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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이승훈 李昇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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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이승훈
한자명 李昇薰
본 관 여주(驪州)
이 명 아명 : 승일(昇日), 본명 : 인환(寅煥), 호 : 남강(南岡)
출신지 평북 정주
생몰년월일 1864. 3. 25 ~ 1930. 5. 9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신민회
관련 사건 15인사건, 3.1운동
주요 활동 197년 신민회 활동, 오산학교 설립. 1911년 15인 사건. 1919년 독립선언서 발표. 1922년 민립대학기성준비회 중앙집행위원 활동. 1927년 신간회 참여
포상훈격(연도) 대한민국장(1962)

1864년 3월 25일((음) 2월 18일)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아버지 이석주(李碩柱)와 어머니 홍주 김씨(洪州金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주(驪州), 아명은 승일(昇日), 본명은 인환(寅煥), 자는 승훈(昇薰), 호는 남강(南岡)이다

태어난 해 10월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할머니 송씨의 보살핌을 받았다. 6세 때인 1869년 정주읍에서 40여리 떨어진 청정(淸亭)으로 이사하여 8세 때인 1871년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0세가 되던 1873년 아버지와 할머니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그곳에서 유기점을 경영하는 김이현의 상점에 무급 사환으로 들어갔다. 1874년 더 큰 상점과 유기공장을 운영하는 임일권(林逸權) 상점의 점원으로 자리를 옮겨 독학으로 장부 정리와 상업 수완을 익혔다.

15세가 되던 1878년 이도제(李道濟)의 딸 이경강(李敬康)과 결혼했다. 결혼한 이듬해인 1879년부터 유기 행상을 시작하여 정주읍과 청정, 고읍 등지에서 장날 놋그릇을 팔다가 점차 평안도 일대와 황해도 지역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1887년 임일권이 후계자가 되어 줄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독립하여 철산의 거부 오희순(吳熙淳)으로부터 자금을 빌려 청정에 유기상점을 내고 유기공장을 세워 경영하였다. 사업이 번창하여 평양에 지점까지 내었으나,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평안도 일대가 전장이 되자, 오희순에게 빌린 돈을 갚고, 덕천으로 피난하였다.

1895년 전쟁이 끝나 피난길에서 돌아왔으나, 공장과 상점이 폐허가 되어 다시 오희순에게서 2만냥을 빌려 공장과 상점을 재건하였다. 평양과 진남포에 새로운 지점을 낼 정도로 사업이 발전하고 안정되자 이상촌을 만들어 가문을 일으키고자 1899년 청정에서 용동(龍洞)으로 이사하고 동족들을 모아 서당을 설립하고 자제들을 교육하게 하였다. 이 무렵 양반 신분도 돈으로 사서 수능참봉(守陵參奉)직을 제수받았다.

운송업과 무역에도 손을 대어 인천항으로 수입되어 들어오는 석유 약품 등을 사서 황해도와 평안도에 팔아 큰 이득을 남겼다. 당시 엽전의 가치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 부산이 두 배나 엽전의 가치가 높다는 것을 알고 1902년 엽전 1만냥을 모아 부산에 보내려다가 엽전을 실은 배가 목포 부근 바다에서 일본영사관 소속 배와 부딪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일본영사관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했으나 본전인 1만 냥만 돌려받았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소가죽 값이 오를 것을 예상하여 우피 2만장을 사서 만주 영구(營口)에 가서 팔아 이득을 남기려 하였으나, 1905년 전쟁이 일찍 끝나 우피 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헐값에 처분하여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이때부터 사업 일선에서 물러나 용동에 칩거했다.

이후 용동에 머물면서 서당 훈장에게 경서를 배우는 한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을 구독하면서 사회적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06년 10월 서울에서 관서지역 인사들이 국권회복과 민권신장을 목표로 조직한 서우학회(西友學會)에 초기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1907년 2월 20일 안창호가 미주에서 ‘신민회 통용장정(通用章程)’을 만들어 가지고 귀국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강연을 하고,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기 위하여,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전덕기(全德基), 양기탁(梁起鐸) 등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1907년 3, 4월경 안창호를 만나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고, 고향의 서당을 폐지하고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설립하여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7월 안창호의 권고에 따라 신민회에 입회하여 평안북도 지회 책임을 맡았다. 1907년 신민회의 조직 확대를 위해 활동하는 한편, 학교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하기 위해 중등 교육기관인 오산학교를 세워 1907년 12월 24일에 개교하였다. 교장은 그 지역 유지이자 유림대표인 백이행(白彛行)을 추대하고 자신은 교감을 맡아 학교의 실제적인 운영을 책임졌다.

