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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유관순 柳寬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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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유관순
한자명 柳寬順
본 관 고흥
이 명 冠順
출신지 충남 천안
생몰년월일 1902. 12. 16 ~ 1920. 9. 28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1919년 4월 1일 천안군 갈전면 만세운동
주요 활동 1919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생으로 3월 1일 서울 만세시위에 참여, 4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만세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대한민국장(2019)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동면(東面) 용두리(龍頭里, 속칭 지령지, 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에 3남 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흥(高興)이고 한자가 다른 이명은 유관순(柳冠順)이었다.

1915년경 공주에 감리교 여선교사로 있던 앨리스 제이 햄몬드(Alice J. Hammond Sharp)의 추천으로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와 함께 이화학당 보통과 교비생(장학생)으로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하였다. 앨리스는 1900년에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감리교 목사 로버트 아더 샤프(Robert Arthur Sharp)와 결혼하여 앨리스 햄몬드 샤프 부인이 되었으며, 한국이름으로 사애리시(史愛理施), 또는 ‘사부인’으로 불렸다. 샤프 여사는 여성교육에 열정이 많았기에 충남 지역 소녀들 여럿을 이화학당에 추천하여 공부하게 했었다. 1918년 3월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4월 1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진학하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하였다. 탑골공원에서 시위행진을 시작한 학생과 시민들은 덕수궁 뒤 이화학당 교문 앞에 이르러 이화학당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이화 학생들은 교문으로 달려 나갔으나 프라이 교장과 교직원들이 학생들의 시위참여를 막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위참여를 포기하였지만, 네 명의 친구들과 함께 뒷담을 넘어 거리로 나가 만세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3월 5일 남대문역(南大門驛, 현 서울역) 앞 학생단 시위 때도 참여했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어 있던 중 이화학당 당국이 교섭하여 다른 학생들과 같이 풀려났다. 이후 학교가 휴교하자 3월 13일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튿날인 3월 14일 고향 동리에서 약 10km 떨어진 목천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 200여 명의 만세시위가 있었으나 곧 일제 헌병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고향 동리는 그때까지도 잠잠했다.

졸업반이었던 유예도는 선배들로부터 독립자금 모금 사명을 받았다. 가난한 시골 고향에는 돈이 없었다. 부형들은 차라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아버지 유중권, 지령리 감리교회 교사인 숙부 유중무(柳重武), 이웃 조인원(趙仁元, 조병옥 부친) 등이 나섰다. 이들은 4월 1일(음력 3월 1일)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했다.

이에 호응하여 머리에 수건을 쓰고 인근 지역을 돌며 유림대표와 큰 가문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적극 설득하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시위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31일 밤에는 인근 각지의 지사들에게 다음날의 거사를 알리기 위해 집 뒤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렸다. 멀고 가까운 24군데 산봉우리에서 호응하는 횃불이 타올랐다.

1919년 4월 1일 오후 1시 병천 아우내 장터에는 약 3천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갈전면(葛田面)은 물론이고, 서쪽의 목천면(木川面)과 북면(北面), 남쪽의 성남면(城南面)과 수신면(修身面) 방면, 동쪽의 동면과 진천군(鎭川郡) 등 각 방면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아우내 장터에 갈 때 옷 속에 자신이 만든 태극기들을 감추고 갔다. 지령리가 총본부 격으로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숙부 유중무와 조인원 등과 함께 앞장섰다.

성남면과 수신면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서 독자적으로 만세시위를 하다 지령리 본부와 연락이 되어 연합시위를 벌이기 위해 이날 아우내장터로 모여 들었다. 아우내장터로 들어오는 세 방향의 길목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장터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오후 1시 시장 한가운데에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세우고, 조인원이 쌀가게 앞에 쌓아 놓은 쌀가마니 위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온 군중이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소리는 산천을 뒤흔들며 메아리쳤다.

시위 행진이 시작되었다. 유중권·유중무·조인원 등의 지도자들과 함께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열 앞에 섰다. 장터에서 약 30미터 거리에 헌병 주재소가 있었다. 주재소장 고야마(小山)는 진상부(溱相部) 헌병 상등병과 보조원 1명을 이끌고 현장으로 출동하면서 보조원 정수영·맹성호에게 발포 준비를 시켰다.

이에 군중들이 다시 돌아서 우렁찬 소리로 ‘독립만세’를 일제히 외쳤다. 그러자 일제 헌병이 조인원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조인원의 심장 옆 반치 거리를 꿰뚫고 들어갔고, 다시 총검에 왼팔을 찔려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일본군의 총격과 총검에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여러 사람이 중상을 입거나 사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시 만세시위대가 흩어졌다.

