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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양전백 梁甸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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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양전백
한자명 梁甸伯
본 관 남원(南原)
이 명 양섭(梁燮), 호 : 격헌(格軒)
출신지 평북 선천
생몰년월일 1869. 3. 10 ~ 1933. 1. 17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신민회
관련 사건 105인사건, 3.1운동
주요 활동 1911년 105인사건으로 3년 옥고,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 3년 옥고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69년 (음)3월 10일 평안북도 의주군 고관면(古館面) 상고동(上古洞)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본명은 양섭(梁燮), 자는 전백(甸伯)인데 자로 더 많이 알려졌다. 호는 격헌(格軒)이며 조선 전기 문신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의 21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증조부에게 한문을 배웠다. 9세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관면 관동(館洞)으로 이주했다가 14세 때 가세가 더욱 기울어지면서 구성군(龜城郡) 천마면(天摩面) 조림동 산골 마을로 이주하였다. 그런 중에도 한학 공부를 계속하여 15세 때 시부(詩賦)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18세 때 의주군 송장면(松長面)의 유학자 전서(顚西) 이정노(李挺魯)의 경의재(經義齋)에 들어가 1년간 수학하였다. 19세 때 고향 조림동으로 돌아와 박영신(朴永信)과 결혼하여 슬하에 5남 5녀를 두었다.

결혼 후 조림동에 서당을 세우고 훈장 일을 시작한 지 3년 만인 1892년, 인근 구성군 사기면(沙器面) 신시(新市)에 살던 친구 김관근(金灌根)로부터 기독교 전도를 받았다. 처음엔 거부했지만 “서울 구경 가자”는 김관근 말에 1892년 가을 상경하여 정동 장로교회(현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도사경회(都査經會)에 참석한 후부터 고향 서당에서 유교 경전과 함께 성경을 가르쳤다. 그리고 김관근이 설립한 신시교회 학당 교사로 청빙을 받아 신시로 주거를 옮겼고 1894년 청일전쟁을 겪은 직후 평양(平壤)의 마펫(S.A. Moffett) 선교사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권서(勸書)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기독교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1896년 평안북도 지역 선교를 담당하게 된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휘트모어(N.C. Whittemore)의 조사(助事)가 되어 선천(宣川)으로 옮긴 후 선천읍교회(후의 선천북교회)를 설립했고 인근 강계(江界)·철산(鐵山)·정주(定州)·삭주(朔州)·곽산(郭山)·의주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펼쳤다. 1902년 2월 평북지역에서는 최초로 장로가 되었고 마펫이 운영하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07년 제1회로 졸업하였다.

그해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한국 장로교회 최초 7인 목사 중 1인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2년간 평북 일대와 중국 지안현(輯安縣)·퉁화현(通化縣)·화이런현(懷仁縣) 지방 순행목사로 활동하다가 1909년부터 선천읍교회를 담임하였다. 선천에 교세가 급증하여 1911년 선천남교회를 분립시켰고 그 때부터 선천읍교회는 선천북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선천북교회 목회 외에 1905년 신성중학교와 1907년 보성여학교를 설립하여 신앙교육과 민족주의 계몽교육을 병행해서 전개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선천 뿐 아니라 평북(서북) 일대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겪었다. 즉 1911년 11월, 강규찬(姜奎燦)·선우혁(鮮于赫)·장시욱(張時郁)·길진형(吉鎭亨)·양준명(梁濬明) 등 신성중학교 교사와 학생 십수 명이 데라우치(寺内正毅)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면서 시작된 105인사건의 주요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붙잡혔다.

옥중에서 호된 고문과 악형을 받고 이승훈(李昇薰)·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이른바 모살미수(謀殺未遂)로 재판에 회부되어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받았지만,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과 같은 해 10월 9일 고등법원 판결에서 무죄를 받고 풀려났다. 옥고를 겪고 석방된 후 선천에 돌아와 교인들 앞에서 “연약한 육신을 가진 나는 재감(在監) 중 통초(痛楚)를 이기지 못하여 하지 않은 일을 하였다고 입으로 거짓말을 하였으니 주의 교단에 설 수 없다.”며 목사직에서 물러날 것을 천명했으나 교인들은 오히려 적극 지지를 표하였고, 1914년 평북노회장을 거쳐 1916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2월 6~7일경 중국 상하이(上海)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파견한 선우혁이 선천에 왔을 때 그를 자기 교회 사택에 묶게 하였으며 마침 선천에서 열리고 있던 평북노회 도사경회에 참석 중이던 이승훈·유여대(劉如大)·이명룡(李明龍)·김병조(金秉祚) 등 평북노회 소속 목사와 장로들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대비한 해외 독립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이승훈·이명룡·함태영(咸台永) 등을 통해 서울과 평양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하는 한편 선천북교회 조사 백시찬(白時瓚)과 선천남교회 김석창(金錫昌) 목사, 그리고 신성중학교 교사 홍성익(洪成益)·김지웅(金志雄) 등과 회합하면서 선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2월 26일경 “서울로 올라오라.”는 이승훈의 편지를 받고 선천을 출발, 2월 28일 저녁 9시에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하여 봉래동 신행여관에서 1박한 후 3월 1일 오전 9시 남대문교회 함태영을 만나 독립선언식 장소가 태화관(泰和館)으로 바뀐 사실을 알고 오후 1시 종로에서 이승훈을 만나 함께 독립선언식장에 참석하였다.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선언식 현장에서 붙잡힌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19년 7월 28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총독정치에 대한 불평을 품고 있는가?”라는 판사의 질문에 “교육정도가 저하하고 조선인의 대우가 일본인과 같지 않고 동일한 지위에 있다 하여도 아래 두는 것이 불평이며 기타도 다소 불평이 있으나 말하지 않겠다.”고 답하였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를 받았다.