1908년 5월 안태국(安泰國)과 함께 평양에 태극서관을 설립하고 운영하였으며 이 무렵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서우학회는 1908년 1월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가 되었는데, 이 학회에도 계속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5월 정주지회 설립을 청원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한 실업구국론의 실천의 일환으로 1908년부터 주식을 공모하여 1909년 4월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을 맡았다.

1909년 1월 31일 순종의 서북지방 순시 때에는 교육유공자로 선정되어 정주역에서 순종을 알현하였는데, 이 사실이 1909년 2월 9일자 『황성신문』에 “거이승훈씨역사(擧李昇薰氏歷史)하야 고아전국인사(告我全國人士)”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이 해에 교회 설립 부지를 제공하여 오산교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 7월 11일 오산학교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이 무렵 일제의 교육 탄압을 예상하여 로버츠(Stacy L. Roberts, 羅富悅) 선교사를 오산학교 교장으로 청빙하였다.

1910년 가을부터 자금의 압박을 받고 있는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의 주식 모금을 위해 서울로 평양으로 동분서주하던 중 1911년 2월 안명근 사건으로 일제 헌병경찰에 검거되어 제주도에 1년간 거주제한처분을 받아 5월경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이기풍(李基豊) 목사가 개척한 성내교회(城內敎會)에 출석하며, 그 교회에서 운영하던 영흥학교(永興學校)의 교육활동을 도왔다.

그러나 1911년 9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寺內總督謀殺未遂事件)]’ 연루자로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 결국 윤치호(尹致昊), 양기탁, 안태국 등과 함께 123명이 기소되어 1912년 6부터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9월 28일 105인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여기서 10년 징역형을 받았다.

일제는 재판과정에서의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 사실이 드러나, 국제적인 비난과 여론의 압력을 받게 되자, 경성복심법원의 1913년 3월 20일 판결에서는 99명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이승훈을 비롯한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유동열에게 6년 징역형, 임치정(林蚩正)에게 5년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이것도 일제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부당한 판결이었으므로 상고하였으나, 10월 9일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옥중에서 성경읽기와 기도로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으며, 신약성경을 100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1914년 징역 4년으로 감형되었고, 1915년 2월 15일 윤치호, 양기탁 등과 함께 일왕의 특별사면으로 가출옥하였다. 고향에 돌아와 그 해에 평북노회장이던 정주읍교회 정기정(鄭基定)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평북노회의 추천을 받아 1916년 3월 4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7년 1월 31일 오산교회 장로로 장립(將立)받았다.

45세에 신앙 생활을 시작하고, 53세에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지만, 매우 열성적이었던 것 같다. 더욱이 3·1운동 준비 과정에서의 인맥은 거의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었다.

제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18년 8월 31일부터 9월 5일까지 평북 선천읍 북예배당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던 여운형(呂運亨)이 참석하여 『상해재류교인상황』을 보고하였다. 여기서 여운형과 만나 국내외 정세를 논의하였다. 12월에는 오산학교 출신으로 도쿄(東京)에 유학 중이던 서춘(徐春)이 찾아와 도쿄 유학생들의 분위기를 전하며 독립운동 방법을 상의하였다.

1919년 1월 21일경에는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105인 사건’의 동지 선우혁(鮮于爀)이 찾아와 국제 정세와 해외 동포의 동향을 말해주며, 상하이에서 대표를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하려고 하는데 자금을 모금할 수 있도록 알선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먼저 선천에서 양전백(梁甸伯) 목사를 만났고, 평양의 길선주(吉善宙) 목사를 찾아간다는 것이었다. 이승훈은 이 때 선우혁의 요청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이 때부터 동지들을 만나 선우혁의 이야기를 전하며 기독교계의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다가 2월 10일경 선천읍 백시찬(白時瓚) 장로 집에서 다시 선우혁을 만나고 독립운동 계획을 의논하고 돌아왔다. 그 무렵 박현환(朴賢煥)이 찾아와 오산학교 출신인 김도태(金道泰)의 부탁으로 왔다고 하면서 서울에서 최남선(崔南善)이 서울에 상경하여 계동 김사용(金思容) 집에서 송진우(宋鎭禹)를 만나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했다.

