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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백용성 白龍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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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백용성
한자명 白龍城
본 관 수원(水原)
이 명 白相奎(속명), 白亨喆(족보명)
출신지 전북 장수(長水)
생몰년월일 1864. 5. 8 ~ 1940. 2. 24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 대각교
관련 사건 3.1운동
주요 활동 1912년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을 개설하여 불교 개혁운동 주도,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참여, 1925년 서울에 대각교를 창립하여 새로운 민족불교운동 주도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64년 (음)5월 8일 전라북도 장수군(長水郡) 번암면(蟠岩面) 죽림리(竹林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水原). 부친 백남현(白南賢)과 밀양 손씨인 모친 사이의 5남매의 장남이었다. 족보상의 이름은 형철(亨喆), 속명은 상규(相奎), 법명은 진종(震鍾)이었다.

유년 시절에는 향리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세속을 떠나 고결하게 사는 삶을 동경하였다. 또한 부친이 잡은 고기를 불쌍하다고 하여 모두 살려 주었다는 일화, 모친의 고사리를 따는 것을 제재하였다는 일화가 전하듯이 유년시절부터 생명을 보호하는 불교에 대한 인연이 남달랐다.

14세에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의 덕밀암(德密庵)으로 출가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로 속가 집으로 돌아왔다가, 16세에 합천 해인사 극락암으로 재출가를 단행하였다. 해인사에서 승려의 기본 교양을 익힌 후 고운사(孤雲寺)의 영민선사(永旻禪師)에게 대비주 수행을 지도받았다.

그후에는 파주 보광사(普光寺)의 도솔암(兜率庵)에서 수행을 하다 깨달았다. 깨달음을 인가받기 위해 금강산(金剛山) 표훈사(表訓寺)의 무융선사(無融禪師)를 찾았다. 무융으로부터 무자 화두(無字話頭)를 통한 수행을 권유받고, 보광사로 돌아왔다. 보광사에서 수행을 하다가 2차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통도사로 가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수행을 지속하여 송광사와 낙동강에서 3, 4차의 깨달음을 만났다. 이때 나이는 23세로 보림(保任)이라는 은둔적 수행을 17년간이나 하였다.

46세가 되던 해인 1909년까지 오지의 토굴에서 수행, 각처 스승에게서 가르침 청취, 경전의 독서, 수행자들과 대담, 중국 방문 등을 하였다. 불교 수행자로서 할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국권이 상실되는 지경에 불교가 가야할 길을 무엇인가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선문요지(禪門要旨)』를 짓고, 선회(禪會)의 개설, 불교의 우수성을 알린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집필하였다.

마침내 1911년 상경하였다.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지경에서 국권이 상실되었던 현실로 변하였기에 산중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외래 종교가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도회지를 횡행하였던 현실에서 민족적인 불교의 노선이 혼미한 것을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 작용하였다. 우선 서울 시내의 신도집에 머물면서 참선 포교를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포교 활동을 하다가 민족운동과 연계된 것은 1912년 5월 12일에 개교한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朝鮮臨濟宗中央布敎堂)의 개설이었다. 이 임제종포교당은 1910년 9월, 친일 승려인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불교인 조동종(曹洞宗)과 비밀리에 맺은 조동종 맹약(盟約)의 반발 구도에서 나왔다.

조동종 맹약은 1908년 3월, 등장한 종단인 원종(圓宗)이 구한국정부와 통감부에게 공인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원종의 종정이었던 이회광은 국권 상실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일개 종단인 조동종과 원종(圓宗)의 공인을 요청하면서 비밀조약을 맺었다. 이 비밀조약은 한국 불교의 자주성을 손상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조약 내용이 불교계에 알려지면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임제종 운동이었다. 한국 불교의 전통은 임제종 계승에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종지 수호운동에 나섰다.

임제종 운동은 1911년 초반부터 송광사·쌍계사·해인사·통도사·범어사 등 주로 남방 지역의 사찰을 거점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의 주체는 한용운(韓龍雲)·박한영(朴漢永)·송종헌(宋宗憲)·진진응(陳震應)·오성월(吳惺月) 등이었다. 운동 초기, 운동 본부인 종무원을 송광사에 두었다가 범어사로 이전시켰다. 그리고 운동 홍보를 위하여 각처에 포교당을 개설하였다. 이런 구도에서 나온 1912년 5월의 서울의 인사동에 개설한 임제종중앙포교당은 상징적인 측면에서 중요하였다. 그 개교식에서 개교사장으로 활동하였다.

일제는 그 당시 한국 불교를 행정적, 법적으로 통제 관리하는 사찰령 체제를 가동시켰다. 그래서 한국 불교에 선교양종(禪敎兩宗)이라는 기형적, 타율적인 종명을 강요하였다. 당시 식민지 불교 체제가 관철되는 분위기이었기에 이에 저항하는 흐름은 희박하였다.

