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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이갑성 李甲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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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이갑성
한자명 李甲成
본 관 경주(慶州)
이 명  
출신지 경북 대구(大邱)
생몰년월일 1886. 10. 23 ~ 1981. 3. 25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3·1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주요 활동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서명. 학생단의 독립운동과 3·1독립선언서 배포에 적극 활동.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이사,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위원. 신간회 발기위원. 흥업구락부 발기위원.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86년 10월 23일 경상북도 대구(大邱)에서 부친 이기덕(李基德)과 모친 파평 윤씨(坡平 尹氏)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1889년 10월 23일 출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연당(硏堂)이다.

어려서는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다. 11세 때 한문 서당을 다녀오다가 우연히 만난 기독교 선교사 샤록스(A. M.Sharocks)의 설교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예배당에 다니면서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을 부모가 알게 되어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기독교청년회(YMCA)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남대문교회 전도사 함태영(咸台永)을 만나, 그의 집에 기숙하면서 『그리스도신문』을 배달하였다.

1906년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하였다. 대구로 돌아가 대남소학교에서 약 1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다 서울로 올라와 세브란스병원의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여 약학을 전공하였다. 1914년 약학과를 마치고, 다시 의학을 공부하였다. 1915년 세브란스연합병원 제약담당 사무원으로 취직하였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국제질서가 개편될 시기에 즈음하여 기독교 청년들 사이에 독립문제가 토론되자 독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 도쿄(東京)에서 한국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소식이 전해온 후, 기독교계의 3·1운동 초기 기획·조직 활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1919년 2월 12일과 14일 두번에 걸쳐서 음악회를 가탁하고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 구내에 있던 자신의 숙소에서 연희전문학교 학생대표 김원벽(金元壁),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김형기(金炯璣), 경성전수학교 학생 윤자영(尹滋瑛)·김문진(金文珍),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배동석(裵東奭) 등과 독립운동 궐기를 논의하였다.

이 모임은 이후 1919년 만세운동의 학생단 독립운동에 합류하였다. 2월 21일 오후 7시경 세브란스의전 구내 숙소에서 이승훈(李昇薰)·함태영(咸台永)·안세환(安世桓)·현순(玄楯) 등과 만나 천도교와의 합작 문제는 이승훈과 함태영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안세환을 일본 도쿄에, 현순을 중국 상하이(上海)에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단의 민족대연합전선이 확정되고, 최남선(崔南善)이 초고한 「독립선언서」 초안이 천도교측으로부터 기독교측 함태영에게 전달되어 오자, 2월 27일 이필주(李弼柱)목사 집에서 이승훈·박희도(朴熙道)·오화영(吳華英)·최성모(崔聖模)·이필주·함태영·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 등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이때 모인 10명 가운데 함태영만 빼고 나머지 9명과 신홍식(申洪植)·양전백(梁甸伯)·이명룡(李明龍)·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등 7명을 합하여 모두 16명을 기독교 측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함태영을 뺀것은 서명자들이 체포될 경우 그 가족의 보호 소임을 맡기 위해서였다. 이때 이갑성은 기독교 측 대표 중 한사람으로 결정되어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서명하였다.

2월 28일 저녁 가회동 손병희(孫秉熙)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자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모임에서 독립선언식 장소를 변경하자고 건의하였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손병희의 제안으로 명월관(明月館) 지점인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이 회의에서 조선총독부에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서」를 보내는 일을 위탁받고, 흔쾌히 이를 수락하였다.

한편, 2월 28일 인쇄되어 그 일부가 기독교 측에 전달된 독립선언서의 경상도지역 배포와 학생단 전달 책임을 맡았다. 2월 28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설(李容卨)에게 독립선언서 5매를 주어 등사해서 세브란스의전 학생들에게도 배포하도록 하였다.

다음날인 3월 1일 400여 장을 자기 사무실에서 다시 이용설에게 주어 200장은 대구의 목사 이만집(李萬集)에게, 나머지 200장은 마산의 임학찬(任學瓚)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또한 군산에 있는 박연세(朴淵世)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하기 위해 김병수(金屏洙)에게 200장을 주었다. 학생단에게는 보성전문학교 학생대표 강기덕(康基德)에게 총 1,500장을 배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와 있는 캐나다 선교의사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石虎弼)에게 해외 홍보 등의 협조를 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6월 상순 경찰과 검찰의 조사가 일단락되고, 검사국에 송치되어 같은 해 8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관할(管轄) 예심종결하였으나 내란죄로 기소되어 고등법원에서 다시 예심을 거치게 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 예심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그해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소요죄로 최남선·김창준·오화영과 함께 징역 2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2년 5월 5일 오화영과 함께 경성감옥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 소감을 묻는 『동아일보』 기자의 질문에 “나올 때에 같은 동지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차마 발이 돌아서지 아니하는 것을 할 수 없이 나왔습니다.”라고 하여, 동지에 대한 간절한 정서를 표하였다.

