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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홍병기 洪秉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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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홍병기
한자명 洪秉箕
본 관 남양(南陽)
이 명 자 : 운해(運晦), 도호 : 인암(仁菴)
출신지 경기 여주(驪州)
생몰년월일 1869. 12. 10 ∼ 1949. 1. 26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고려혁명위원회, 고려혁명당, 삼일동지회
관련 사건 3.1운동
주요 활동 1892년 동학 접주,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1922년 고려혁명위원회 위원장, 1924년 천도교비상혁명최고위원회 집행위원장, 1926년 고려혁명당 최고고문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69년 12월 10일 경기 여주군(驪州郡) 금사면(金沙面) 이포리(梨浦里)에서 부친 홍익룡(洪益龍)과 모친 한익화(韓益嬅)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운해(運晦), 도호는 인암(仁菴)이다.

1892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었고 1893년 보은군 속리면 장내리에서 개최된 동학(東學) 포교의 자유를 얻으려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冤運動)에 참여하였다. 1894년 10월 소위 제2차 동학농민운동 시 여주에서 기포(起包)하였다. 이후 이종훈(李鍾勳) · 손병희(孫秉熙) 등의 지휘 하에 충주와 공주 등지에서 관군 및 일본군 항전을 벌였다.

동학농민운동 후 손병희 · 이종훈 등과 최시형(崔時亨)을 수행하다가 1898년 최시형 사후 손병희를 지지하였다. 일본에 망명하여 개화사상을 수용한 손병희의 지도하에 1904년 대동회(大同會) · 중립회(中立會) 등의 민회를 조직한 후 동학의 근대화운동을 추진하였고,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재탄생시켰다. 이용구계와 김연국계의 천도교인이 시천교를 분립하여 교단의 운영이 곤란해지자 천도교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모든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교회 내 위계가 1907년 고문, 1908년 경도사(敬道師)에 올랐고, 시무하던 직무도 1910년 현기사장(玄機司長) 서리, 1911년 대종사장(大宗司長)으로 상향되었다. 1910년대 전반에는 대종사장으로, 대종사장에서 물러난 1916년 이후에는 장로(長老)로서, 천도교의 중요사항을 결정하여 교세를 신장시키고 교인을 교육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18년 말 신문을 통하여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사실을 파악하고 “우리 조선도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독립이 될 것이다” “정의와 인도로써 성심껏 하면 무슨 일이든지 된다”라는 판단과 신념하에 1919년 1월 권동진(權東鎭) · 오세창(吳世昌) · 최린(崔麟) 등이 손병희와 협의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자 이에 동참하였다. 1919년 1월 상순 권동진에게 “독립운동을 하려면 동지를 모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그해 2월에도 “목하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이 제창되고 있으므로 우리 조선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어떠냐?”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따라서 2월 25일경 권동진으로부터 민족대표 참여를 제의받자 흔쾌히 참여하였다.

2월 27일 저녁 김상규의 집에 가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2월 28일 저녁 손병희의 집에서 천도교 · 기독교 · 불교의 대표들과 만나 독립선언식의 개최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는 등 독립선언식 개최와 관련된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가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였다. 한용운(韓龍雲)의 독립선언서 낭독 후에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일본 관헌의 가혹한 취조와 신문에도 불구하고 의연함을 잃지 않으며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의 “피고는 금후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기회만 오면 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답할 정도로 강한 독립의지를 천명하였다. 오랜 재판 끝에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받고 서울 공덕동에 위치한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김완규 · 박준승 · 최준모와 함께 출옥하였다.

