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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문일평 文一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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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문일평
한자명 文一平
본 관 남평(南平)
이 명 본명: 명회(明會), 아명: 정곤(正坤), 자: 일평(一平), 호: 호암(虎巖), 호암산인(虎巖山人), 호암생(湖巖生), 호암(湖巖)
출신지 평북 의주(義州)
생몰년월일 1888. 5. 15 ~ 1939. 4. 3
운동계열 중국방면
관련 단체  
관련 사건 3.1운동, 물산장려운동, 조선학운동
주요 활동 1910년대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동제사와 박달학원에서 활동, 「애원서」를 작성하고 3월 12일 보신각에서 낭독, 1920년대부터 역사가로 활동하며 ‘조선심’을 주창하고 정치사와 대비된 문화사를 강조, 조선학운동 주도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95)

1888년 5월 15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의주면(義州面) 서부동(西部洞)에서 아버지 문천두(文天斗)와 어머니 해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본명은 명회(明會)이고, 아명은 정곤(正坤)이며, 자는 일평(一平)이다. 호는 호암(虎巖), 호암산인(虎巖山人), 호암생(湖巖生), 호암(湖巖) 등을 사용하였다. 집안은 16세기 중엽부터 13대조 이래로 의주 동북방인 창성(昌城)에서 세거한 무관 가문이었다. 창성에 거주한 이래 8대조와 7대조, 5대조가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증조부도 무과에 급제하여 조선시대 중앙 군사조직인 오위(五衛)의 종4품 무관직이었던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경제적으로 부유하여 어려서부터 고향의 한학자 최해산(崔海山)의 문하에 들어가 한문을 수학하였다. 12세인 1899년 3살 연상의 전주(全州)가 본관인 김은재(金恩哉, 1885년 4월생)와 결혼하였다. 결혼 이후 부인에게서 한글을 배우는 대신 부인에게 한문을 가르쳐 주었다.

18세 되던 1905년 봄 단발하고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하여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 1학년 청강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일어를 몰라 곧 중퇴하였다. 아오야마학원 중퇴 후 서북지방 출신이 결성한 태극학회의 일어강습소인 태극학교에 입학하여 일어를 학습하였다. 1906년 신학기에 도쿄 간다(神田) 세이소쿠(正則)학교에 입학하면서 이사한 새 하숙집 옥진관(玉津館)에서 홍명희·이광수와 만나 함께 생활하였다. 1906년부터 1908년까지 태극학회의 기관지 『태극학보』를 비롯하여 『대한흥학보』 등에 계몽주의적 성격의 글을 다수 발표하였다.

20세 되던 1907년 9월 메이지(明治)학원 중학부(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여 이광수와 동급생이 되었다. 친구인 홍명희는 다이세이(大成)중학으로 진학하였다. 23세 때인 1910년 3월 메이지학원 보통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그 해 1학기에 평양 대성(大成)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0년 2학기에 의주 양실(養實)학교를 잠깐 거쳐, 서울 경신(儆信)학교로 전근하였다. 경신학교 시절 구리개에 있는 조선광문회에 출입하면서 한국사를 학습하였다. 그 당시 신민회 회원으로서 상동(尙洞)청년회에서 주관하는 토요강습소에서 대중을 상대로 지리를 강의하였다. 이때 역사는 최남선이 담당하였다.

1911년 봄 두 번째 도쿄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早稻田)대학 고등예과에 입학하였다. 1911년 10월 1일 재동경조선유학생친목회 임시총회에서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12년 1월 3일 유학생친목회 본회에서 조소앙·조만식 등과 함께 회보 발간장소 교섭위원으로 선임됨과 동시에 유학생친목회 기관지 『학계보(學界報)』 창간호의 편집 겸 발행인을 겸직하였다.

1912년 4월 『학계보』 창간호에 세 편의 글을 기고하면서, ‘호암(虎巖)’과 ‘호암산인(虎巖山人)’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7월 고등예과 수료 후 정치학과에 진학하였다. 1912년 말 광문회 도쿄 출판지부 설립 추진 중 갑작스럽게 상하이(上海)로 떠났다. 와세다대학에서 일본 우익학생들의 언동에 민족적 비애를 느끼고 중국행을 선택한 것이다.

1913년 1월 상하이에 도착한 며칠 뒤 난징(南京)으로 가서 신규식·박은식·홍명희·정인보 등을 만나 자유당사(自由黨舍) 사택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1913년 봄 신규식의 주선으로 상하이 대공화일보사(大共和日報社)에 취직하였다. 그리고 신규식이 주도한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였다. 동제사는 표면상으로는 동포들의 상호 부조 기관이란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적으로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여 복국復(國)운동을 전개하던 독립운동 단체였다. 회원이 많을 때는 300여 명에 달하였는데, 중심 인물은 그를 포함하여 박은식·김규식·신채호·조소앙·홍명희·박찬익·신건식 등 15명이었다.

