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인호 閔仁鎬 |
한글명 | 민인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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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閔仁鎬 |
본 관 | 여흥(驪興) |
이 명 | 호 : 낙산(樂山), 자 : 문일(文一) |
출신지 | 경북 청송(靑松) |
생몰년월일 | 1854 ~ 1925. 11. 28 |
운동계열 | 의병 |
관련 단체 | 청송 의병부대 |
관련 사건 | |
주요 활동 | 청송 의병부대 척후장으로 활동 |
포상훈격(연도) | 건국포장(1997) |
1854년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안덕면(安德面) 명당리(明堂里)에서 아버지 민치벽(閔致璧)과 어머니 함안조씨(咸安趙氏) 사이에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문일(文一)이고, 호는 낙산(樂山)이다. 조선 세종 때 청송군 안덕면 당저리(棠底里)로 입향한 남은(南隱) 민흥(閔興)의 후예인 명지(明智) 민재추(閔齋樞)의 10세손이다.
1896년 3월 8일 안동 의병부대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 들어와 청송군 관아의 군기(軍器) 탈취를 시도하고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을 발송하자 이에 고무된 청송 유림들과 함께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걸고 창의를 추진하였다. 3월 12일 청송 유림 100여 명과 함께 향회(鄕會)를 개최하여 창의하기로 하고, 이날 오후 객사(客舍)에서 심성지(沈誠之)를 창의장으로 추대하였다. 3월 16일 대장기를 세우고 창의한 청송 의병부대는 창의장 심성지를 비롯하여 부장 조성박(趙性璞), 중군장 김대락(金大洛), 좌익장 김상길(金相吉), 우익장 남두희(南斗凞), 사병도총 남승철(南昇喆), 의영도지휘사 서효원(徐孝源) 등을 추대하여 진용을 갖추었다. 그 뒤 청송 의병부대에서 군비의 효율적인 모집과 운용을 위해 4월 6일과 4월 29일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진용을 정비할 때, 척후장(斥候將)에 선임되었다.
청송 의병부대의 척후장으로서 주변 의병부대와 관군의 동향을 파악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5월 9일 청송 의병부대가 안덕면(安德面) 문거역(文居驛)에 진을 치고 있던 중, 5월 10일 척후 조규(趙奎)와 함께 의성으로 파견되어 “대구·군위 병정 100명이 의성으로 들어와 황산유진소(黃山留陣所)로 향하고 의성진(義城陣)은 흩어져 행방이 묘연하다”라는 관군과 의성 의병부대의 동향을 파악하여 보고하였다.
1896년 5월 12일 관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한 의성 의병부대와 이천 의병부대가 청송으로 들어왔다. 5월 13일 청송 의병부대는 이들의 요청에 따라 진용을 합하여 의성 연합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5월 14일 청송군 안덕면(安德面)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벌어진 감은리전투에서 척후장으로 참가하여 관군 7~8명을 처단하는 전과를 올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