반도 내에 전황 전파, 한국인의 독립의식 고취를 위한 선전물 제작 등에 참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 서울사무소 주임 자격으로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문인·극작가로 활동하여 1948년 이범석의 전기소설인 『새로운 성』을 시작으로, 한국의 위인을 주제로 한 라디오 드라마 극본을 집필하였다. 1960년대에는 박찬익의 전기 소설인 『주춧돌』과 광복군 활동을 주제로 한 『광복군』 3부작을 집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2·13, 200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4·6권, 1972·1975 ; 권혁래, 「화계(花溪) 박영만(朴英晩)의 작가 활동과 임시정부 하 광복군 활동에 대한 고찰」, 『한중인문학연구』 66, 한중인문학회,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