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이종훈 李鍾勳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이종훈
한자명 李鍾勳
본 관 광주(廣州)
이 명 자 : 진호(振浩), 초명 : 종구(鍾救), 도호 : 정암(正菴)
출신지 경기 광주(廣州)
생몰년월일 1856. 2. 19[음] ~ 1931. 5. 2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천도교중앙총부,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 천도구국단, 고려혁명위원회, 고려혁명당
관련 사건 동학농민운동, 3·1운동
주요 활동 1894년 동학농민운동 참가, 1912년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 참여, 1916년 천도구국단 참여,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1922년 고려혁명위원회 고문, 1926년 고려혁명당 참여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56년 2월 19일(음력)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實村面) 유여리(柳餘里, 현 광주시 실촌읍 유사리)에서 아버지 이우재(李禹載)와 어머니 선산 김씨(善山金氏)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초명은 종구(鍾救)이다. 자는 진호(振浩)이고, 천도교에서 사용하는 도호(道號)는 정암(正菴)이다. 어려서부터 글 잘하기로 소문이 났고, 10세부터 14세까지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학문에는 뜻이 없어 7,8년간 유랑생활을 하였다. 21세에 이르러 실촌면 사동 능곡의 한 산을 사들여 철점(鐵店)을 직영하였지만 4년 만에 폐업하였다. 이후 설월리에서 강순심과 수철점(水鐵店)을 동업하였지만 이것도 3년 만에 폐업하였다.

두 차례 사업에 실패하고 나서 이원회(李元會)의 주선으로 해영(該營) 별군관(別軍官)이라는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한말 부패한 관직에 환멸을 느끼고 사직하였다. 1886년 7월 인천에서 객주로 부를 축적하였지만 불의의 사고로 4년 만에 객주 생활을 그만두었다. 함흥으로 이주하였지만 북청, 정평, 영흥 등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1893년 1월 17일 동학에 입도하고 고향인 광주를 비롯하여 지평, 여주, 이천, 충주, 음죽, 안성 등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까지 포교하였다. 1893년 2월 8일 동학교단에서 광화문 앞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할 때 참가하여 사회변혁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이어 이해 3월 10일 충북 보은 장내리에서 개최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운동에 광주지역 동학교인들을 이끌고 참여하였으며, 말 2필과 8백 냥을 후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학교단의 중심인물로 성장하게 되었다.

1894년 1월 10일 정읍 고부에서 기포한 동학군은 3월 20일 무장기포, 3월 25일 백산대회, 5월 11일 황토현전투를 거쳐 5월 30일 전주성 점령하였다. 이후 조선정부와 화약을 체결한 동학군은 호남 각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는 등 민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해 8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동학교단은 반외세 반침략의 기치를 내걸고 다시 총기포 하였다. 9월 18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의 총기포령에 따라 곧바로 광주에서 기포하여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다. 광주에서 기포하여 옥천 청산으로 이동하던 중 괴산에 이르러 관군과 치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손병희(孫秉熙)가 이끄는 호서동학군(북접)의 중군으로 선임되어 공주 우금치전투, 영동전투, 종곡전투 등에 참여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의 실패와 관의 추적으로 고향을 떠나 상인으로 위장하여 연명하던 중 1898년 4월 동학 2세 교조 최시형이 경성감옥에 투옥되자 전답을 팔아 뒷바라지 하였다. 최시형이 6월 2일 교수형을 당하자 광희문 밖에서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광주에 안장하였다.

1904년 8월 동학교단이 흑의단발(黑衣斷髮) 하는 문명개화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자 광주 등지의 교인을 동원하여 단발하였다. 그동안 동학이라고 불렸던 교단이 1905년 12월 1일 천도교(天道敎)로 이름을 바꾸고 이듬해 2월 26일 천도교중앙총부를 조직하자 현기사 고문과원, 서응관장, 현기사장, 고문, 천주, 현기사 혜양과원, 성도사, 직무도사장, 대종사장, 장로 등의 주요 원주직을 맡아 종교인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모든 사회단체들은 해산을 당하고, 그나마 활동이 가능하였던 것은 종교단체였다. 이러한 점을 활용하여 1912년 이종일(李鍾一), 임예환(林禮煥), 그리고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普成社)의 직원 등과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적지 않기 때문에 농어민을 포섭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면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임예환과 함께 농민과 어민들의 피해상황을 조사하였다. 20여 일 동안 조사한 결과 농민의 80%가 배일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경기지방의 농민을 상대로 시위운동을 일으키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우선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비정치성을 띤 신생활운동으로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취지문, 결의문, 행동강령 등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개최 당일 전날인 7월 14일 종로경찰서에 압수당하여 무산되었다.

