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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손병희 孫秉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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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손병희
한자명 孫秉熙
본 관 밀양(密陽)
이 명 초명 ; 응구(應九), 개명 : 규동(奎東), 자 : 상현(相鉉), 호 : 소소(笑笑), 도호 : 의암(義菴), 이명 : 이상헌(李祥憲)
출신지 충북 청주(淸州)
생몰년월일 1861. 4. 8 ~ 1922. 5. 19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천도교, 진보회,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 천도구국단
관련 사건 동학농민운동, 3·1운동
주요 활동 1894년 9월 통령으로 동학농민운동 참여, 1905년 12월 천도교 창건, 1912년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 총재, 1917년 천도구국단 명예총재,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포상훈격(연도) 대한민국장(1962)

1861년 4월 8일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북이면(北二面) 대주리(大舟里, 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서 아버지 손두흥(孫斗興)과 어머니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상현(相鉉), 호는 소소(笑笑)이다. 초명은 응구(應九), 개명은 규동(奎東), 천도교에서 사용하는 도호(道號)는 의암(義菴), 이명은 이상헌(李祥憲)이다. 동생 손병흠(孫秉欽)도 동학에 입도하여 일생을 함께 하였다. 딸 셋을 두었는데 첫째 사위는 1919년 만세운동 민족대표

인 이종훈(李鍾勳)의 장남 이관영(李觀泳), 둘째 사위는 정광조(鄭廣朝), 셋째 사위는 소파 방정환(方定煥)이다.

재가녀의 자식으로 태어나 서자로 차별을 받게 되자,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하는 의식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왔으며, 호방한 기질과 의리도 남달리 뛰어났다. 결혼 후에도 서자 취급을 받으며 가족 제사를 같이 지낼 수가 없자 곡괭이로 조상의 묘를 파내려고 한 적도 있었고, 초정약수에서 양반들의 차별에 의협심이 발동하여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1882년 10월 5일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큰조카인 손천민(孫天民)의 권유였으나, 동학 입도를 거절하였다. 두 번째는 동학 접주 서택순(徐宅淳)의 권유였다. 동학의 목적이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 지상천국건설(地上天國建設)에 있다는 것을 알고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하여 스승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을 만난 후 하루 주문 삼만 독(讀)과 짚신 두 켤레 삼는 것을 주 일과로 삼았다. 1884년 최시형과 함께 공주(公州) 가섭사(迦葉寺)에서 49일 수련을 하면서 동학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1892년 동학교단에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공주와 삼례에서 전개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冤運動)에 참가하였다.

1893년 1월 서울 광화문 앞 교조신원운동에서는 소수(疏首)인 박광호(朴光浩)·손천민·박인호(朴寅浩) 등과 함께 책임자로 참가하여 동학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고 호소하였다.

광화문 교조신원운동에서 외세의 침략을 목격한 동학교인들은 이해 3월 10일 충북 보은군 장내리에서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내세우며 척왜양 창의운동(倡義運動)을 전개하였다. 이때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최시형으로부터 충의대접주(忠義大接主)에 임명되었다.

1894년 9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호서동학군(湖西東學軍) 통령(統領)으로 참가하였다. 충북 옥천군(沃川郡) 청산면(靑山面) 문암리(文岩里)에 집결한 동학군을 지휘하여, 논산(論山) 초포에서 전봉준(全琫準)이 지휘하는 호남동학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치른 이인(利仁)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우금치(牛金峙)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논산 황화대(皇華臺)전투를 거쳐 정읍(井邑)까지 후퇴하였다가 다시 북상하여 충북 영동과 보은(報恩) 종곡, 충주(忠州) 무극에서 관군·일본군 연합부대와 싸웠으나 패하였고 자신이 이끌던 동학군을 해산하였다. 이후 관군의 추격을 받았으나 탄압의 손길이 크게 미치지 않는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으로 피신해 지내면서 교세 확장과 포교에 힘썼다.

