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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유여대 劉如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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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유여대
한자명 劉如大
본 관  
이 명 호 낙포(樂圃)
출신지 평북 의주(義州)
생몰년월일 1878. 공훈록은 11. 26인데 양음력의 차이인지 확인 필요〈/P〉12. 10 ~ 1937. 1. 13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양실학원(養實學院)
관련 사건 3.1운동
주요 활동 의주 최초의 신교육 기관 일신학교(日新學校), 의신소학교, 여자교육기관 기독교 양실학원 설립, 1919년 3월 민족대표, 의주 독립만세운동 지도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78년 12월 10일 평북 의주군 주내면(州內面) 서호동(西湖洞)에서 부친 유택현(劉澤賢)과 모친 윤치현(尹致賢)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호는 낙포(樂圃)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어릴 때부터 만년에 이르도록 효성이 지극하여 두 번이나 효자문(孝子門)을 받았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의주까지 전쟁터로 변하자 피난하였다. 이듬해 피난에서 돌아와 자기 집에 한문 서당을 차리고 교육을 시작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유이학(劉理學)이라고까지 불렸는데, 1898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휘트모어(N. C. Whittemore, 魏大模)를 만나 의주서교회(義州西敎會)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899년 휘트모어, 장유관(張有寬), 김창건(金昌健) 등과 함께 의주 최초의 신교육 기관인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고 한문교사가 되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근대 교육을 하였다.

1902년 의신소학교, 1905년 여자교육기관으로서 기독교 양실학원(養實學院)을 설립하였다. 1908년 이들을 양실학원으로 통합하고 심상소학부(4년), 고등소학부(3년), 중학부(3년)의 과정을 두었다.

1907년 서교회에서 동교회가 분립되자, 동교회에 참석하여 장로 예비직인 영수로 시무하다가 후에 장로가 되었다. 수년간 송장면(松長面), 수진면(水鎭面) 등지를 순회하며 기독교 전파와 야학운동에 힘을 쏟았다. 191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목사 안수를 받은 뒤 교인 3백 명의 의주 동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1917년 9월 평북노회 총대로서 제6회 조선장로회 총회에 참석하여 안식년 휴가 중인 휘트모어 선교사 대리로 학무위원을 맡았다. 1918년 11월 평북노회에서 의산노회(義山老會)가 분립될 때, 창립총회에서 부회계로 선임되었다.

1919년 2월 6~7일경 상하이(上海)에 있던 선우혁(鮮于赫)이 국내에 파견되어 의주 출신의 선천 천북교회 목사 양전백(梁甸伯)을 만나 독립운동을 촉구하였다. 2월 12일 의산노회 회계 일로 선천에서 열린 평북노회에 참석하여 양전백, 김병조(金秉祚), 이승훈(李昇薰), 이명룡(李明龍) 등을 만났다. 이들은 양전백의 자택에서 해외 정세와 독립선언 문제를 상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민족대표의 일원이 되는 것을 승낙하고 이승훈에게 인장을 맡겼다.

2월 17~18일경 의주 서부면 한 여관에서 양실학교 교사 정명채(鄭明采)와 김두칠(金斗七)을 만나 독립선언 운동에 찬동을 얻어냈다. 2월 27일 선천군 덕원면 덕흥교회 영수 조형균(趙衡均)이 와서 서울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그 지시는 독립선언은 3월 1일 서울과 각 지방에서 발표하기로 되었으므로 의주에서도 이날을 기하여 서울에서 보내 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2월 28일 밤까지 서울에서 보내오기로 한 독립선언서가 도착하지 않았다. 이에 당일 밤 9시 양실학교 사무실로 뜻을 같이 하는 20여 명을 소집하여 따로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려 하였다. 그때 신영상(申永祥)이 동경유학생들의 『2 · 8독립선언서』를 내놓았다. 김두칠, 정명채, 안석응(安碩應)은 서부동 김두칠이 머물고 있던 여관방인 정신환(鄭信煥)의 집에서 밤을 새워 『2 · 8독립선언서』와 『독립가』 약 3백 매, 작은 태극기 약 120~130매를 등사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일 아침 이원익(李元益), 김창수(金昌洙) 등에게 지시하여 평북도청과 경찰부 등 시내 관공서에 『2 · 8독립선언서』를 배부하도록 하였다. 안응석에게는 학교 교사들에게 학생들을 통해 선언서 배부와 당일 교회 공터에 모이도록 연락하라고 지시하였다. 서울보다 30분 늦은 오후 2시 30분 의주 서교회 공터에 양실학교 학생 100명을 포함하여 800명의 군중이 모였다. 독립선언식은 교회집회 형식으로 시작되었다. 큰 태극기 두 개를 앞에 세운 가운데 찬미가를 부르고, 안동현의 목사 김병직(金炳稷)이 기도를 하였다.