신생활운동이 무산되자 보성사 직원들과 함께 민족문화수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불교와 연합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천도교 단독으로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1912년 10월 31일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결성하고 본부를 보성사에 두었는데, 제3분과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16년 2월 20일 이종일, 장효근(張孝根), 김홍규(金弘奎), 박준승(朴準承) 등 천도교 지도자들이 국제정세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구 정객을 앞세워 민중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자 적극 찬성하였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이상재(李商在)를 만나 민중운동을 협의하고, 그에게 ‘천도교 측에서 나선다면 나는 기독교들을 동원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1918년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원칙 14개조를 공식화하는 한편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체코, 유고, 폴란드 등이 민족자주권을 선언하자 다시 민중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1918년 5월 5일 손병희,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이종일 등과 모임을 갖고 민중운동을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의 3대 원칙에 의해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연합전선으로 독립운동 준비가 한창이던 2월 20일 권동진 집에서 민족대표는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33명으로 결정되었다. 천도교에서 2월 20일부터 26일까지 1주일 동안 15명의 민족대표를 선정할 때 장로로서 손병희, 홍병기(洪秉箕), 권동진, 오세창, 최린, 박준승, 이종일, 김완규(金完圭), 홍기조(洪其兆), 나용환(羅龍煥), 나인협(羅仁協), 임예환, 양한묵(梁漢默), 권병덕(權秉悳)과 함께 선정되었다. 2월 28일 손병희 집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28인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중생활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지만 함께 3·1운동을 준비하였던 이종일이 “꿋꿋한 모습을 보여주어 더욱 마음이 든든”하다고 평가하였다.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하자 천도교 최고책임자인 박인호(朴寅浩)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원동 자택으로 찾아와 위로를 하였는데, “나는 2년의 징역을 살았다 하여도 그동안 9달이나 병감에 누웠었고 오늘도 병감에서 나왔으니까 무엇 징역의 참맛은 알지 못하였소. 거저 한울님의 은혜와 선생의 덕택으로 죽은 몸이 살아나온 것만 다행이오”라고 평온한 마음으로 소회를 밝혔다.

3·1운동 이후 천도교 개혁과 비밀결사에 참여하였다. 천도교단은 3·1운동으로 손병희, 최린 등 대부분의 교단지도부가 일본 경찰에 검거됨에 따라 신진 지도부로 대체되었고 주로 청년들이 당시 문화운동을 주도하였다. 3년 동안 원로 지도자 공백으로 교단은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갈등이 내재되었다. 이 과정에서 오지영(吳知泳), 최동희(崔東曦) 등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교단 개혁운동이 전개되었다.

2년의 옥고를 마친 후 교단으로 복귀하여 1922년 1월 17일 천도교중앙종리원 종법원 종법사 겸 경기도 교구 순회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교단의 보혁(保革) 갈등은 1922년 4월 신병으로 가출옥 중이던 손병희가 구관제의 부활을 선언함에 따라 더욱 첨예화되었다. 교단은 손병희의 뜻에 따라 구관제를 부활시켰고, 그동안 혁신세력을 지지하였던 대부분의 원로들도 돌아섰다. 이때 불온 문서를 배포하여 교단 체면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혁신세력의 홍병기, 오지영, 정계완 등과 함께 1922년 5월 12일 제명되었다. 한 달 후인 6월 13일 제명을 취소함에 따라 교적이 다시 회복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5월 19일 손병희가 사망하고, 교단 최고책임자 박인호가 사임하자 교단은 통합을 모색하였다. 보혁 양측에서 교인대회를 개최하자 개혁세력의 교섭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양측 교섭은 원만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혁신세력은 1922년 12월 말경 천도교회연합회를 조직하여 별립(別立)하였다. 혁신세력을 지지하였지만 천도교회연합회에 참여하지 않고 천도교단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결정에는 함께 활동하던 홍병기의 교단 잔류, 장남 이관구가 손병희의 장녀와 결혼하여 사돈관계를 맺고 있던 상황 등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후 장로로 활동하였던 원로지도자 예우와 교리강구 및 교무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마련한 강도사에 선임되었다. 1923년 5월 28일부터 7월 22일까지 2개월여 간 원산 등 북선 일대와 북간도 용정, 국자가, 두도구, 동불사 등지를 순회하면서 교무를 시찰하였다. 또한 교단 갈등 봉합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경계(敬啓)를 발표할 때 원로교인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7월 14일 교단 혁신세력의 핵심인물이었던 최동희가 무장투쟁을 이념으로 하는 비밀결사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자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고려혁명위원회가 1924년 4월 5일 천도교최고비상혁명위원회로 재조직될 때 사성위원장을 맡았다. 고려혁명위원회에 참여하였던 천도교인 대부분은 혁신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이었다. 고려혁명위원회 구성원 중 최동희, 김광희, 김홍종, 강도희, 이동락 등은 민족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 중이었다. 이들은 정의부, 형평사와 연대하여 1926년 4월 5일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다. 이 시기에 약력 중에는 “출옥한 후 중국 포덕에 뜻을 두고 수차 북간도 용정에 가서 포교에 노력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고려혁명위원회와 고려혁명당 활동이었다. 비록 고령이지만 고려혁명위원회 목적에 찬성하여 고문으로 참여하였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포교라는 명목으로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만주에서 고려혁명당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활동하던 중 1930년 4월 국내로 돌아왔지만 1개월 후인 5월 2일 76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저서로 『이종훈선생수기』와 천도교 교리와 관련된 「천인일체론」 · 「생리론」 · 「덕론」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성주현⋮

|참고문헌|

「이종훈 심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2권(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20. 10. 30 ; 『이종훈선생수기』 ; 『광주이씨대동보』 ; 『천도교회월보』 ; 『신인간』 ; 『묵암비망록』 ;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천도교중앙종리원, 1933 ; 조규태, 「1920년대 천도교연합회의 변혁운동」, 『천도교의 민족운동연구』, 선인, 2007 ; 조성운, 「정암 이종훈의 국내에서의 민족운동」, 『숭실사학』 25, 숭실사학회, 2010 ; 성주현, 「정암 이종훈의 생애와 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9,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 이종훈
  • 판결문
  • 이종훈(1920)
  • 이종훈
  • 李鍾勳氏 長逝
  • 이종훈 선생의 묘
  • 이종훈 선생
  • 손병희와 이종훈
  • 이종훈 등 만기출옥 관련 기사
  • 천도연혁대개 이종훈 관련 부분
  • 이종훈 선생 84주기 추모식
  • 己未年運動과 朝鮮의 48人 최근 소식
  • 이종훈 집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