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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좌진 金佐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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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좌진
한자명 金佐鎭
본 관 안동(安東)
이 명 자 명여(明汝), 호 백야(白冶)
출신지 충청남도 홍성(洪城)
생몰년월일 1889. 12. 16 ~ 1930. 1. 24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대한광복회, 북로군정서, 대한독립단, 신민부, 한족총연합회
관련 사건 대한광복회, 성동사관학교, 청산리전투, 경신대학살, 자유시참변, 민족유일당운동
주요 활동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간부, 기호흥학회 창립, 호명학교 설립, 대한광복회 부회장, 대한독립선언서 서명,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 사령관으로 청산리독립전쟁(청산리전투) 수행, 대한독립단(대한의용군총사령부) 부총재, 신민부(新民府)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 성동사관학교 설립, 혁신의회와 한족총연합회 조직
포상훈격(연도) 대한민국장(1962)
 

(음)1889년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주군 고남하도면 행촌리(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아버지는 김형규(金衡奎)이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소년기에는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4년 뜻한 바 있어 대대로 내려오던 토지를 집안에 남아 있는 노복들에게 나누어주고 상경하였다.

 

1905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 장교에 임관되었다. 그 직후 일제가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자행하자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구국활동을 시작하였다.

 

1908년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고,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한성연회(漢城聯會) 간부로 활동하였다. 일제가 고종황제 양위 반대운동을 주도한 대한자강회를 강제 해산하자, 애국계몽운동가들은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설립하고 각 지방 학회를 설립하여 대응하였다. 이때 대한협회 지부를 홍성에 설치함과 동시에 1908년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홍성지회 창립에 참여하는 등 지방의 구국교육운동을 선도하였다. 1908년 자택을 교사로 제공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 운영 경비로 충당하게 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망하자, 독립군 무장 항쟁으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활동을 시작하였다. 활동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울 관수동에 이창양행(怡昌洋行)이라는 상점을 운영하였다. 이듬해 1월부터 안승구(安承龜)·민병옥(閔丙玉)·조형원(趙亨元)·남정면(南廷冕)·이영렬·박종원(朴鍾元) 등과 직접 자금모집에 나섰다. 군자금 모금 활동 중 서울에서 붙잡혀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중 생활 중 백범 김구(金九)와의 만남은 항일 투쟁을 위한 새로운 인연으로 작용하였다.

 

1913년 출감 후 고향에서 정양을 취하던 중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1915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창설하자 이후 만주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광복회 일원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17년 3월 이기필(李起弼)·감익룡(甘翼龍)·신효범(申孝範) 등 7명과 함께 붙잡혔다. 이기필·감익룡·신효범은 기소되었고, 최익환(崔益煥) 등 4명과 함께 면소 판정을 받고 풀려났다. 곧바로 위조화폐를 발행하여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일본 경찰이 단서를 잡고 추적하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2월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독립서(大韓獨立書)」를 발표할 때, 서일(徐一)·여준(呂準) 등 38명과 함께 서명하는 등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섰다. 「대한독립서」는 국내 독립선언서보다 몇 주 앞서 공표되어 국내외 독립운동을 고취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직후 대종교측에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창설하자 총재 서일의 요청을 받고 대한정의단 군사책임자가 되었다. 서일 등 대종교 신도들은 만주에서 1911년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했다가 만세운동 직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강화를 위해 유교 신도단체 공교회(孔敎會)와 합작하여 1919년 5월 대한정의단을 조직하였다. 대한정의단은 북간도 각지에 5개 분단(分團)과 70여 개 지단(支團)을 설치하고, 공식적으로 순한글 신문인 『민보(民報)』 와 『신국보(新國報)』 를 발행하였다.

 

또한 독립군 편성 준비로 극비리에 결사대원을 모집하여 1,037명의 청년자원자를 확보하였다. 대한정의단은 독립군 편성 장정과 군자금 준비가 갖추어지자 1919년 8월 독립군단체로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를 조직하였다. 실제로 군사 훈련과 독립군 편성 과제가 절박하게 대두되자, 대한정의단은 이 과제를 신민회 계통 무관을 초빙하여 해결하였다. 이때 조성환(曺成煥)·이장녕(李章寧) 등과 함께 초빙되어 1919년 8월부터 대한정의단의 군정회를 맡게 되고, 장정들의 군사 훈련과 독립군 편성 과제를 수행하게 되었다. 신민회 계통 민족주의자들은 공화주의자(共和主義者)들이었던 반면에 공교회 계통 민족주의자들은 군주제(君主制)를 지지하는 복벽주의자(復辟主義者)들이었기 때문에 공교회 계통의 지도자들은 반발하여 이탈하였다. 김성극(金星極) 등은 복벽파의 독립군 단체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새로 조직하고, 이규(李珪)·강수희(姜受禧) 등은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를 조직하였다.