2월 10일 상경하여 송진우를 만나 천도교계의 독립운동 준비 소식과 기독교계와 연합하여 운동을 하고자 한다는 제안을 받고 흔쾌히 동의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신학교 1년 선배지만, 그보다 8세 연하인 함태영(咸台永)을 만난 상황을 이야기한 후 그 날로 돌아왔다. 2월 11일 선천을 찾아가 이명룡(李明龍), 양전백, 백시찬,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등과 회합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여 동의를 얻었다.

2월 14일경 선천을 떠나 평양에 가서 기홀병원에 입원 중 손정도(孫貞道), 길선주, 신홍식(申洪植)을 만나 참여를 권유하여 손정도를 제외한 두 사람의 동의를 얻었다. 손정도는 독립운동에 동의는 하지만, 자신은 중국에 가는 길이므로 참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가지고 2월 17일 다시 상경하여 소격동 김승희(金昇熙) 집에서 수일간 머물면서 송진우, 최남선(崔南善, 19일), 박희도(朴熙道, 20일) 등과 만나 운동 방략을 협의하였다. 특히 2월 20일에는 박희도가 찾아와 그의 집에서 기독교계 동지들이 모이니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참석하여 박희도·오화영(吳華英)·신홍식·정춘수(鄭春洙)·오기선(吳基善) 등과 운동 방략을 협의하였다.

2월 21일에도 함태영 집에서 박희도·오화영·안세환(安世桓)·함태영과 회합을 하고 최남선을 만나 그와 함께 최린(崔麟)을 찾아가 운동비로 3천원을 마련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2월 23일 함태영 집에서 오기선을 만나 참여를 권고하였으나 거부당하고, 최린에게 5천원을 받아 박희도에게 2천원을 주고, 나머지 3천원은 유명근(柳明根)에게 맡겨 두고 그 증서를 박희도에게 주어 운동비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동안 기독교계에는 ‘독립선언서’냐, ‘독립청원서’냐로 약간의 논쟁이 있었으나, 둘 다 하기로 합의하고 2월 24일 함태영과 함께 최린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2월 27일에는 이필주(李弼柱) 집에서 정오에 모인 기독교측 회합에 참석하여 최성모(崔聖模)·오화영·김창준(金昌俊)·박희도·박동완(朴東完)·신석구(申錫九)·이갑성(李甲成)·함태영 등과 의논하여 기독교계 서명자 16인을 확정하고 이 날 오후 2시 한강 인도교 부근에서 함태영·이필주·안세환·박희도·오화영·최성모 등이 모인 준비 모임에도 참석하였다. 2월 28일 저녁에는 손병희(孫秉熙) 집에서 모인 전체 모임에 참석하였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명월관지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곧 바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19년 4월 21일 예심판사의 “피고는 금후에도 어디까지든지 조선의 국권회복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하려고 하고, 또 먼저도 말하였지만, 금번 독립운동은 우리 동지들뿐으로 한 것이지 외국사람이나 외국에 거주하는 조선 사람이라든지 또는 학생 등과는 하등 관계가 없으며 일본정부에 대하여 청원한 일에 있어서도 외국 사람의 조력을 요할 필요는 털끝만치도 없었다.”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미결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산입)을 받고, 서대문감옥과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감옥 중에 있던 1922년 2월 1일 부인 이경강(李敬康)이 별세했다. 감옥에서 성경읽기와 독서를 통해서 할 일은 준비하면서 신학공부를 중단하고 이제 몸바쳐 “동포의 교육과 산업을 발달”시키기 위해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922년 7월 21일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마지막으로 경성감옥에서 가출옥하였다. 일제의 비인도적인 감옥 제도를 개선하기 위하여 1922년 7월 25일에서 29일에 걸쳐 『동아일보』에 “감옥에 대한 나의 주문”을 연재했다. 그리고 오산학교의 운영을 다시 맡고 이곳저곳의 초청에 응하여 8월 10일 평양 장대현교회 강연을 비롯하여 안주 중학기성회(25일), 선천유학생회(28일), 신의주유학생회(29일) 등에서 강연하였다.

