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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신홍식 申洪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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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신홍식
한자명 申洪植
본 관 고령(高靈)
이 명 신홍식(申弘植), 호 : 동오(東吾)
출신지 충북 청주
생몰년월일 1872. 3. 1 ~ 1939. 3. 18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민족대표 흥업구락부, 적극신앙단
관련 사건 1919년 만세운동, 흥업구락부사건
주요 활동 1919년 만세운동 「독립선언서」 서명, 1920~30년대 민족계몽운동 참여, 흥업구락부 활동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72년 3월 1일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문의면(文義面)  문산리(文山里)에서 아버지 신기우(申驥雨)와 어머니 경주(慶州) 최씨(崔氏) 살랍(撒拉)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동오(東吾), 초명은 홍식(弘植)이다.

전통 유교 선비가문에서 출생하였는데 조부 신용휴(申用休)는 1867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875년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에 제수되었고 1882년 돈녕부(敦寧府) 부호군(副護軍),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태극도』·『사물예도』·『유선악보』·『동국의복고증』 등 저술을 남겼다.

한학을 공부하여 13세 때 시율을 지을 정도가 되었고, 16세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능통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한 때 방황하다가 1891년 전주(全州) 이씨(李氏)와 결혼한 후 마음을 잡고 과거시험 준비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이후 사회·정치적 혼란이 심화되면서 출세의 기회가 소멸되자 불안과 불만에 사로잡혀 ‘약주창기(藥酒娼妓)’의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결국 가정불화로 이씨 부인과 이혼하고 1901년 6월 청주군 남일면 김해(金海) 김씨(金氏) 원백(元伯)의 딸 이백가(利百加)(기독교 세례명 ‘리브가’의 한자 음역)와 재혼하였다. 슬하에 2남(大浩)·(昌浩) 3녀(愛羅)·(翰羅)·(世羅)를 두었다.

재혼 후에도 한 동안 정신적 방황을 계속하다가 1904년 청주읍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기독교를 통해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할 생각에서 교회에 출석하였으나 성경을 읽는 중에 ‘참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906년 미 감리회 선교사 스웨어러(W).(C). (Swearer)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직후 보은(報恩)구역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이후 1909년 직산(稷山)구역, 1912년 입장(笠場)과 목천(木川)구역, 1913년 직산 및 진천(鎭川)구역을 담임하였다.

1913년 감리교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14년 연기(燕岐)구역 담임자가 되었다. 1915년 1월 아산(牙山) 구미동교회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성령체험을 하였고 이후 공주동지방 순행목사로 사역하다가 1916년 공주읍(公州邑)교회를 거쳐 1917년 6월부터 평양(平壤) 남산현(南山峴)교회을 담임하던 중 그곳에서 만세운동을 맞았다.

평양 만세운동은 1919년 2월 초 중국 상하이(上海)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파견한 선우혁(鮮于爀)이 평양을 방문해서 장대현(章臺峴)교회의 길선주(吉善宙) 목사와 예수교서원 총무 안세환(安世桓)을 만나 파리강화회담 소식을 전한 것으로 시작해서 2월 15일 경, 이승훈(李昇薰)이 서울로 올라가던 중 평양에 들러 기홀병원(紀笏病院)에 위장 입원하고 평양지역 장로교와 감리교 지도자들과 접촉함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승훈은 장로교 대표로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목사를 만났고 감리교 대표로 그 무렵 평양에 내려와 있던 손정도(孫貞道) 목사를 만나 민족대표로 참가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손정도 목사는 별도로 의친왕(義親王) 망명을 추진하기 위해 중국으로 갈 계획이 있어 참여하기 어렵다며 대신 소개받았다. 이에 기홀병원에서 이승훈을 만나 그동안 선천(宣川)과 서울에서 진행된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뜻을 정하였다.