 

1919년 10월 서일 등과 함께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를 조직하였다. 대한군정부의 총재는 대종교의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玄天黙)이었고, 사령부의 사령관을 맡았다. 즉 대한군정부의 독립군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창설 지휘하였다.

 

대한군정부는 성립과 동시에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성립을 보고하고, 산하 군사기관으로서의 공인을 신청하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국무원 제205호로서, 대한군정부의 명칭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변경할 것을 조건으로 승낙하였다. 명칭 변경을 조건으로 내건 이유는 대한군정부도 ‘정부’(政府)의 이름을 갖게 되면 임시정부의 ‘정부’와 혼동되어 마치 동격의 2개 정부가 존재하는 것으로 오해될 소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군정부는 임시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였다. 임시정부는 이 무렵 서간도에서 한족회(韓族會)·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가 중심이 되어 편성한 독립군 단체에게 이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라는 명칭을 보내었으므로, 북간도의 대한군정서는 이와 대비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별칭을 지어 애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세간에서는 ‘대한군정서’라는 공식명칭보다 ‘북로군정서’라는 별명이 더 널리 애용되고 유명하게 되었다.

 

대한군정서 사령관을 맡자 곧바로 왕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독립군 편성작업 시작과 동시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 도움을 요청하여 교관 이범석(李範奭)과 졸업생 장교 박영희(朴寧熙)·김훈(金勳) 등 다수 훈련 장교들 및 각종 교재를 공급받았다.

 

1920년 3월 초 십리평으로부터 약 30리 떨어진 삼림지대 안에 사관연성소를 설립하고, 소장을 겸임하였다. 약 500명의 장정을 뽑아 독립군을 창설하고, 뒤이어 다시 600여 명의 장정을 뽑아 병력을 보충했으며, 나머지 장정들은 대기하면서 경호 병력이 되게 하였다. 입대한 병사들에게 사격술과 총검술을 비롯한 총기사용 훈련과 학과훈련을 철저히 실시하였다.

 

1920년 6월 현재 사관연성소에서 훈련을 끝낸 독립군 사병이 약 600명이었고, 장래 독립군 사관이 되기 위하여 상등병의 견장을 붙이고 철저한 군사 훈련과 전략전술을 교육받고 있는 사관생도가 약 300명이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사관연성소에서 철저한 군사 훈련교육을 받은 연성대(硏成隊)를 가졌으며, 대종교의 군자금 조달로 무기를 잘 공급하여 독립군 부대들 중에서 무장이 가장 잘 갖추어진 부대였다. 대체로 독립군 부대들의 무기는 소총이었으며, 기관총을 1정이라도 갖춘 부대는 드물었다. 이에 비하여 북로군정서는 중무기에도 큰 비중을 두어 기관총과 함께 야포도 구입하였다.

 

일제는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독립군에게 대패하자,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에게 압력을 가하여 일본군의 지도하에 중국군을 출동시켜서 독립군을 ‘토벌’하려 함과 동시에 8월에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間島地方) (不逞鮮人) (剿討計劃)’을 세워 일본군이 직접 독립군을 ‘토벌’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중국군이 출동하게 되자, 멍푸더(孟富德)의 중국군측과 한국 독립군측은 일본측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삼림지대로 근거지 이동을 단행하기로 밀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지린성(吉林省)의 옌지현(延吉縣)·훈춘현(琿春縣)·왕칭현(汪淸縣)·허룽현(和龍縣)의 4현에 근거지를 설치하였던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8월 하순부터 근거지 대이동을 시작하였다. 명월구(明月溝)에 있던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이 1920년 8월 하순 제일 먼저 근거지를 이동하여 9월 21일경 허룽현 이도구(二道溝) 어랑촌(漁郞村) 부근에 도착하였다. 뒤이어 국민회군(國民會軍)·의군부(義軍部)·신민단(新民團)·광복단(光復團)·의민단(義民團) 등도 이도구로 이동하였다. 봉오동에 있던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독립군은 북방 이동하여 9월 말경 나자구(羅子溝)에 도착하였다. 왕칭현 서대파에 있던 북로군정서는 마지막으로 1920년 9월 17일~18일에 근거지 이동을 시작하여 1920년 10월 12일~13일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 부근에 도착하였다.