잠시후 다른 만세시위 참가자들과 함께 사망자들의 시신을 주재소로 운구하고 헌병들에게 항의하러 갔다. 숙부 유중무는 빈사 상태인 유중권을 업고 주재소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이때, 주재소장과 한국인 헌병보조원들에게 “자신의 나라를 되찾으려고 하는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를 사용하여 민족을 죽이느냐”고 항의하였다.

오후 4시경 천안철도엄호대의 키네(甲) 대위 이하 6명이 자동차를 타고 병천으로 급히 달려왔다. 지원병의 무차별 발포로 다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김구응(金球應)과 그의 어머니 최정철(崔貞徹)이 일본군이 쏜 총에 맞고 쓰러진 후 총검으로 마구 찔려 모자가 한 자리에서 참혹하게 숨졌다. 이날 유중권, 이소재 등 19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처럼 상황이 악화되자 이웃의 강력한 권고를 듣고 어쩔 수 없이 몸을 피하게 되었다. 이후 정확히 언제 체포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피신하여 다른 지역에서 시위운동을 계속하다 동생들이 걱정되어 집에 왔다 붙잡혔다는 기사가 있다.

공주지방법원의 1심 재판에서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하며 논리정연하고 당당하게 대항하였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유중무·조인원 등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같은 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1심 판결이 지나치게 과중한 징벌이라며 항소 이유를 인정하고 원심을 취소하여 징역 3년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시 최종심인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그러나 “삼천리 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상고를 포기했다고 전한다.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이후 계속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 많은 고문을 당하였다.

감옥 안에서 함께 옥살이를 했던 어윤희(魚允姬)는 유관순이 배고픔, 외로움, 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슬퍼했으며,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1920년 3월 1일 만세운동 1주년을 맞자 또다시 감옥 안에서 독립만세를 선도하였다. 이때 다시 많은 고문을 받아 방광이 파열되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 왕실의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이방자)와의 결혼식이 있자 일제는 만세운동 참가자들에 대해 사면령을 발표하였다. 이에 형기의 절반인 1년 6월로 감형을 받게 되었다. 미결기간을 감안하여 빠르면 1920년 10월, 아니면 1921년 1월초에는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감옥 당국은 중죄인이라고 하여 허리에 찔린 상처, 고문으로 파열된 방광도 치료해 주지 않고 방치하여 건강히 악화되었다. 마지막 이화학당 교사들과 오빠가 면회했을 때는 살이 썩어가고 있었다.

결국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감옥 안에서 숨졌다.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가족 외에 같은 반 학생 몇 명만 참석이 허락된 가운데 쓸쓸히 진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무덤은 얼마 후 일제 군용기지 확장으로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무연고묘로 파헤쳐진 후 유골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광복이 되자 1946년 3월 유관순 영화가 제작되어 상영되었으며, 1947년 9월 유관순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1967년 지령리에 유관순 기념교회가 건립되었으며, 1969년 4월에는 탑원리에 유관순 사우 부지를 매입하고 1972년 10월에 추모각을 완공하였다. 2002년 유관순 열사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 사우 내에 유관순열사기념관을 착공하여 이듬해 개관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화학당 시절 유관순(뒷줄 맨 오른쪽이 유관순) [판형3]
아우내장터 만세시위지(충청남도 천안) [판형3]
유관순 생가(충청남도 천안) [판형3]
아우내장터 만세시위 관련 보도(『신한민보』 1919. 9. 2) [판형3]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판형3]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 6. 30) [판형3]

 

⋮이정은⋮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19. 6. 30 ; 『대한매일신보』 ; 『황성신문』 ; 『매일신보』 ; 『조선일보』 ; 『동아일보』 ; 『한국일보』 ; 『서울신문』 ; 『감리교연회록』, 1908 ; 『신동아』, 1965. 3 ;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칠십년사』, 195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유제한, 「순국처녀 유관순」(미간행 원고) ; 유중영, 「고흥 유민기 자(字) 성배(聖培)씨 약사」(미간행 원고) ; 박화성, 『타오르는 별-유관순의 일생』, 세운문화사, 1972 ; 趙炳玉, 『나의 回顧錄』, 해룡, 1986 ; 이화여자고등학교, 『李花百年史』, 1994 ; 3·1여성동지회, 『3·1여성』 16, 1997 ; 이정은, 『유관순, 불꽃같은 삶』,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 이정은, 『유관순, 3·1운동의 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0.
  • 유관순
  • 유관순 생가(충청남도 천안)
  • 아우내장터 만세시위 관련 보도(『신한민보』 1919. 9. 2)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 6. 30)
  • 이화학당 시절 유관순(뒷줄 맨 오른쪽이 유관순)
  • 아우내장터 만세시위지(충청남도 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