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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나용환 羅龍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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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나용환
한자명 羅龍煥
본 관 나주(羅州)
이 명  
출신지 평안남도 성천(成川)
생몰년월일 1864. 8. 7 ~ 1936. 8. 19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1919년 만세운동
주요 활동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64년 8월 7일 평남 성천군(成川郡) 숭인면(崇仁面) 흥인리(興仁里)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평남 중화군(中和郡) 상원면(祥原面) 장항리(獐項里)이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으로 천도교인이다. 천도교 도호(道號)는 봉암(逢菴)이다. 만세운동 참여 당시 서울 간동(諫洞)에 거주하였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후 동학에 입도하여 평안도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하였다. 1900년 500명 이상을 거느리는 수접주(首接主)에 임명되었고, 1902년에는 1천 명 이상을 거느리는 대접주가 되었다. 1903년 의창대령(義昌大領)에 임명되었고, 이후 ‘포덕대왕(布德大王)’이란 별칭을 얻었다.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한 손병희는 이듬해 1월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한 후 중앙총부 조직에 착수하였다. 2월 10일 공포된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에 따라 천도교 중앙 조직은 대도주를 정점으로 원직(原職)과 주직(住職)의 이원체제로 구성되었다. 중앙 조직이 갖추어지자 그 해 3월 전국 280여 개 지방교구를 지역별로 주관하는 72개 대교구를 조직 발표하여 지방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때 제15대교구장 대리로 임명되었다.

 

1906년 11월 손병희로부터 봉암(逢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1907년 5월 18일 천도교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 등 22명과 함께 2등 은장(銀章)을 받았고, 관할 구역 업무와 간부 선임 등을 책임지는 정주순독(定住巡督)에 선정되었다. 1909년 당시 천도교 내에서 단두 명뿐이던 5천 호를 통솔한 두목인 도령(道領)에 피임되고, 신도사(信道師)에 임명되었다.

 

1910년 4월 임원의 품행과 직무에 관한 사항 감독 등의 직무를 담당한 천도교중앙총부 현기사장(玄機司長)의 직을 맡았다. 1910년 8월 15일 천도교리 선전과 학술 보급을 목적으로 창간한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의 창간사를 작성하였다.

 

천도교는 1910년 12월 신대헌(新大憲)을 제정 공포하여 체제를 개편하였는데, 이때 중앙총부 공선관장(共宣觀長)에 임명되었다. 1917년 천도교 원로로서 나인협·양한묵(梁漢黙)·이병춘(李炳春)·서우순(徐虞淳)·홍기억(洪基億)·홍기조(洪基兆)·오영창(吳永昌)·임예환·이종석(李鍾奭)·오세창·권동진 등과 함께 도사(道師)에 임명되었다. 그 해 3월부터 4월 5일까지 5명의 도사와 함께 황해·평남·평북을 순회하며 교인들에게 신앙통일과 규모일치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권동진·오세창 등 천도교 지도자들은 종교계와 교육계 인사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식을 준비하였다. 이 무렵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밀사가 찾아왔고, 일본 도쿄(東京)로부터는 송계백(宋繼白)이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갖고 왔다. 이에 자극을 받은 천도교 지도자들은 본격적인 독립운동 준비에 들어갔다.

 

1919년 1월 20일 권동진·오세창·최린(崔麟) 등은 교주 손병희의 허락을 받고, 대중화·일원화·비폭력 등 독립운동의 원칙에 합의하였다. 또한 이들은 이승훈(李昇熏)·한용운(韓龍雲)·송진우(宋鎭禹)·현상윤(玄相允) 등 종교계와 교육계 인사들을 접촉하여 연합된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최린이 최남선(崔南善)에게 독립선언서의 초안 작성을 의뢰하였고, 최남선은 2월 초순부터 초안 작성에 들어가 2월 11일에 완성하여 15일 최린에게 건네주었다.

 

최린은 「독립선언서」 초안을 손병희 등에게 보여주고 동의를 얻었고, 함태영(咸台永)을 통해 기독교 측에 건네 동의를 받았다. 「독립선언서」는 보성사(普成社) 사장 이종일(李鍾一)의 책임 하에 2월 27일부터 비밀리에 인쇄하여 21,000매를 제작하였다. 독립선언서 배포는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 등이 분담하여 전국적으로 배포하였다.