 

일제는 중국군을 동원한 한국 독립군 ‘토벌’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자, ‘간도불령선인 초토계획’에 의거하여 일본군이 직접 간도에 ‘출병’해서 독립군 ‘진압’ 작전을 시작하였다. 일제가 간도침입에 동원한 일본군 병력은 나남(羅南)의 제19사단 전부와 용산(龍山)의 제20사단으로부터 1개 대대 및 기타 보조 병력을 차출 첨가하고, 시베리아 주둔 11사단·13사단·14사단의 일부를 차출하여 모두 5개 사단에서 차출한 2만 5,000명에 달하였다. 여기에 측면 지원으로 관동군 일부와 비행기까지 동원한 엄청난 규모였다. 일본군은 이 거대한 병력을 3개 지대로 나누어 독립군을 이중 포위해서 ‘섬멸’하려는 계획이었다.

 

일본군 작전 목표는 제1단계에서 1개월 이내에 독립군 무장대를 철저히 반복 ‘토벌’해서 독립군을 전원 ‘섬멸’하고, 제2단계는 다시 1개월 이내에 촌락에 잠복하고 있는 민간인 독립운동가들을 철저히 색출하여 독립군 무장운동은 물론 비무장 독립운동까지 뿌리 뽑겠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이 작전 목표에 따라 아즈마(東)지대가 10월 15일 용정(龍井)에 도착한 후 10월 18일 삼도구에 있는 북로군정서와 이도구에 있는 홍범도연합부대를 찾아서 출발하였다. 일본군 아즈마지대는 기병과 포병을 포함한 약 5,000명의 막강한 병력으로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연합부대를 포위하여 10월 20일을 기해서 총공격 ‘섬멸’하라고 명령하였다.

 

북로군정서는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일본군 선발대 야마다보병연대(山田步兵聯隊)가 삼도구 청산리 골짜기에 진입하자 백운평(白雲坪) 부근에서 잠복 대기하고 있다가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일본군 선발부대를 섬멸해 버렸다. 이것이 ‘백운평전투’이다. ‘백운평전투’에서부터 청산리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백운평 전투에서 대승한 후 이도구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여 주둔했을 때 일본군 1개 기병대가 천수평(泉水坪)(샘물골) 마을에 들어가서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다. 북로군정서 지휘부는 작전회의를 열고 천수평의 일본 기병대를 먼저 기습 섬멸하기로 결정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10월 22일 새벽 5시 30분경 이범석 지휘의 연성대가 앞장서서 일본군 기병중대가 잠자고 있는 촌락과 말을 매어 놓은 토성 안으로 기습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4명은 탈출하고 나머지 일본군 기병 제27연대 소속 전초기병중대 116명은 전원 몰살당하였다. 북로군정서의 피해는 전사 2명과 부상 17명으로 경미하였다. 이것이 일본군 1개 기병중대를 섬멸한 대승리의 ‘천수평전투’였다.

 

뒤이어 ‘어랑촌(漁郞村)전투’가 전개되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어랑촌 서남단 874고지’를 선점하고 전투태세에 들어갔을 때에, 10월 22일 오전 9시 일본군도 고지를 선점하려고 달려왔다. 일본군은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6배가 넘는 우세한 병력과 화력만 믿고 고지 독립군을 아래에서 포위하여 오전 9시경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지형이 유리했기 때문에 우세한 화력으로 돌격해 올라오는 일본군을 내려다보면서 소총과 기관총을 퍼부어 수많은 적을 살상하였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은 단념하지 않고 계속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고지 아래서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일본군은 해가 져서 고지에 어둠이 내릴 때까지 치열한 전투를 했으나, 일본군은 막대한 희생만 낸 채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당황망조(唐慌罔措)하여 결국 패퇴하였다. 독립군은 이 치열한 전투에서도 승리했으므로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안투현(安圖縣) 방면으로 이동함으로써 ‘어랑촌전투’는 일단 종결되었다. ‘어랑촌전투’에서 일본군은 크게 패하여 기병연대장 가노(加納) 대좌를 비롯해서 300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한편 독립군측도 어랑촌전투에서의 피해가 가장 컸다.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이범석에 의하면, 북로군정서의 전사자와 부상자도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보고서마다 독립군을 패배시켰다고 하면서도 어랑촌전투에서 일본군이 패전한 사실을 시인하였다. 청산리독립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규모가 큰 어랑촌전투도 결국 독립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어랑촌전투에서 승리한 다음날인 10월 23일부터 소부대를 편성해서 서북방으로 이동하면서 일본군 부대들과 조우할 때마다 소규모 전투로서 ‘맹개골(萬麒溝)전투’ ‘쉬구(溝)전투’ ‘천보산(天寶山)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북로군정서는 10월 29일경에 안투현 황구령촌(黃口嶺村)에 도착하여 다른 부대들과 합류했다가 그 해 12월에 다시 북방으로 이동하여 밀산(密山)에 도착하였다.

