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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시창 朴始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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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박시창
한자명 朴始昌
본 관 밀양(密陽)
이 명  
출신지 경기 시흥(始興)
생몰년월일 1903. 11. 5 ~ 1986. 6. 7
운동계열 광복군
관련 단체 유악한국청년혁명회, 광복군 총사령부, 민족혁명당
관련 사건 유악한국청년혁명회, 광복군 총사령부, 민족혁명당
주요 활동 1919년 상하이로 망명,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입학, 1927년 황포군관학교 우한분교 재학 중 유악한국청년혁명회 참여, 졸업 후 중국군에 복무, 1932년 제87사단 중대장으로 상하이사변 참전, 1935년 김구의 중국군관학교 입교생 모집활동 참여, 1942년 중국육군대학 졸업, 조선의용대 참여, 1943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 조선민족혁명당 후보위원, 1944년 10월 참모부 참모 역임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63)

1903년 11월 5일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 시흥리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의 양자이며, 친아버지인 박해겸(朴海謙)은 박은식의 6촌 동생이다. 6세 때였던 1908년 슬하에 3녀만을 두었던 7촌 재종숙 박은식에게 입양되었다.

1911년 4월 모친이 병사하고, 같은 해 5월 부친이 서간도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주로 누님 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16년 서울 오성학교(五星學校) 졸업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부친과 재회하였다. 이후 부친이 타계할 때까지 수행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9월 말 부친과 함께 하얼빈(哈爾濱)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1년 10월 이래 부친과 최중호(崔重鎬) 등이 중심이 되어 창간한 『사민보(四民報)』의 발행을 도왔다. 1923년경 난징(南京) 중앙대학(中央大學)에 입학하였다가 생활고로 휴학하였다. 상하이로 돌아와서는 한인청년동맹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5년 11월 부친이 상하이에서 서거하자 국장례로 진행된 장례식을 지켰다.

1926년 11월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5기로 포병과에 입교하였다. 재학 중 제1차 북벌전(北伐戰)에 참전하였다. 1927년 2월 우한(武漢)에 입성한 국민혁명군이 북벌군의 초급간부 확충을 목적으로 황포군관학교 우한분교(武漢分校)를 개교하자 우한분교로 옮겨 교육을 받았다. 재학 중 우한분교에 입교해 있던 진공목(陣公木)·진갑수(陳甲秀)·안재환(安載煥)·김영재(金英哉)·송욱동(宋旭東)·장기준(莊驥俊) 그리고 중국군 기술교관으로 있었던 백득림(白得林)·홍의균(洪義杓)·권준(權晙)·전창무(田昌茂)·노세방(勞世芳) 등과 함께 유악한국혁명청년회留(鄂韓國革命靑年會)를 조직하였다. 유악한국혁명청년회는 후에 의열단(義烈團) 무창지부(武昌支部)로 발전하였다.

1927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1928년 난징(南京)의 군관단을 거쳐, 1929년부터 8년간 국민혁명군 경위군(警衛軍)에서 복무하였다. 경위군은 나중에 제87사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32년 중국군 제5군 제87사단 중대장으로 상하이사변(上海事變)에 참전하였다. 중국군은 두 달 이상 분전하였지만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에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5년 김구(金九)의 중국군관학교 입교생 모집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당시 김구는 중국군관학교 입교생과 자파 청년들을 모집하기 위해 모집원을 각지에 파견하였으며, 주요 지역에는 지방연락원을 배치하였다. 1935년 9월 노태연(盧泰然)·염온동(廉溫東)과 더불어 뤄양(洛陽) 지역의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최중호의 딸 최윤신(崔允信)과 결혼하였다. 이후 중국군에 복무하며 한인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한국독립당에 관여하였다.

1941년 김홍일(金弘壹)과 함께 중국육군대학에 입교하여 2년간 군사학을 연마하였다. 조선의용대에 참여하였으며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하면서 1943년 8월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에 임명되었다. 또 조선민족혁명당 후보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44년 10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참모부 참모로 임명하자 12월까지 재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광복군 각 지대에서 일본군 점령지역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는 동시에, 일본군 내 한적사병을 접수하여 중국의 주요 도시에 잠편지대(暫編支隊)를 설치하였다. 이때 광복군 상하이 잠편지대의 지대장에 임명되어, 일본군에서 이탈하여 상하이에 집결한 한적사병들을 수용하여 광복군을 확대하였다. 또한 상하이로 몰려든 많은 한인들과 인근 지역 교포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면서, 한적사병들의 귀국 알선에 진력하였다.

1945년 10월 7일 상하이에 도착한 광복군총사령 지청천(池靑天) 장군과 판사처장 김학규金(學奎)에게 잠편지대의 활동 상황과 한적사병 인수·집결에 관한 업무를 보고하였다. 10월 10일 상하이 후장대학(滬江大學)에 집결 중이던 한적사병 6천여 명의 사열식(査閱式)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광복군이 군대 편제를 유지하며 귀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1946년 2월에 이르러서야 미 제7함대의 협조를 받아 귀국하기 시작하였다. 광복군은 상하이를 비롯한 여러 항구에서 선박편을 통해 1946년 2월 하순부터 6월 말 사이에 귀국을 완료하였다.

1946년 7월 귀국 후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임관하여 제16연대 연대장, 제102여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6·25전쟁에도 참전하였으며, 연대장·사단장·부군단장 등을 거쳐 1959년 6월 육군소장으로 예편하였다. 1976년에는 제5대 광복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광복군 창설일인 9월 17일을 기념하고 일본과의 전투에 앞장선 광복군 지도자로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7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광저우 황포군관학교의 현재 모습 [판형1]
중국 충칭에 있는 광복군 제1지대 대원들 [판형1]

 

⋮한상도⋮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4·6권, 1972·1975 ; 추헌수, 『자료한국독립운동』 3, 연세대출판부, 1973 ;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1993 ; 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 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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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저우 황포군관학교의 현재 모습
  • 중국 충칭에 있는 광복군 제1지대 대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