 

1919년 2월 25일 천도교 기도회에 관한 보고와 고종 장례식 참배를 위해 서울로 올라와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등을 만났다. 권동진에게 독립선언 준비 계획을 듣고 동참하기로 하였다. 2월 27일 오세창·권동진·최린·김완규(金完圭)·권병덕(權秉悳)·나인협·양한묵·임예환·홍기조·홍병기 등과 함께 김상규(金相奎) 집에 모여서 독립건의서와 독립청원서를 일본 정부와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동시에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는데 동의하고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였다.

 

천도교에서는 각 기관이나 연원의 대표로 활동하던 핵심간부 15명이 서명하였다. 이 서명에 천도교 총대표 손병희, 천도교중앙총부 대표 권병덕, 보성학교 대표 최린, 천도교월보사 대표 이종일(李鍾一), 장로인 이종훈(李鍾勳)·홍병기, 그리고 천도교 원로로서 도사인 권동진·오세창·양한묵·김완규·홍기조·임예환·박준승(朴準承)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아침 최린으로부터 독립선언식 장소가 명월관(明月館) 지점 태화관(泰華館)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 소재 태화관에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 중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등 4명을 제외한 29명이 모였다. 독립선언식을 마친 후 민족대표들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그 사실을 통보하였고, 즉시 달려온 일제 경찰에 의하여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

 

1919년 6월 상순 경찰과 검찰의 조사를 거쳐, 8월 1일 이른바 내란죄를 적용하여 최고심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회부하면서 예심이 종결되었다. 그런데 고등법원에서는 전국적 만세시위에 대해 “민족대표들이 내란을 교사한 적이 없고, 폭동행위자의 자발적 의사에 의해 폭동이 일어난 것”으로 규정하고, 이른바 보안법,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출판법 등을 적용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결국 재판은 고등법원이 아닌 경성지방법원에서 진행되었다.

 

1920년 7월 13일 열린 첫 공판에서 허헌(許憲) 변호사는 고등법원의 「예심종결서」에 “경성지방법원으로 송치한다”는 말이 없으니 이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에서 다룰 수 없고, 고등법원에서도 내란죄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사건을 다룰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공소를 수리하지 말고 피고를 방면해야 한다고 변론하였다. 재판부가 이를 받아 들여 공소불수리 결정을 하였다. 검사는 즉각 항소하였다. 경성복심법원은 경성지방법원의 공소불수리 판결을 취소하고 곧바로 심리에 들어갔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정동분실(貞洞分室)에서 임예환·나인협·박준승·권병덕·김완규·양전백(梁甸伯) 등과 함께 이른바 보안법 제7조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었고, 1921년 11월 4일 이필주(李弼柱)·김원벽(金元璧)·임예환·김완규·양전백 등 15명과 함께 풀려났다.

 

출옥 후 천도교단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2년 1월 최린과 함께 종무원 종무사(宗務師)에 선출되어 경리과 주임에 임명되었다. 그 해 4월 오세창, 오영창과 함께 천도교중앙총부 고문에 임명되었고 9월 종리사로 당선되었다. 1923년 4월 권동진·이종훈·오영창·홍병기·오세창과 함께 강도사가 되었다.

 

1925년 천도교가 최린이 이끄는 신파와 이종린(李鍾麟) 이끄는 구파가 갈등할 때, 신파에 가담하였다. 1925년 12월 신파 중앙종리원 종법사에 선임되었다. 1930년 4월 종법사장에 선출되었고 12월 최린·권동진·오세창·이병춘과 함께 최고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32년 12월 이병춘·홍병기와 함께 법정(法正)에 선정되었으며 중앙종리원 고문을 겸하였다. 이후 중앙종리원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36년 8월 19일 서울 소격정(昭格町)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나용환 일제감시카드 앞면(국사편찬위원회) [판형1]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20. 10. 30) [판형1]

 

 

⋮정용서⋮

|참고문헌|

『동아일보』, 1921. 11. 5, 1930. 12. 31 ; 『매일신보』, 1920. 9. 22, 10. 31, 1921. 11. 3·5, 1925. 2. 23 ; 『신한민보』, 1922. 3. 9 ; 『조선중앙일보』, 1936. 8. 21 ; 『별건곤』 제21호, 1929. 6 ; 『신인간』 제106호, 1936. 10 ;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의암손병희선생전기』, 196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1 ; 천도교중앙총부교사편찬위원회, 『천도교백년약사(상)』, 1981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12, 1990 ; 김삼웅 엮음, 『33인의 약속』, 도서출판산하, 1997 ; 이동초 편저, 『천도교회 종령존안』,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05 ; 천도교중앙총부 교서편찬위원회, 『천도교약사』, 2006 ; 김정인,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한울, 2009 ; 한인섭,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 경인문화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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