 

‘청산리독립전쟁’의 결과를 보면,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은 “김좌진씨 부하 600명과 홍범도씨 부하 300여 명은 대소전쟁 10여 회에 왜병을 격살한 자가 1,200여 명”이라고 하여, 일본군 전사자를 약 1,200여 명으로 계산하였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이 임시정부에 제출한 정식 보고서에서는 일본군 전사자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기타 장교 이하 사병 1,254명이며, 부상자가 장교 이하 200여 명이라고 하였다. 한편 당시 중국의 『요동일일신문(遼東日日新聞)』은 일본군 전사자를 2,000명으로 추정하였다.

 

북로군정서가 주력이 되어 승리한 ‘청산리독립전쟁’은 일제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수립한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과 작전을 완전히 붕괴시켜 버렸다. 일본군 2만 5,000명의 병력으로 제1단계에서 무장독립군을 완전히 섬멸하고, 제2단계에서 비무장 독립운동세력까지 뿌리 뽑아 한민족 독립운동을 완전히 소멸시키고자 했었는데, 일제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1단계에서조차 북로군정서를 주력으로 한 ‘청산리독립전쟁’에서 패배하여 그들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북로군정서를 주력으로 한 독립군 부대들의 ‘청산리독립전쟁’ 대승리는 만주지역 한민족 독립운동을 보위하고, 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국내의 독립운동까지도 보위했으며,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려는 한민족의 독립정신과 독립투쟁을 한층 더 고양시켜 주었다.

 

1920년 12월 미산에 집합한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여기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간부 등의 요청과 안내를 받아 다른 독립부대들과 함께 흑룡강을 건너 노령(露領) 이만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독립군의 통합과 무기 공급을 받아 대작전을 감행할 계획이었다. 1921년 3월 이만에서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국민회군·의군부·군무도독부·혈성단 등 만주에서 건너온 독립군 부대들과 청룡대·사하린부대(박일리아 부대)·이만부대(박그레고리 부대) 등을 통합하여 대한의용군총사령부(大韓義勇軍總司令部, 후에 대한독립단으로 개칭) 를 조직하였다.

 

이 통합독립군은 약 3,000명의 병력으로서 총재 서일과 부총재 김좌진·홍범도 등이 지휘하였다. 그러나 이 통합독립군이 대작전을 전개하기 전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가 1921년 3월 긴급하게 임시고려혁명군정회의(臨時高麗革命軍政會議)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윌린, 부사령관에 오하묵(吳夏黙)을 임명한 후 통합독립군을 그 산하 군대로 개편하려고 하였다. 이때 소련군의 독립군 지휘를 거부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왔다. 그 직후 1921년 6월 박일리아부대(사하린부대) 등이 고려혁명군정회의에의 편입에 거부 반응을 보이자 갈란다라시윌린 등은 러시아 적군 제29연대를 동원하여 사할린부대 등을 공격케 함으로써 독립군은 사망 272명, 익사 37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의 참혹한 희생을 내었다. 이것이 이른바 ‘흑하사변(黑河事變)’ 또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북만주에 돌아오자 다시 독립군 재건에 진력하였다. 1925년 3월 닝안현(寧安縣)에서 호응하는 이전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의 옛 동지 김혁(金赫)·조성환·정신(鄭信)·남성극(南星極)·박두희(朴斗熙)·최호(崔灝)·유현(劉賢) 등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은 김혁이 맡았다.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을 맡아 즉시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장정들을 모집해서 연 2기의 속성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졸업생이 500여 명에 달하자 약 530명의 병력으로 신민부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일제는 만주군벌과 이른바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하여 만주에서의 한국인 무장활동을 만주군벌이 금지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1928년 1월 일본 경찰과 중국군 1개 중대를 파견하여 신민부 본부를 습격해서 다수 간부를 체포하였다. 신민부는 타격을 입고, 독립운동은 독립군 군사 활동보다는 교육·민생 활동에 역점을 두자는 최호 등의 ‘민정파’가 대두하였다.