옥에서 나온 후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 · 오지영 등과 함께 천도교 혁신운동을 추진하였다. 즉 ‘신문화운동’이란 개량적 민족운동을 추진하던 천도교중앙총부의 집권파의 노선에 반대하여 교인의 대표인 의정원(議正員)을 선출한 후 이들로 구성된 의정원(議正院)의 결의로 교회의 중요사무를 처리하려고 하였다. 또 종의원 · 종법원 · 종무원의 삼원제를 실시하여 교권의 분립을 이루고, 선거로써 교주를 선출하고, 교주와 수위의 봉급을 동일하게 할 만큼 극단적인 천도교의 평등 이념에 따라 교회를 운영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천도교 내 혁신운동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22년 말 천도교에서 분립하여 천도교연합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개량적 문화운동을 반대하고, 혁명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2년 7월 14일 이종훈(李鍾勳) · 최동희(崔東曦) · 송헌(宋憲) · 이동락(李東洛) · 김광희(金光熙) · 이동구(李東求) · 김봉국(金鳳國) 등과 서울에서 고려혁명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를 조직하였다. 이종훈이 고문, 최동희가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 송헌이 비서, 이동락이 해외조직부장, 김광희가 선전부장, 이동구가 해내조직부장, 김봉국이 해내선전부장, 박태윤이 재정부장, 김치보 · 강창선 · 지동섭 · 김홍종 · 강도희 · 김문벽 · 이동욱 · 강명혁 · 김병식 · 손두성이 위원에 임명된 가운데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고려혁명위원회는 항일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외교부장 최동희를 러시아 연해주에 파견하여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이동휘 · 한명세 등과 협의한 후 소비에트러시아의 후원을 얻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1924년 4월 5일 천도교비상혁명최고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나용환(羅龍煥)이 부위원장, 윤익선(尹益善)이 내무위원장, 최동희가 외무위원장, 김진팔이 재무위원장, 정계완이 선전위원장, 이종훈이 사성위원장(司省委員長)에 임명된 가운데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최동희 등을 통하여 천도교와 소비에트러시아와의 제휴를 맺고, 소비에트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양성한 후 대일항전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소비에트러시아가 일소(日蘇)평화조약을 체결하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한 탓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연해주에서 쫓겨난 고려혁명위원회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 최동희와 해외선전부장 김광희 등이 정의부(正義府)의 정이형 · 양기탁, 연해주에서 만주로 온 주진수 · 이규풍 등과 협의하여 1926년 3월 지린(吉林)에서 정의부 · 천도교연합회 · 형평사의 삼각동맹으로 고려혁명당을 창당하였다. 이동구 · 김봉국 등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듣자, 고려혁명당에 가입하여 당원을 모집하고 조직을 확장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26년 12월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이종락이 지린성 창춘(長春)에서 체포되어 고려혁명당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1927년 1월 29일 만주에서 신의주경찰서의 경부보(警副補)에게 체포되었다. 근 60세의 노인으로 식사도 제대로 못하며 2년 가까이 신문과 조사를 받다가 1928년 10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200일 본형산입)을 받았다. 이후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9년 7월 5일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서울 재동 자택에서 자식 훈육에 전념하였다. 아들 홍인섭(洪寅燮)이 1930년 8월 29일경 시내에 격문을 붙이고 한인의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벌인 것도 그의 교육활동의 결과였다.

광복 후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3·1정신을 고취하였다. 1945년 12월 3일에는 독립촉성선서식을 거행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봉대를 천명하였다. 1947년 2월 9일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개최된 ‘동학혁명’ 53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하여 ‘동학혁명’의 의의를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등 ‘동학혁명’과 ‘3·1운동’의 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담긴 뜻을 받들어 독립된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1949년 1월 17일 교통사고를 당하여 1월 26일 81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장례는 경운동 천도교회에서 천도교장으로 치러졌다.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 5월 18일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 18번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조규태⋮

|참고문헌|

경성복심법원,「손병희 외 47인 판결문」, 1920.1.3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2. 1972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1·12, 1990 ; 오재식 편술, 『민족대표삼십삼인전』, 동방문화사, 1959 ; 김삼웅, 『33인의 약속-처음 밝히는 33인의 재판기록과 그 후 이야기』, 산하, 1997 ; 조규태, 「동학인 홍병기의 종교적 활동과 민족운동」, 『한성사학』 24, 2009.
  • 수형기록카드
  • 홍병기 모습
  • 판결문
  • 홍병기(1920)
  • 홍병기
  • 홍병기 집터
  • 獨立宣言關係者
  • 백용성.홍병기유묵(옹고지신,경세지진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