일제는 원종과 임제종의 자진 퇴진을 강요하였다. 마침내 포교당이 설립된 지 불과 1개월 후인 1912년 6월 21일 일제는 포교당의 주무인 한용운을 불러 ‘임제종’ 간판 철거를 명령하였다. 또한 일제는 포교당 건립, 운영의 실무자인 한용운의 활동을 제한시켰다. 이런 구도에서 한용운과 함께 주석하였던 임제종포교당은 선종포교당으로 명칭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포교당에 주석하며 포교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러다가 1915년부터는 인근에 독자적인 포교당인 임제파강구소(臨濟派講究所)·대각사(大覺寺)를 개설하여 포교, 강연을 하면서 민족불교 활동을 지속하였다. 또한 자주적인 포교 활동을 하기 위해서 금광 경영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족불교 활동은 1919년 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불교 대표로서 만세운동 최일선에서 활동하였던 한용운이 1919년 2월 20일 경 찾아와 민족대표 참가 제의를 하자 즉각적으로 수용하였다.

한용운과는 1912년 초반부터 항일 저항불교인 임제종 운동을 함께 한 동지였던 연고에서 추대, 수용이 이루어졌다. 또한 불교 사상적인 측면에서 한국이 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는 1919년 8월 27일 고등법원 판사가 독립선언을 한 근본 목적을 묻는 질문에,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독립은 필요하다. 일본에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며 또 불교사상으로 보더라도 조선의 독립은 마땅한 것이므로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하여튼 조선의 독립은 용이하게 될 것으로 믿고 있는 터이다.”라고 하였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한편 서대문감옥에 수감되면서 불교문화, 불교개혁 활동에 매진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수감된 타 종교인들의 신앙 활동, 특히 우리말로 된 경전을 이용하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졌고, 이는 세상 사조와 문명적인 변화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져 한문으로 된 불교 경전을 순수 우리말로 번역, 출간하여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이러한 옥중 체험은 민족적인 불교 개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21년 봄, 출옥하여 대각사(서울 종로 3가)에 머물며 자신이 감옥에서 결심한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세상 사조에 둔감한 승려들은 제안에 호응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홀로 이를 추진하였으니 그 단체가 삼장역회(三藏譯會)이었다. 그리고 1921년 겨울에 창건된 선학원(禪學院)의 출범에 일시 관여하였다.

선학원은 수좌들의 중앙 거점으로서 불교의 자주화를 지향했기에 그런 취지에 동의하여 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선학원의 출범에만 관여하고, 감옥에서 약속한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입적하는 그날까지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출간하는 일에 헌신, 매진하여 『화엄경(華嚴經)』·『금강경(金剛經)』·『능엄경(楞嚴經)』 등 20여 종을 출간하였다. 그리고 불교사상을 쉬운 우리말로 정리하여, 펴내는 일에도 매진하였다. 당시 펴낸 사상서는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각해일륜(覺海日輪)』·『청공원일(晴空圓日)』 등 10여종에 달하였다.

1925년 망월사에서 만일참선결사회(萬日參禪結社會)를 조직하고 민족불교 지향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 당시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불교계에서는 일본 불교의 모방이 나타나면서 계율 소홀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그러면서 전통 불교의 핵심인 선수행의 가풍도 퇴진하였다. 이런 현상을 개탄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단호한 수행의지를 갖고 있는 승려들을 모집하여 만일(30년간) 간의 참선을 하는 결사회를 가동시켰다.

선율(禪律)의 균형을 표방하면서 동구불출(洞口不出), 평시묵언(平時黙言), 오후불식(午後不食) 등의 단호한 행동 준칙을 정하며 시작하였다. 50여명이 참가한 결사회는 1926년에는 통도사로 이전되었고, 2년 동안 추진되다가 중단되었다.

일본 불교에 저항하고 민족불교를 지향하는 의지는 1926년의 대처식육(帶妻食肉)을 반대하는 건백서를 총독부에 제출한 것에서도 구현되었다. 당시 사법에는 파계자는 본말사 주지에 취임하지 못하게 규정되었다. 그런데 일본 불교의 상징인 결혼 풍조의 영향, 일본 유학생들의 일본 불교의 적극적 수용 등이 맞물리면서 1925년에는 결혼한 승려의 주지 취임을 가능케 하는 사법 조항을 개정케 하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에 1926년 5월, 뜻을 같이 하는 127명 승려의 연명을 받아 이를 반대하는 건백서를 제출하였다. 여기서 대처식육의 허용은 절대 허용되어서는 안 되고, 그 허용은 불교를 망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제 당국은 이 건의를 배척하였다.