민립대학설립운동에도 참여하여 1922년 11월 23일 발족한 민립대학기성준비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피선되었다. 일본의 공사립 대학과 각종 학교 교육시설들을 돌아보기 위하여 1923년 1월 4일 통역으로 ‘105인 사건’의 동지였던 유동열의 자제 유용탁(柳容鐸)을 데리고 3주간 예정으로 일본에 건너가 1월 14일 주일에는 동경조선인연합교회에서 “고생한 후에는 반드시 낙이 있다”는 제목으로 “격렬한 설교”를 하여 400여 교인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1923년 4월 초에는 출범한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총회의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그 집행위원회의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어 활약하였다. 1924년 5월에는 곤경에 빠진 동아일보사 사장을 맡았으나 10월에 사임하고 고문으로 취임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제자들이 그의 약전인 『육일지남강(六一之南岡)』을 발행했으나, 일제 경찰이 압수하여 소각하였다.

1925년 8월에는 오산학원(五山學園)을 재단법인으로 만들어 이사장에 취임하고, 학교 시설을 확충하고 오산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인가 신청을 하여 1926년 1월에 인가받았다. 이를 위해 총독부 당국자들과 교섭하는 과정에서 그가 변절하였거나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사회의 오해와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웃어넘기며 개의치 않았다. 1926년 6월 15일 20세 연하인 평양연합기독병원(기홀병원)의 간호부 장선경(張善慶)과 재혼하였다.

오산학교가 고등보통학교로 인가받은 후에는 더욱 교육사업을 확장하여 여성교육을 위한 여학교와 농과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제석산과 연향산에 실습림, 안주의 매립지를 이용한 임해농장, 절골에 직조공장, 제사공장을 세운다는 계획도 마련하였다. 그리고 용동에 마을공동체 자치기구인 자면회를 조직하여 용동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을 가지고 공동생산을 하는 이상촌건설 계획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도 1927년 2월에는 국내 민족유일당 조직인 신간회에 참여하였으며, 1929년 5월에는 한국교회의 “기독주의”와 “사회복음주의”로의 개혁을 표방한 기독교신우회에도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건강을 해쳐 의사가 입원이나 정양(靜養)을 권하기도 하고 주위에서도 정양을 권했지만, “정양하노라다가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게. 70이 된 여석이 아무려면 오래 살겠소. 목숨 붙은 날까지 일하는 것이 수지”라고 하며 일축하였다.

제자들이 모금하여 1929년 12월 오산학교 교정에 동상을 세우고, 1930년 5월 3일 동상제막식을 거행했는데, 이 제막식에 참석한 지 6일만인 5월 9일 새벽 갑자기 찾아온 협심증으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5월 16일 오산학교 교정에서 사회장으로 치르고, 유해는 인체 표본으로 만들어 오산학교에서 사용하라는 유언에 따라 표본 제작을 위해 서울 경성제국대학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총독부 당국이 표본 제작을 제지하여, 결국 표본으로 제작 중이던 유골은 11월 2일 열차로 고향에 다시 옮겨져 11월 4일 향리인 용동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승훈 순종 방문 보도(『황성신문』 1909. 2. 9) [판형3]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의 졸업 사진(1910) [판형3]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판형3]
이승훈 가출옥 보도 (『동아일보』 1922. 7. 22) [판형3]
이승훈 『동아일보』 사장 시절(1926) [판형3]

 

⋮김승태⋮

|참고문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 ; 『西友』 제1호, 서우학회, 1906 ; 『황성신문』, 1909. 2. 9, 4. 21 ; 『동아일보』, 1922. 7. 22 ; 『長老敎會 神學校要覽 1916』, 耶蘇敎書會, 1916 ; 李贊甲, 「南岡은 信仰의 사람이다」, 『聖書朝鮮』 제64호, 1934. 5월호 ; 김도태, 『南岡李昇薰傳記』, 문교사, 1950 ; 이병헌 편저, 『三. 一運動祕史』,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 김기석, 『南岡李昇薰』, 세운문화사, 1970 ; 최석숭, 『평북노회사』, 기독교문사, 1979 ; 남강문화재단 편, 『남강 이승훈과 민족운동』, 재단법인 남강문화재단출판부, 1988 ; 한규무, 『기독교 민족운동의 영원한 지도자 이승훈』, 역사공간, 2008 ; 김승태, 「남강 이승훈의 민족의식과 민족운동 방략」,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9, 2002 ; 김승태, 「남강 이승훈의 신앙행적에 관한 몇 가지 문제」, 『한국기독교와 역사』 17,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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