1919년 2월 19일 서울로 올라와 2월 20일 저녁 수창동(壽昌洞) 박희도(朴熙道) 집에서 이승훈·정춘수(鄭春洙)·오화영(吳華英)·오기선(吳基善) 등과 만나 천도교와 합작문제, 운동 방법론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2월 21일 그동안 별개로 진행되던 감리교와 장로교 대표들의 연합모임이 이루어져 오후 2시 함태영(咸台永) 집에서 오기선·박희도·현순(玄楯)·오화영(이상 감리교), 이승훈·이갑성(李甲成)·안세환·오상근(吳尙根)·함태영(이상 장로교) 등이 회합하였고, 그 날 저녁 7시에 남대문 세브란스병원 이갑성 사택에서 현순·오화영·오기선·김세환(金世煥)·이승훈·함태영·안세환·이갑성 등과 회합하였다.

2월 21일의 두 차례 기독교 대표자들 모임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운동방법론과 역할 분담이 논의되었는데 평양과 평남지역 지지세력 확보책임을 맡았다.

사흘간의 서울 회합을 마치고 2월 22일 평양에 귀환한 뒤 동지를 규합하고 평양지역 독립선언식과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우선 자신이 담임하는 남산현교회 부담임 박석훈(朴錫薰) 목사를 비롯하여 이향리(履鄕里)교회 김찬흥(金燦興) 목사와 채관리(釵貫里)교회 주기원(周基元) 목사, 박구리(礡九里)교회 송득후(宋得冔) 목사, 그리고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교사 박현숙(朴賢淑), 광성고등보통학교(光成高等普通學校) 교사 홍환섭(洪環燮), 평양유치원 교사 한국보(韓國輔)와 김연실(金蓮實) 등과 연락을 취하며 독립선언서 인쇄와 태극기 제작 등 평양지역 감리교 만세시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 서울을 다녀온 안세환을 통해 독립선언식이 3월 1일로 확정된 사실을 비롯하여 그동안 서울에서 진행된 독립선언식 준비상황을 전달받고 중화읍(中和邑)교회 이창주(李昌周) 전도사를 통해 독립선언서에 날인할 도장을 서울의 박희도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길선주 목사와 안세환·윤원삼(尹愿三)·강규찬(姜奎燦)·이덕환(李德煥) 등 장로교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하며 평양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는데 서울과 같은 3월 1일 오후 1시에 거사하되 장로교회는 관후리(館後里) 숭덕학교(崇德學校), 감리교회는 수옥리(水玉里) 남산현교회에서 별도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평양 시내에서 합류하여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한편 평양 외에 다른 지역 만세운동에도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2월 25일 평양에서 남산현교회 출신으로 진남포(鎭南浦)교회 삼숭학교(三崇學校) 교장으로 있던 홍기황(洪基璜)을 만나 진남포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고 그 결과 3월 1일 진남포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1916년 공주읍 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한 경력을 바탕으로 2월 21일 서울 회합에 참석하여 전북 지역 책임자로 선정된 『기독신보(基督申報)』 주필 김필수(金弼秀) 목사에게 공주읍교회 현석칠(玄錫七) 목사와 오익표(吳翼杓) 전도사,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 김수철(金洙喆)과 김관회(金寬會)·김사현(金士賢)·이규상(李圭尙) 등을 소개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김필수 목사는 전주로 가는 길에 공주에 들러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정보를 전하였고, 그 결과 3월 7일 공주 앵산공원(櫻山公園) 만세시위와 4월 1일 공주 장날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처럼 평양에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 준비를 마친 뒤 2월 28일 새벽 서울에서 열릴 독립선언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 편으로 평양을 떠나 그 날 아침 서울에 도착, 정동(貞洞)교회에서 같은 ‘미감리회 소속 목회자’들로 민족대표로 참여한 박희도와 이필주(李弼柱)·최성모(崔聖模) 등과 회합하였고 그 날 저녁 7시 재동(齋洞) 손병희(孫秉熙) 집에서 모인 민족대표자 회합에 참석했다.