출옥 후인 1922년 11월 이상재(李商在)·한용운(韓龍雲)·이승훈·현상윤(玄相允)·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남궁훈(南宮薰)·홍덕유(洪悳裕)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준비회를 조직하였다. 1923년 3월 20일 발기회에도 참가하고, 이승훈·조만식·안재홍 등과 함께 모금운동 지방 강연회에도 참가하였다.

1925년 3월 22일 신흥우(申興雨) 집에서 이상재·윤치호(尹致昊)·유성준(兪星濬)·장두현(張斗鉉)·구자옥(具滋玉)·유억겸(兪億兼)·오화영·박동완 등과 함께 이승만(李承晩) 계열의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와 관련을 갖은 흥업구락부(興業具樂部)를 결성하였다. 1926년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이사로 선출되었다. 1927년 1월 이상재, 이승훈 등 28명과 함께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신간회 해소 후 독립운동을 하러 1933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임시정부가 전 해에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로 멀리 떠나 이동 중이어서 귀국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신흥우·윤치호·장덕수·유억겸·안재홍·구자옥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일제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전면 전쟁이 시작되자, 한국인을 전쟁에 총동원하기 위한 탄압과 예비검속을 자행한 것이었다.

일제는 흥업구락부가 1925년 창립 후 성금을 모금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와 하와이 이승만에게 송금한 것까지 모두 들춰내어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결국 51명의 동지들과 함께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7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고, 윤치호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친일의혹논쟁’에 휩쓸렸다. 1980년 박창암이 애국지사 조경한(趙擎韓)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일제 ‘밀정’의 의혹이 있었다고 잡지 『자유』에 고발 기사를 쓴 것이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조선총독부 경무국 촉탁과 미쓰비시주식회사 만주 신경(新京)출장소장 등으로 활동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SBS가 2005년 3·1절 특집으로 이 문제를 정밀 조사하고 취재한 바, 친일 의혹은 증거가 없고, 일제 패망 때까지 일제의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감시 대상이었던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발표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 이승만과 동행하여 우익진영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0월 반탁운동을 목적으로 이승만이 조직한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大韓獨立促成中央協議會)에 참가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12월 14일 권동진(權東鎭)을 당수로 추대하고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창당하였다.

1946년에는 우익정당의 통합을 위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국민당(國民黨)과 신한민족당의 ‘3당통합’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이 안재홍(安在鴻)을 제명하자, 분개하여 탈당하였다. 1947년 10월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에 출마해서 당선되어 입법의원을 지냈다. 1948년 3월 5·10 총선거 관리를 위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5월 국민회 소속으로 대구에서 출마하여 제2대 민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6·25전쟁 시기인 1951년 5월 부산 피난지에서 제2대 국회에서 실시한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73표를 얻어 78표를 획득한 김성수에 패배하여 낙선하였다.

1952년 10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시내각의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음 달 야당이 우세한 국회가 인준을 부결하였다. 1953년 이승만의 요청으로 집권당인 자유당의 최고위원과 정무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서 박정희, 김종필 등의 요청을 받고 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3년 건국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를 수여받았다. 1965년 2월 27일 독립운동 유공자단체로서 광복회(光復會)가 창립되자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이 해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재로 추대되었다. 별세 때까지 매해 3·1절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1981년 3월 25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판형3]
이갑성의 출옥 보도(『동아일보』 1922. 5. 6) [판형3]
3·1운동으로 체포된 민족대표에 대한 재판기록철 [판형3]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 1주년 기념 사진(1947. 12,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이갑성) [판형3]

 

⋮신용하⋮

|참고문헌|

『동아일보』, 1922. 5. 6, 1981. 3. 26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유신사, 192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2, 1966 ; 정세현, 『항일학생민족운동사연구』, 일지사, 1975 ; 송남헌, 『한국현대정치사』 1, 성문각, 1980 ; 신용하, 『개정증보 한국근대민족운동사연구』, 일조각,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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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으로 체포된 민족대표에 대한 재판기록철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 1주년 기념 사진(1947. 12,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이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