최시형으로부터 의암(義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피신 생활을 하면서도 최시형을 모시었고, 1897년 12월 24일 동학의 종통을 이어받아 3세 교조가 되었다. 교조가 된 뒤 동학 교단의 내분을 통합하고 풍기(豐基)에서 주요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설법식(設法式)을 거행하여 지도체제를 확립하였다.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동학 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동학농민운동 실패 후 정부로부터 자신에 대한 체포령이 지속되고 동학에 대한 탄압이 수그러들지 않자 세계 사정을 살피고 동학교단 재건 구상을 위해 미국 시찰을 계획하였다.

1901년 동생 손병흠·이용구(李容九)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오사카(大阪)에 머물렀다. 그러나 조선 정부로부터 귀국령과 간신배들의 책동이 잇따르자 그 해에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다. 수개월을 머물면서 미국행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이상헌(李祥憲)이란 가명을 사용하며 오사카·교토(京都)·나라(奈郞)·고베(神戶)·도쿄(東京) 등지에서 이미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사인 박영효(朴泳孝)·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조희연(趙羲淵)·이진호(李軫鎬) 등과 교류하면서 근대 문명을 체험하였다. 일본 생활 중에도 본국과 연락하면서 교세 확장에 노력하였다. 또한 새로운 근대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두 차례에 걸쳐 교인 자제 중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 교토와 도쿄 유학을 주선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교도들에게 진보회(進步會)를 조직케 하여 문명개화운동을 주도하였다. 진보회는 대동회(大同會)·중립회(中立會)를 거쳐 1904년 8월 31일 조직되었으며, 회원이 11만 명에 달하는 큰 단체로 발전하였다. 전국에 390여 개의 지회 조직을 비롯해 30여만 명이 검은 옷(黑衣)을 입고 단발(斷髮)을 실천하는 등 근대문명 수용에 앞장서 사회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진보회가 동학교인들이 조직한 것을 알게 된 정부에서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를 생각해 일본 측과 교섭하여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이로 인해 태천(泰川)의 고치강, 황주·함흥 등지에서 많은 동학교인과 회원들이 참살, 익사 당하였다.

정부로부터 진보회가 탄압을 받자, 송병준(宋秉駿) 등이 조직한 친일단체 유신회(維新會)는 일진회(一進會)로 조직을 개편한 후 진보회를 이끌던 이용구를 매수하여 합동일진회를 조직하였다. 이로써 국내에서 흑의단발을 통해 근대문명을 수용하고자 하였던 혁신운동은 실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학교단은 친일세력이라고 인식되어 함경도 일대에서는 의병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진보회를 조직하고 근대문명 수용을 지휘하면서 언전(言戰)·재전(財戰)·도전(道戰)을 내용으로 하는 『삼전론(三戰論)』을 발표하였으며, 의정대신과 법부대신에게 『비정혁신안(秕政革新案)』을 보내어 정치 개혁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혁신과 일본과의 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여 전승국의 일원으로 독립국을 유지하려던 구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근대 문명을 수용하려던 갑진개화운동도 이용구의 배반으로 동학교단이 친일세력으로 매도되자 교회분석(敎會分析)을 통해 그동안 유지되었던 교정일치(敎政一致) 대신 교정분리(敎政分離)를 선언하였다.

1905년 12월 1일 『제국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 국내 언론을 통해 그동안 불리던 ‘동학’이 ‘천도교’로 바뀌었음을 널리 알렸으며, 1906년 1월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2월 16일에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공포하고 서울의 다동(茶洞)에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하여 근대적 종교의 틀을 갖추었다. 서울에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한 한 후 지방 조직으로 교구를 설치하였다. 전국을 72개 대구역으로 나누어 대교구를 설치하고, 그 아래 각 지역별로 교구를 두었다. 이외에도 전교규례(傳敎規例)·입교식·성주문·치성식 등 종교의례도 근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인쇄시설을 들여와 천도교중앙총부 내에 박문사(博文社) 인쇄소를 설치하였으며, 다시 보문관(普文舘)으로 재설립하고 홍병기(洪秉箕)를 사장에 임명하였다. 이어 국내 최초의 대판형 신문인 기관지 『만세보(萬歲報)』를 창간하였으며, 광무학교와 각 신문사에 후원금을 기부하였다.