그러자 그해 9월, 2차 건백서를 재차 제출하였다. 2차 건백서에서 대처식육을 금지시키지 못하면 대안으로 무처(無妻)승려와 유처(有妻)승려의 구분, 무처승려 전용의 본산 할애를 제안하였지만 일제 당국은 사법개정을 허용하였다.

이때부터 결혼 승려의 본말사 주지의 취임이 합법화되었고, 1920년대 후반 이후에는 대부분의 승려가 결혼을 당연시 하였다. 이렇듯 뜻이 관철되지 않자, 기존 불교 종단을 탈종하였다. 불교의 근본인 계율을 내팽개치고, 빚을 지면서, 명리 추구에 빠져 있는 승려들과는 함께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독자적인 불교 단체로 대각교(大覺敎)를 만들었다.

대각교는 불교의 정통성과 민족불교를 고수하려는 고육지책의 노선의 산물이었다. 대각교의 중앙본부는 서울의 봉익동(鳳翼洞)에 있었던 대각사에 두었고, 대표적인 지부는 경남의 함양과 만주 옌지(延吉)의 용정(龍井)에 두었다. 그 밖에도 나남(羅南)·회덕(懷德) 등지에 지부가 있었다.

대각교를 표방하면서 불교개혁, 민족불교 지향에 매진하였다. 한글 위주, 수행 위주, 선농불교(禪農佛敎) 실천, 신도 배려 등 이었다. 불교 의식을 한글로 하였고, 승려 생존과 불교의 운용을 자립으로 해야 함을 실천하였다. 『대각교 의식』과 『오도의 진리』의 발간, 함양(咸陽)의 화과원(華果院)에서의 과수원 경영, 옌벤(延邊)의 2개 처에서 경영한 농장은 그 예이다.

화과원은 수행을 하면서, 집필도 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그리고 옌벤의 용정에는 대각교당이 세워져 한국을 떠난 이주민들의 정신적인 터전이 되었다. 용정에서 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농장은 대각교 신도들의 재원으로 수 십 만여 평에 달하였다. 화과원과 연변 농장은 일하면서 수행을 하는 선농불교의 도량이었다.

이렇게 추진한 대각교 활동은 일제의 외압에 휘말리면서 자진 해소되었다. 1936년경부터 대각교는 유사 종교 탄압의 대상이 되면서 여러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1937년 무렵, 후학에게 법을 계승하면서 대각교의 전 재산을 범어사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8년 대각교는 조선불교선종 총림이라는 명칭을 표방하였다. 이는 그 당시 선학원 계열 승려들이 조선 불교 선종을 내세우면서 선풍의 재기를 기하자, 그 움직임에 합류하는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선원을 관리하는 재단법인인 선리참구원에 대각교의 후신인 조선불교선종 총림을 가입시켰다. 1940년 (음)2월 23일 입적하였던 그날까지 민족불교 지향, 불교의 개혁, 역경불교와 선농불교의 실행 등을 추진하였다.

1941년 7월, 한용운이 지은 비문에 의한 비석이 해인사에 세워졌다. 그리고 생애, 사상을 집약한 자료집인 『용성선사어록』이 삼장역회에 의해서 1941년 9월 출간되었다. 1945년 12월 12일, 김구를 비롯한 20여명의 임시정부 요인들은 대각사를 찾아 참배를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90년에는 국민문화 향상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공을 기려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으며, 같은 해 한글학회에서 민족정신 고취와 문화 발전에 이바지 한 공로로 감사패를 수여하였다.

백용성 [판형3]
수형기록카드 [판형3]
수형기록카드1_2 [판형3]
대각사의 현재 모습 [판형3]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대각사 방문(1945. 12. 12) [판형3]
조선글화엄경 [판형3]

 

⋮김광식⋮

|참고문헌|

한보광, 『용성선사 연구』, 감로당, 1981 ; 김광식, 『용성』, 민족사, 1999 ; 김광식, 「백용성의 독립운동」, 『대각사상』 창간호, 대각사상연구원, 1998 ; 김광식,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도피안사, 2007 ; 김순석, 「한용운과 백용성의 근대 불교개혁론 비교 연구」, 『한국근현대사연구』 35집, 한국근현대사학회, 2005 ; 한보광, 「백용성 스님의 민족운동」, 『대각사상』 14집, 대각사상연구원, 2010 ; 김광식, 「백용성 연구의 회고와 전망」, 『대각사상』 16집, 대각사상연구원, 2011 ; 김광식, 「대각교의 조선불교선종 총림으로 전환 과정 고찰」, 『대각사상』 20집, 대각사상연구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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