 

이에 신민부를 재건하여 직접 중앙집행위원장 겸 군사부위원장을 맡고 독립군 활동 중심의 신민부(군정파)를 운영하였다. ‘둔전제’를 실시하여 독립군 군량과 경비조달을 보조하도록 하고, 국내에도 비밀리에 요원을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국내에 강(姜)모 요원 등을 파견하여 조선총독부 기습작전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또한 신민부 통치하의 북만주 일대 동포들에게 100호 이상의 마을에는 반드시 1개 소학교를 설립하고, 그 밖에 노동강습소를 설립하여 일반교육과 함께 독립사상과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신민부(군정파)는 1928년 2월 3일 닝안현에서 개최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참가하였다. 이어서 그 해 12월에는 남만주의 참의부 간부들과 함께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여 일시 이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 계통 단체들과 공산주의 계통 단체들 사이에 주도권 쟁탈전이 심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1929년 봄 비밀결사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하는 한편, 동년 7월에는 김종진(金宗鎭)·이을규(李乙奎) 등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세력도 포섭하여 북만주지역의 민족유일당으로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창립하였다. 한족총연합회의 주석으로서 농촌 자치조직을 강조하고, 동포들의 경제적 손실을 막기 위해 1929년 10월 산시참(山市站)에 정미소를 설치 운영하는 등 실업운동을 실행하였다. 또한 북만동포의 중등교육을 위한 북만중학(北滿中學) 설립을 추진하여 토지를 확보하였다. 한족총연합회 사업 활동의 하나인 산시참 정미소 사업격려 도중에 노령 고려공산당 산하 재중공산청년동맹에서 파견한 박상실(朴尙實)이 등 뒤에서 쏜 총을 맞고, 1930년 1월 24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한국독립운동을 발본색원하겠다고 간도에 침입해 들어온 5개 사단 차출 2만 5,000명 병력의 막강한 일본군을 청산리독립전쟁에서 독립군의 적은 병력으로도 탁월한 작전과 과감한 기습 선제공격으로 참패시켜 독립군의 대승리를 쟁취해서 한국독립운동을 보위한 무장독립운동의 영원불멸의 영웅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좌진 생가 현재 모습 [판형1]

 

김좌진의 친필편지(1901, 독립기념관 소장) [판형1]

 

청산리대첩 승전 기념사진 [판형1]

 

청산리전투 현장 입구에 세워진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판형1]

 

김좌진 사회장 광경 [판형1]

 

금성정미소 앞에 세워진 김좌진 동상 [판형1]

 

 

 

 

⋮신용하⋮

|참고문헌|

윤병석, 「參議·正義·新民府의 성립과정」, 『백산학보』 7, 1969 ; 윤병석, 『백야 김좌진』, 태극출판사, 1971 ; 박영석, 『한 독립군병사의 항일전투: 북로군정서 병사 이우석 옹의 사례』, 박영사, 1984 ; 신용하, 「독립군의 청산리독립전쟁의 연구」,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 ; 신용하, 「대한(북로)군정서 독립군의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 전옥진,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 홍성군편, 2001 ; 박환, 『김좌진 평전』, 선인, 2010 ; 임선일, 『북로군정서』, 치우, 2011 ; 신주백, 「한국현대사에서 청산리전투에 관한 기억의 流動」, 『한국근현대사연구』 57, 2011 ; 이성우, 『김좌진(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신화)』, 역사공간, 2011 ; 손세제 외, 「백야 김좌진의 민족의식과 국권회복운동」, 『유학연구』 37,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6.
  • 김좌진_profile
  • 금성정미소 앞에 세워진 김좌진 동상
  • 김좌진 사회장 광경
  • 김좌진 생가 현재 모습
  • 김좌진의 친필편지(1901, 독립기념관 소장)
  • 청산리대첩 승전 기념사진
  • 청산리전투 현장 입구에 세워진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 김좌진(프로필사진)
  • 김좌진 사회장 광경
  • 김좌진의 친필편지(1901)_(독립기념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