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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세현 朴世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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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박세현
한자명朴世賢
본 관 
이 명 
출신지전남 장흥(長興)
생몰년월일1881 ~ 미상
운동계열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1919년 3월 제주도민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살포
포상훈격(연도)애족장(2018)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출신이다. 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1881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구우면(舊右面, 현 제주시 한림읍) 저지리(楮旨里)로 이주하여 한문서당을 운영하였다. 일제의 국권 피탈 소식을 듣고 비탄에 빠졌으나 좌절하지 않고 국권 회복에 관한 의지를 불태웠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전국으로 만세운동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제주의 만세운동은 서울 휘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장환(金章煥)이 귀향하여 서울의 시위 소식을 알리면서 시작되었다.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제주군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 일대에서 김장환·김시은(金時殷)·김시범(金時範) 등의 주도로 대규모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3월 21일 약 600명의 주민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일본군 헌병대가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김시범 등 주모자 12명을 붙잡았다. 그러나 만세시위의 열기는 식지 않았고, 3월 23일과 24일 붙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민들의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조천리 만세운동에 대한 소식은 약 40km 떨어진 구우면 주민들에게도 빠르게 전달되었다. 평소 국권회복에 관한 뜻을 함께 나누던 구우면 낙천리(樂泉里)의 김여석(金汝錫)·조무빈(趙武彬), 신좌면 신촌리(新村里)의 신계선(愼啓善) 등과 함께 모여 향후 거사 계획에 관해 논의하였다. 이들과 독립의 시기가 마침내 도래하였다고 판단하고,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제주도 주민 총궐기를 촉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제주도 전역에 있는 서당의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시위운동을 촉구하는 격문을 만들고, 거사를 진행하기에 앞서 천지신명에게 고사를 지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마다 격문을 붙이다가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10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징역 3년(미결구류 일수 30일 통산)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영윤⋮

|참고문헌|

「수형인명부」 ; 「집행원부」 ; 제주도 문화공보관당관실, 『제주도지』 제1권, 1993 ; 제주도, 『제주항일독립운동사』, 1996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국내 3·1운동 Ⅱ - 남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