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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준승 朴準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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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박준승
한자명 朴準承
본 관 밀양(密陽)
이 명 자암(泚菴)
출신지 전북 임실(任實)
생몰년월일 1866. 11. 24 ~ 1927. 3. 23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천도교, 천도구국단
관련 사건 3.1운동
주요 활동 1894년 동학농민운동 참가, 1916년 천도구국단 참여, 1919년 만세운동 민족대표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66년 11월 24일 전북 임실군(任實郡) 청웅면(靑雄面) 남산리(南山里)에서 아버지 박호진(朴昊鎭)과 어머니 변씨(邊氏)의 삼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천도교에서 사용하는 도호(道號)는 자암(泚菴)이다. 7세 때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0세 때 동료를 가르칠 정도로 총명하였다. 15세 때부터 2년간 양한묵(梁漢默)과 함께 김영원(金榮遠)에게 사숙하였다.

24세가 되던 1890년 4월 23일 동학(東學)에 입도하였다. 1894년 1월 10일 고부기포(古阜起包)를 계기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7월 임실에서 참가하였다. 이후 동학여당(東學餘黨) 추적을 피해 피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 접주(接主)·수접주(首接主), 1902년 도집(都執)에 선임되어 동학농민운동으로 와해된 교단 조직을 재건하고 교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04년 8월 말 동학 교단에서 문명개화운동을 위해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흑의단발운동(黑衣斷髮運動)을 전개하자 청웅면 남산리에서 진보회 지회를 조직하고 그동안 길러왔던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러나 진보회가 친일 행위에 앞장서온 일진회(一進會)와 통합하자, 손병희(孫秉熙)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명하고 퇴회신교(退會信教)를 통해 일진회 추종자를 축출해 나가는 한편 이용구(李容九) 등 일진회 핵심인물 1백여 명을 출교시키는 등 교단을 재정비하였다.

이 시기 전라도의 유력한 접주로서 손병희와 뜻을 같이 하면서 이용구의 일진회에 대항하여 교인들을 수습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앞장섰다.

1906년 청웅면 삼화소학교 건립추진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천도교 임실교구 설립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1912년부터 전남 장성군(長城郡) 천도교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巡遊)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 천도교 전라도 도사(道師)에 임명되어 종교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과 배일사상을 전파하였다.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연두 교서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강화원칙의 일환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천도교단은 손병희를 중심으로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최린(崔麟) 등 교단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이 시기 천도교중앙총부 경도사(敬道師)·도사(道師)로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24일 천도교 도사로서 손병희에게 기도회의 종료를 보고하고, 1월 21일 붕어(崩御)한 광무 황제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그 다음날 손병희를 방문한 뒤, 이어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권동진을 만났다. 이때 권동진으로부터 조선총독부에 건의서를 제출하여 조선은 독립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주저 없이 만세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양한묵·이종훈·이종일 등과 함께 천도교 측 민족대표 15인 가운데 1인으로 선임되어 2월 28일 손병희 집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경무총감부에서 “왜 독립운동을 하였는가”라는 질문에, “조선은 4천 년 전에 건국하였으며 나도 날 때는 독립국 국민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독립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구주(歐洲)에서 국제연맹회의를 하고 있는 고로 이 좋은 기회에 독립하지 아니하면 안 될 줄로 생각한다”라고 대답하여 항일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법정에서 일본인 판사가 “조선 독립이 될 줄 믿고 있는가”라고 묻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거침없이 대답하여 민족 독립에의 확고한 신념을 분출하였다. 나아가 일본인 판사가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금후 기회만 있으면 하겠다”고 답변함으로써 불요불굴(不搖不屈)의 독립정신을 드러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1년 11월 4일 풀려났다. 옥고를 겪던 중에도 천도교단 도사직을 유지하였다.

풀려난 후 1922년 천도교중앙종리원 종리사(宗理師)·감사정(監査正)·포덕사(布德師)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천도교단이 신·구 양파로 분화되자 구파의 천도교중앙종리원 종법사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저술로는 『우묵눌 삼자(愚黙訥 三字)』 등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민족대표 재판 관련 보도(『동아일보』 1920. 7. 12) [판형3]
박준승의 독립선언서 배포 관련 보도(『매일신보』 1920. 9. 22) [판형3]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판형3]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판형3]
박준승 사망 보도(『동아일보』 1927. 3. 26) [판형3]

 

⋮성주현⋮

|참고문헌|

『동아일보』 ; 『천도교회월보』 ; 『천도교종령집』 ; 『천도교중앙총부임직원록』 ; 『천도교임실교회사』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6, 1973 ; 오재식, 『민족대표33인전』, 동방문화사, 1959 ; 김삼웅, 『33인의 약속』, 산하, 1997 ; 김정인·이정은, 『국내 3·1운동 Ⅰ- 중북·북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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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orean uprising of March
  • 민족대표 재판 관련 보도(『동아일보』 1920. 7. 12)
  • 박준승의 독립선언서 배포 관련 보도(『매일신보』 1920. 9. 22)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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