그 모임에서 결정된 대로 3월 1일 오후 2시 변경된 거사 장소, 태화관(太和館) ‘별유천지(別有天地) 6호실’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다. 곧바로 다른 참석자들과 함께 경무총감부에 연행되었다. 그 시각 평양에서도 예정대로 남산현교회에서 고종(高宗)황제 봉도식을 겸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고 선언식을 마친 교인들이 밤늦게까지 만세시위를 벌였다.

평양 만세운동을 지휘했던 박석훈 목사는 시위 직후 경찰에 연행되었고 옥중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앓다가 결국 1919년 11월 15일 옥중 사망하였다.

3월 1일 서울 경무총감부에 연행된 후 이루어진 경찰과 검찰, 판사 신문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동기와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이후 미결수로 있던 기간까지 포함하여 2년 8개월 옥고를 치른 후 1921년 11월 4일 마포(麻浦) 경성감옥에서 석방되었는데 투옥 생활을 하는 동안 평양 남산현교회 교인들은 여전히 가족들을 목사 사택에 머물게 하고 생활비를 대 주었다.

이후 평양에서 3개월 요양한 후 1922년 2월 인천(仁川) 내리(內里)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되어 목회에 복귀하였다. 1925년 서울 기독교청년회 총무였던 신흥우(申興雨)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운동 비밀결사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였다. 이후 1927년 강릉(江陵)지방과 원주(原州)지방 감리사, 1929년 원주구역 담임 및 원주지방 감리사로 사역하였고 1930~34년 감리교 총리원 이사, 1933년 감리교신학교 이사, 1934년 『기독신보』 이사 등을 역임했다.

또한 기독교청년회(YMCA)와 엡윗청년회와 같은 기독교 청년운동 단체들과 긴밀한 연관을 맺으며 개량적 민족주의 노선의 사회운동인 절제운동과 농촌운동·야학운동·계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35년 4월 건강을 이유로 자원 은퇴한 후 원주에 잠시 머물다가 1937년 고향 청주로 낙향하여 청주군 가덕면(加德面) 인차리(仁次里)에 거처를 마련하고 요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낙향한 지 1년 만인 1938년 여름 서울에서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이 터졌을 때 병약한 몸으로 청주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1927년 강원도로 임지를 옮긴 후에는 흥업구락부 활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지만, 1938년 5월 신흥우·윤치영(尹致暎)·구자옥(具滋玉)·이만규(李萬珪)·홍병선(洪秉璇)·유억겸(兪億兼) 등 흥업구락부 지도부가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흥업구락부 회원 명단이 발견되고 거기 이름을 올린 과거 회원들까지 연행, 조사할 때 고향에서 요양 중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은 것이다. 비록 불기소 처분을 받아 구속은 면했지만 고초를 겪었다.

흥업구락부사건 이후 한층 엄중해진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다가 1939년 3월 18일 인차리 자택에서 향년 67세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인차리 선산에 조성되었다.

인천 내리교회 담임 시절인 1923년 내리교회 역사를 정리한 『인천내리교회역사』를 저술하였고, 1929년 자신의 개종체험과 신앙, 민족계몽운동 방략을 담은 자전적 소설 『장수옹(長壽翁)』(조선예수교서회 발행)을 출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판형3]
1919년 민족대표 독립선언식 기록화 [판형3]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 8. 1) [판형3]
인천남자엡윗청년회 강연회 보도(『동아일보』 1922. 3. 11) [판형3]

 

⋮이덕주⋮

|참고문헌|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국역 고등경찰요사』, 2010)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12, 1990 ; 김교철 편, 『삼일독립운동 민족대표 신홍식 목사 연구자료집』, 인천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 이병헌 편, 『삼일운동비사』,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 고성은, 『신홍식의 생애와 민족목회 활동 연구』, 상원서원, 2012 ; 이덕주, 『독립운동의 요람 남산재 사람들』, 도서출판 그물, 2014. ; 김권정, 「일제하 신홍식의 기독교 민족운동과 사회사상」, 『한국교회사학회지』 18, 한국교회사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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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남자엡윗청년회 강연회 보도(『동아일보』 1922. 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