귀국 후 천도교 조직과 교세 확장에 힘쓰는 한편 친일 배교한 이용구를 설득하였다. 이용구는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진회에 속한 천도교인들을 포섭하여 중상모략하며 해교 행위를 지속하였다. 1906년 9월 17일 가장 신임하여 재정 문제까지 맡겼던 이용구와 그 추종 세력 1백여 명을 천도교에서 출교시켰다.

이용구는 천도교와 분리하여 시천교(侍天敎)를 설립하였다. 이용구 세력은 그동안 교단 재정권을 거의 위임받아 처리하였기 때문에 교단의 모든 재산이 그들 명의로 되어 있었다. 천도교단으로서는 재정적 타격이 컸고, 당면한 재정난은 해결하기 위해 1907년 4월 성미제(誠米制)를 실시하였다. 이후 1911년 4월 조선총독부가 ‘이중과세’라고 하여 기명 성미제를 금지시키자 무기명 성미제로 변경하여 재정난을 해결하였으며, 이는 1919년 만세운동 당시에 운동 자금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07년 천도교단 일선에서 물러나고 대도주 직을 김연국(金演局)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김연국이 6개월 만에 이용구의 시천교 대례사(大禮師)로 취임함에 따라 1908년 1월 18일 박인호(朴寅浩)에게 대도주 직을 승계토록 하였다.

일본 생활 중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임을 깨닫고, 귀국 후 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여러 학교를 후원을 하였다. 당시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하여 문창학교(文昌學校)·보창학교(普昌學校)·양영학교(養英學校)·창동학교(昌東學校)·합동소학교(蛤洞小學校)·광명소학교(光明小學校)·석촌동소학교(石村洞小學校) 등 경영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에 일정액의 후원금을 매달 지원하였다. 그 중에서도 당시 최대의 사립학교였던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인수하여 경영하였다. 이 밖에도 지방에는 대구의 교남학교(嶠南學校)·일신보통학교(日新普通學校), 청주의 종학학교(宗學學校) 등 7~8개 학교를 직간접적으로 후원·설립하였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학교와 종교 활동만 가능해지자 천도교 포교에 힘쓰고 교당 건립에 진력하는 한편 부구총회(部區總會)를 통해 4월 5일 천일기념일(天日紀念日), 8월 14일 지일기념일(地日紀念日), 12월 24일 인일기념일(人日紀念日), 12월 1일 현도기념일(顯道紀念日) 등 4대 기념일을 정하고 기념행사에는 축연을 베푸는 등 교인들을 위무하였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 개최와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실무를 최린(崔麟)과 오세창(吳世昌)에게 일임하였다. 구 관료 접촉, 기독교계와 불교계, 그리고 학생계와의 연합전선 형성을 차례로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측에서 독립운동 자금 5천 원을 청구하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 흔쾌히 수용하여 기독교 대표 이승훈(李昇薰)에게 전달케 하였다.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연합전선으로 만세운동 준비가 무르익던 1919년 2월 권동진 집에서 민족대표는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33명으로 결정하였다. 2월 20일부터 26일까지 1주일 동안 천도교계 민족대표로 자신을 포함하여 이종훈·홍병기(洪秉箕)·권동진·오세창·최린·박준승(朴準承)·이종일(李鍾一)·김완규(金完圭)·홍기조(洪基兆)·나용환(羅龍煥)·나인협(羅仁協)·임예환(林禮煥)·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 등 15명을 선정하였다.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천매를 인쇄하였다. 독립선언서 인쇄과정에서 종로경찰서 고등계형사 신승희(申勝熙)에 발각되어 이종일이 보고하자 거금 5천 원을 매수 자금으로 주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2월 28일 가회동 손병희 집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 거사를 재확인하고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번에 우리 거사는 조선의 신성한 유업을 계승하고 아래로 자손만대의 복락을 작흥하는 민족적 과업이다. 이 성스러운 과업은 제현의 충의에 의지하여 반드시 성취될 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하여, 만세운동이 성공적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당부하였다. 그리고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 불상사가 일어날 우려가 있다고 보고, 탑골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경무총감부의 신문을 받고 검찰로 송치되어 며칠을 보낸 후 서대문감옥 52호 감방에 수감되었다. 신문과정에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였으며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붙잡힌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지역의 만세운동과 연관하여 이른바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이에 대해 검사측에서 항소를 하였다.