1920년 9월 21일 열린 경성복심법원에서는 판사 앞에서 “십년간의 무단정치에 조선 사람에게 대하여는 여러 가지 대고통이 있었소. 조선 민족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는 미국 대통령의 말에 의하여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오. 일본이 ‘체코’ 민족에게 대한 태도를 보아서도 조선은 당연히 독립케 할 줄로 알았다”고 진술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1년 11월 4일 공덕리(孔德里) 경성감옥에서 풀려났다.

3개월 후인 1922년 2월 6일 선천북교회에서 ‘양전백 목사 포교 27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는데 실상은 독립운동에 관여하여 두 차례 옥고를 겪고 나온 것에 대한 지역 사회와 기독교인들의 위로와 치하를 담은 것이었다.

1925년 2월에는 교역 30주년을 맞아 선천시내 기독교 및 사회 유지들이 “양전백 목사와 그 가족을 영구히 부양할” 목적으로 ‘양전백목사부양회(梁甸伯牧師扶養會)’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후 선천북교회를 계속 담임하였는데 매 주일 설교를 듣는 남녀 교인수가 1천 6백 명이 넘었다. 또한 선천 기독교청년회 YMCA 설립과 활동을 지원하였고 1898년 선천읍교회 부속학교로 설립했다가 ‘강제 합병’ 직후 폐쇄되었던 명신학교를 1926년 복원하여 민족계몽운동을 지속했다.

1927년 6월 서울 피어선성경학원에서 진행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사기(史記) 편찬 작업에 참석했다가 급성 질환에 걸려 치료를 받고 회생하였으나 1929년에 그 병이 재발하여 결국 3년 투병 생활 끝에 1933년 1월 17일 선천읍 북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1933년 1월 21일 남궁혁(南宮赫) 박사 집례 하에 기독교연합회장으로 엄수되었고 유해는 선천 교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40여 년 목회하는 동안 세례를 준 자가 3천 명이 넘었고 평생 전도한 거리를 합하면 12만여 리에 해당하였다.

한국 개신교 최초 성서어휘사전이라 할 수 있는 『신약성서전림(新約聖書典林, 東洋書院, 1912)』의 번역, 교열에 참여하였고 글로 남긴 설교로는 초교파 기독교 언론지 『기독신보』에 실린 「자유(自由, 1925.4.15)」와 「신사(信者) 는 그리스도를 입을 것(1926.1.20)」, 「엘리야(以利亞)의 사상(思想)과 여호와(耶和華)의 명령(命令, 1926.10.27)」, 「신년(新年)의 요구(要求, 1927.1.26)」, 「도세(度世)의 대방(大方, 1927.8.17)」 등이 있다. 1927년 6월 『동아일보』가 선정한 “조선의 자랑, 사계(斯界)의 중진(重鎭)”에 ‘교육공로자’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판형3]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사진(1907. 뒷줄 맨오른쪽이 양전백) [판형3]
1911년 압송되고 있는 신민회 105인사건 관련자 사진(1911) [판형3]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20. 10. 30) [판형3]
양전백 목사 사망 보도(『동아일보』 1933. 1. 19) [판형3]

 

⋮이덕주⋮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20. 10. 30 ; 국사편찬위원회 편,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1~4· 11~27, 1986·1990~1996 ; 『게자씨』 6권 9호, 1937. 9 ; 『기독신보, 1933. 1. 25 ; 『神學指南』 15권 2호 1933. 3 ; 吳在植 編, 『民族代表 三十三人傳』, 동방문화사, 1959 ;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백과사전』 11, 기독교문사, 1984 ; 이덕주, 『새로 쓴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개종 이야기』,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 윤경로, 『105인사건과 신민회 연구』, 한성대학교 출판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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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20. 10. 30)
  • 양전백 목사 사망 보도(『동아일보』 1933. 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