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실 朴允實 |
한글명 | 박윤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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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朴允實 |
본 관 | |
이 명 | 박윤섭(朴允涉) |
출신지 | 강원 김화(金化) |
생몰년월일 | 1875. 10. 20 ~ 1919 |
운동계열 | 3·1운동 |
관련 단체 | |
관련 사건 | |
주요 활동 | 1919년 3월 초 강원 김화군 김화면에서 독립선언서 배포 활동 |
포상훈격(연도) | 애국장(2006) |
1875년 10월 20일 강원도 김화군(金化郡) 김화면(金化面) 암정리(岩井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명으로 박윤섭(朴允涉)을 사용하였다. 20대 중반 이후 천도교에 입교하여 교인이 되었고, 전제원(典制員)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초 김화면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붙잡혀 옥에서 사망하였다.
1919년 3월 2일 오전 김화면 암정리 천도교 교회에서 신동민(申東敏)은 안상덕(安相德)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매를 교부받고, 그 취지에 찬성하여 지역에 널리 알리기 위한 방책을 강구하였다.
이날 밤 교회에서 윤규호(尹圭祜)와 함께 신동민으로부터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전해 듣고 각 5매씩을 교부받았다. 그 취지에 찬동하여 이를 마을 주민들에게 알리고자 김화 읍내의 보통학교 앞, 그 아래쪽의 석비(石碑), 수차장(水車場) 옆의 빈집, 잡화상점 앞, 학사리 장창범(張昌範)의 집 대문 등 주민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부착하였다. 3월 3일 김화 읍내 주요 지점에 독립선언서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한 일제 헌병에 의해 붙잡혔다.
1919년 4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4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정의·인도와 민족자결에 따른 것으로써 보안법 위반이 되지 않는다. 독립을 선언했으니 일본 법률의 제재를 받을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5월 1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윤실 판결 보도(『매일신보』 1919. 4. 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