재판과정에서 중병으로 보석을 신청하였으나 계속해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더 이상 치료가 어려운 상태에 이른 그해 10월 20일에서야 병보석으로 풀려나 동대문 밖 상춘원(常春園)에 기거하면서 치료받았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받았다. 이후에도 계속 상춘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병세가 약간 호전되었으나, 결국 1922년 5월 19일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천도교회장으로 영결식을 갖고 서울 우이동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수수명실록(授受明實錄)』·『도결(道訣)』·『명리전(明理傳)』·『천도태원설(天道太元說)』·『각세진경(覺世眞經)』·『대종정의설(大宗正義說)』·『교(敎)의 신인시대(神人時代)』·『무체법경(無體法經)』·『성심신삼단(性心身三端)』·『신통고(神通考)』·『견성해(見性解)』·『삼성과(三性科)』·『삼심관(三心觀)』·『극락설(極樂說)』·『성범설(聖凡說)』·『진심불염(眞心不染)』·『후경(後經)』·『십삼관법(十三觀法)』·『몽중문답가(夢中問答歌)』·『무하사(無何辭)』·『권도문(勸道文)』·『삼전론』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04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천도교 간부들(맨 오른쪽이 손병희) [판형3]

 

손병희 생가와 사당 [판형3]

 

1906년 6월 만세보 발간에 관한 내용 [판형3]

 

손병희에게 보낸 이승만 서한 [판형3]

 

보성사판 독립선언서 [판형3]

 

손병희 장례식 [판형3]

 

파고다공원 손병희 동상 [판형3]

 

 

 

 

 

 

 

⋮성주현⋮

|참고문헌|

『천도교경전』 ; 『천도교회월보』 ; 『동아일보』 ;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천도교중앙종리원, 1934 ; 오지영, 『동학사』, 영창서관, 1937 ; 이광순, 『민족의 횃불 의암 손병희』, 태극출판사, 1970 ;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의암손병희선생전기』, 1967 ; 성주현, 『식민지기 민족운동 시선의 확대』, 아라, 2014 ; 성주현, 『천도교에서 민족지도자의 길을 간 손병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2 ; 성주현, 「정암 이종훈의 생애와 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9,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 손병희 동상
  • 손병희 선생 생가와 사당
  • 손병희 판결문_경성복심법원_1920-10-30
  • 손병희에게 보낸 이승만 서한_1920-09-18
  • 가족 사진
  • 손병희
  • 손병희
  • 손병희
  • 서울 집터
  • 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
  • 천도교주 손병희
  • 손병희
  • 의암 손병희선생의 임종시
  • 한복 차림의 손병희
  • 손병희 부인 주옥경
  • 의암 손병희 선생
  • 천도교 3세 교조 의암성사 손병희
  • 손병희
  • 1904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천도교 간부들(맨 오른쪽이 손병희)
  • 손병희 생가와 사당
  • 손병희 장례식
  • 파고다공원 손병희 동상
  • 보성사판 독립선언서
  • 1906년 6월 만세보 발간에 관한 내용
  • 손병희에게 보낸 이승만 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