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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최성모 崔聖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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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최성모
한자명 崔聖模
본 관  
이 명 호 : 월당(月塘)
출신지 서울
생몰년월일 1874. 1. 9 ~ 1937. 3. 14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3.1운동
주요 활동 3.1운동 민족대표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74년 1월 9일 서울 안국동(安國洞)에서 양반의 자제로 태어났다. 호는 월당(月塘)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여 1888년 소과인 진사과에 급제하여 최진사(崔進士)라 불렸다.

부인 김주신(金主信)이 기독교를 믿어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1905년 을사늑약 후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전덕기(全德基) 목사의 시국강연을 듣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전덕기 목사가 시무하던 상동교회에 출석하였다. 1908년 서울 상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 때 같은 교회 출신의 이필주(李弼柱), 김진호(金鎭浩)와 함께 전덕기 목사의 지도를 받아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여 상동교회 삼총사라 불렸다. 전덕기 목사로부터 기도회 인도와 교회 및 상동청년학원, 공옥학교의 대외교섭 문제를 위임받아 처리하였다. 김진호에게는 교인 가정 심방과 상동교회 청년회 지도를 맡겼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종교부 위원을 맡고 1910년경 청년회관 주일예배에서 설교를 하거나, 전도 강연을 하였다. 1913년 6월 13일 감리교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제2회로 졸업하였다. 이 때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하였다.

1914년 6월 3일부터 8일까지 서울 정동교회(貞洞敎會)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전도사로 임명되어 서울구역 서강교회(西江敎會)에 파송되었다. 1915년 2월 하순 서울 종교예배당에서 개최된 특별전도회에서 홍종숙(洪鍾肅), 정춘수(鄭春洙), 손정도(孫貞道) 목사 등과 함께 전도 강연을 하였다. 1916년 3월 8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해리스(M. C. Harris)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해주구역 해주읍교회에 파송되었다. 1918년 6월 19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배형식(裵亨湜), 손정도, 김종우(金鍾宇) 등과 함께 장로목사 안수를 받고, 해주읍교회에 유임되었다.

해주읍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던 1919년 2월 25일 외아들 경환(景煥)의 배재학교 졸업식을 보고 상급학교 진학을 상의하려고 서울로 왔다. 이때 한말 상동교회 삼총사 중 한 사람인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를 찾아가 그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이 날 YMCA 간사 박희도(朴熙道)를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즉시 찬성하였다. 거처에 돌아와 이필주 목사에게도 그 소식을 전하자 그도 즉시 찬성하였다. 그 다음 날인 2월 26일 이필주와 함께 박희도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박희도는 2월 27일 오후 2시 한강 인도교 부근에서 열릴 예정인 기독교계의 준비 모임에 두 사람도 참석하도록 초대하였다. 2월 27일 정오 이필주 집에서 박희도, 김창준(金昌俊), 함태영(咸台永), 이갑성(李甲成), 이승훈(李昇薰), 신석구(申錫九), 오화영(吳華英), 박동완(朴東完) 등이 모인 기독교계 예비모임에도 참석하였다.

이들은 이 모임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지역 책임자를 선정하고, 16명의 기독교계 민족대표 명단을 확정하였다. 오후 2시경 한강 인도교 부근 모임에도 이승훈, 박희도, 오화영, 이갑성, 이필주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2월 28일 저녁에는 손병희(孫秉熙) 집에서 모인 전체 모임에 참석하고,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곧바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와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만기로 서울 경성감옥에서 독립선언 동지들 중 2년형 판결을 받고 복역하던 박희도, 이필주, 신석구, 신홍식(申洪植), 이명룡(李明龍), 양전백(梁甸佰), 박동완 등 15명과 함께 출옥하였다.

1922년 9월 27일부터 10월 3일까지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제15회 북감리회 연회에서 상동교회에 파송되어 2년간 목회하였다. 상동교회 시무 중이던 1923년 7월 2일 YMCA에서 ‘예수의 가정교육’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1923년 12월 최병헌(崔炳憲), 김종우 목사, 노블(W. A. Noble) 선교사 등과 함께 일제의 악습을 폐지하기 위한 폐창운동(廢娼運動)에 참여하였다.

1924년 9월 17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제17회 북감리회 연회에서 배형식(裵亨湜) 목사가 감리사로 있는 만주지방 펑톈(奉天)으로 파송을 받았다. 1926년 6월 23일부터 28일까지 서울 피어선성경학원에서 열린 제19회 북감리회 연회에서 천안(天安) 조치원(鳥致院) 구역에 파송되어 천안읍 내리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29년 6월 19일부터 25일까지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열린 제22회 북감리회 연회에서 천안지방 예산(禮山) 아산(牙山) 구역에 파송되어 예산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러나 이 교회에서 시무 중 건강이 악화되어 휴직하였다.

1931년 12월말 경 주소지는 남만주(南滿洲) 다롄시(大連市) 약협정(若狹町) 63번지였고, 휴직한지 2년차인 기독교조선감리회 정회원이었다. 그러나 결국 목회 현장에 복귀하지 못하고 1933년 이후 경기도 수원에서 요양생활을 하다가 1937년 3월 14일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승태⋮

|참고문헌|

『皇城新聞』 1910. 1. 30, 5. 3 ; 『每日申報』 1915. 2. 27 ; 『그리스도회보』 1913. 5. 5, 6. 23, 10. 20 ; 『기독신보』 1920. 10. 27, 1923. 1. 3 ; 『동아일보』 1921. 11. 5 ; 『조선감리회연회록』 ; 「손병희 외 48인 판결문」 ; 양주삼 편,『기독교조선감리회요람』, 기독교조선감리회총리원, 1932 ; 이병헌 편저, 『三·一運動祕史』,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 전택부,『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 정음사, 1978 ; 송길섭,『상동교회90년사』, 기독교대한감리회 상동교회,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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