이어 자체 제작한 『2 · 8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낭독하였다. 이때 선천에서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 약 200매가 도착하였다. 이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일동이 독립가를 부른 뒤 교회 영수 황대벽(黃大闢)과 조사 김이순(金利淳)이 선언서에 기초하여 연설을 하였다.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높이 부른 후 의주성 안팎으로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이때 군중에게 일본 관헌에게 구타를 당하더라도 저항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었다. 일동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가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는데 일본 헌병대가 달려와서 해산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군중의 수가 점점 불어나 1,600명에 이르자 일본 헌병대는 기세에 눌려 길 좌우를 경계하다가 행진이 끝난 다음 지도부 10여 명을 검거하였다. 의주 만세시위는 전국에서 가장 치열한 시위 중 하나가 되었다.

헌병대에 체포된 후 3월 7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 검사국에서 취조를 받았고, 서울의 민족대표와 함께 경성지방법원에 기소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판결 확정까지 무려 1년 8개월이 걸렸으나, 미결구류일수 중 360일만 형기에 산입되어 결국 2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16일 경성감옥에서 출옥하며 “모든 자유를 빼앗긴 옥중 생활을 하여보니까 더욱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 깊었으며 (중략) 우리는 오직 가장 정의 인도라고 생각하는 일은 위하여 힘을 쓸 뿐”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다시 의주 동교회로 돌아와 목회를 하는 한편, 3 · 1운동 때 폐쇄되었던 양실학교 재건을 위해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기부금을 모집하였다.

1925년 2월 제13회 의산노회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1926년 10월 25일부터 29일까지 의주 동교회에서 3 · 1운동 동지인 김두칠 등과 강연회를 열고 ‘인물(人物)의 우승(優勝)은 교육의 필요’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는 등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강조하였다. 1931년 영수와 장로, 조사시절을 거쳐 목사에 이르기까지 20여년간 시무하던 의주 동교회를 사임하고, 신의주로 이주하여 백마교회 목사로 취임하였다. 교회가 날로 발전함에 교회당을 신축하는 등 동분서주하였다.

출옥 후 위가 좋지 않아 줄곧 죽을 먹어야 했으며, 1934년 57세에 병을 얻었다. 교회 일을 사직하고 휴양생활에 들어갔다. 휴양기간 중에도 한글, 한자, 일본어와 각종 서식 작성법, 상식을 설명한 『면무식(免無識)』(1935)을 저술하였다. 이후 동서고금 위인들을 소개한 『위인기담(偉人奇談)』(1935), 설교를 모은 『강도예전(講道例傳)』, 『강대지남(講臺指南)』과 『한문자습』, 『성경독본』 등을 저술하였다.

이 책들을 수레에 싣고 여러 교회를 다니며 팔아 교회 건축에 보태었다. 그중에서도 『면무식』은 초판이 반년도 안돼 절판되어 1936년 2월 증보 재판을 찍었다. 그 수익금을 고아들을 위해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1937년 1월 13일 별세하여 신의주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일제강점기 평양신학교 [판형3]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판형3]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20. 10. 30) [판형3]
유여대 출옥 보도(『매일신보』 1921. 11. 7) [판형3]
『위인기담(偉人奇談)』 [판형3]

 

 

⋮이정은⋮

|참고문헌|

『독립신문』(대한민국임시정부) ; 『동아일보』 ;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제1권, 도쿄 : 원서방, 196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3.1운동 재판기록),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2(3.1운동),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1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2, 1990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27,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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