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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문복금 文卜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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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문복금
한자명 文卜今
본 관  
이 명 문복금(文福今)
출신지 전남 해남(海南)
생몰년월일 1907. 12. 13 ~ 1937. 5. 22
운동계열 학생운동
관련 단체 목포 정명여학교
관련 사건 1919년 4월 목포 만세운동
주요 활동 1919년 4월 목포 정명여학교 만세운동 참여, 1921년 11월 14일 목포 정명여학교 만세운동 참여
포상훈격(연도) 건국포장(1993)

1907년 12월 13일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북평면(北平面) 흥촌리(興村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문복금(文福今)을 사용하였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목포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에 재학하였다. 1919년과 1921년에 목포 정명여학교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8일과 9일 전남 목포에서 있었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목포 만세시위는 양동교회(陽洞敎會)·영흥학교(永興學校)·정명여학교 등 기독교계 인사들 주도로 일어났다. 4월 8일 새벽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경고문을 집집마다 투입하였고, 오전 10시경 양동을 비롯한 시내 곳곳에서 만세를 외쳤다. 12시경 일시 해산하였다가 오후 2시경 죽동(竹洞) 부근을 시작으로 시내에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4월 9일에도 죽동에서 전날 끌려간 사람들에 대한 석방 요구 시위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80여 명이 붙잡혔는데, 이때 함께 끌려갔다. 어린 나이에 학생 신분으로 처벌을 면제받고 풀려났다.

1921년 11월 『동아일보』 등의 신문매체를 통해 워싱턴회의 개최 소식을 듣고 이 회의에 한국 대표가 참석하여 독립 문제를 제출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독립의 기대를 정명여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공유하며 만세운동을 기획하였다. 1921년 11월 13일 일요일 오후 4시에 천귀례(千貴禮)·곽희주(郭喜主)·김자현(金慈賢) 등 11명의 학생과 함께 모여 만세시위 준비를 논의하였다. 다음 날인 14일 정오 오포(午砲)를 신호로 만세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기숙사에서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1921년 11월 14일 오전 수업이 끝나자 태극기를 들고 정명여학교 정문에서 출발하여 남교동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그 모습에 이남순(李南順)·이다애(李多愛)·김복선(金福善) 등 다른 정명여학교 학생들도 학교 뒷문으로 빠져나와 만세시위 행렬에 합류하였다. 남교동(南橋洞)·죽동·창평정(昌平町)·대정정(大正町)·대성동(大成洞) 등 목포 시내를 활보하며 만세를 외쳤다.

이에 출동한 목포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정명여학교 학생 모두가 현장에서 붙잡혔다. 이 시위의 영향으로 다음 날인 11월 15일에는 영흥학교 학생 약 40명이 목포시내에서 만세운동을 하였고, 목포 청년들이 유달산(儒達山)에 올라 대형 태극기를 내걸고 산상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1921년 12월 23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곽희주·박복술(朴福述)·김연순(金蓮順)·김자현과 함께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풀려났던 일이 더해져, 다른 사람들보다 처벌이 심하였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22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미결구류 일수를 50일 산입)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21년 목포 정명여학교 학생 만세운동 참가자 이감 보도(『매일신보』 1922. 1. 17) [판형1]

 

⋮최우석⋮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22. 3. 11 ; 「수형인명부」 ; 「집행원부」 ; 「형사사건부」 ; 『동아일보』, 1922. 1. 23, 3. 2 ; 『매일신보』, 1921. 12. 22·26, 1922. 1. 17, 3. 2 ; 정명여자중·고등학교100년사편찬위원회, 『貞明100年史(1903-2003)』, 목포정명여자중·고등학교, 2003.
  • 1921년 목포 정명여학교 학생 만세운동 참가자 이감 보도(『매일신보』 1922. 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