동제사는 장차 독립운동에 중추가 될 인재 양성을 위해 1913년 12월 17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지역의 밍떠리(明德里)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였다. 과정은 1년 반이었고, 교과목은 영어·중국어·지리·역사·수학 등이었다. 이 학원에서 박은식·신채호·홍명희·조소앙 등과 중국인 농주(農竹) 및 미국 화교 마오따웨이(毛大衛) 등의 석학들과 함께 지도교수로 활동하였다. 여기서 교육받은 청년들은 3기에 걸쳐 100여 명 이상에 달하였는데, 이들은 장차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할 때 실무진으로 충원되었다.

1914년 4월 무렵 안둥현(安東縣)을 거쳐 귀국하여 고향에 은거하였으나, 1917년 1월 일제 경찰의 갑종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다. 1918년 박승빈·오세창·이능화·최남선 등과 함께 민족계몽단체인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를 조직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으로 민족대표들이 체포되자 3월 8일 “우리들은 손병희 등의 후계자로서 조선독립을 요구한다”는 취지의 「애원서(哀願書)」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3월 12일 보신각에서 「애원서」를 직접 낭독하여 다시 한 번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불을 붙이고 붙잡혔다. 이로 인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미결수로 감옥에 있던 기간이 계산되어 1920년 3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지만, 실제로는 만 1년간 수감 생활로 고초를 겪었다.

1920년 8월 한성도서주식회사 출판부 촉탁으로 취직하였다. 그 해 8월 13일에 개최된 조선노동대회(朝鮮勞働大會)에서 교육부장에 피선되었다. 9월 『서울』 제6호에 「일본인이 저술한 이충무전」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역사 저술가로 활약하였다. 이때부터 호암(虎巖)이라는 호 대신 호암(湖巖)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 6월 계명구락부에서 발행하는 『신민공론(新民公論)』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2월 금연을 통한 저축으로 학문 권장에 힘 쓸 것을 규약한 단연동맹회(斷煙同盟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중동학교 역사담당 교사로 근무하면서 우리 역사 이야기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애국사상을 길러주었다.

1920년대 일본과 한국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운동에 공명하여 자신이 직접 조선노동대회나 화요회 같은 사회주의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동시에 사회경제사관에 대한 탄탄한 이론을 바탕으로 역사의 주체를 민중으로 보는 민중사관을 피력하였다.

1923년 1월 14일 『동명(東明)』에 「조선 과거의 혁명운동」을 발표하면서, 역사에서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월 21일자 『동명』에 「조선 과거의 혁명운동(속)」을 발표하여 계급투쟁론적 민중사관을 드러내었다. 1924년 『개벽』 1월호에 「갑자 이후 육십년간의 조선」을 발표하여 ‘동학당 난’을 “조선역사상 계급쟁투의 색채가 가장 선명한 혁명운동”으로 평가하였다. 1925년 2월 19일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화요회 명의로 게재된 「전조선민중운동대회 개최취지문」을 작성하였다. 1927년 1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경제관계로 본 조선문명」을 서술하여 철저한 사회경제사관을 드러내었다. 아울러 역사의 주체인 민중을 계몽시키기 위해서는 쉬운 역사 쓰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1927년 『동광(東光)』 10호에 「조선사의 교과서에 대하여」를 발표하여 민중들이 알아볼 수 있는 쉬운 글쓰기를 강조하였다.

1924년부터 1925년 4월 초순까지 송도고등보통학교 역사담당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5년 8월경 세 번째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부 청강생으로 입학하였으나, 학비 문제로 포기하고 1926년 7월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1927년 1월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 2월 15일 서울 중앙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신간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자, 신간회 경성본부 간사로 선출되었다. 그 해 『고려개사(高麗槪史)』를 집필하여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중세사 왜곡에 대응하였다. 이 글은 민족주의사학에서 고려사를 단대사(斷代史)로 정리한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었다.

1927년 8월 15일 서울 황금정(현 을지로) 조선물산장려회 사무소에서 열린 제22회 이사회에서 이사로 피선되었다. 이때 조선물산장려회 선전부의 일도 맡아 기관지 『자활(自活)』의 주필로 선임되었다. 1928년 4월 30일 조선물산장려회 본부 제6회 정기대회에서 이사로 선출되었다. 1929년 4월 13일 조선물산장려회 제27회 이사회에서 제7회 정기대회 준비위원에 임명되었다. 물산장려운동의 효율성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물산장려운동을 이끌었다.

1927년 10월 26일 서울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천조(天祖)의 강세(降世)」란 주제로 개천절 기념 강연을 하였다. 1927년 11월 대종교 발행의 역사·지리·한글 관련 교양 월간 잡지 『한빛(大光)』의 간행 업무를 담당하였다. 1927년 중외일보사 논설부 기자 및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를 겸직하였다. 팔진옥(八珍屋)을 중심으로 의열단 출신 및 애국지사들과 교유하였다.

1928년 5월 『별건곤(別乾坤)』에 「조선심 차진 조선문학」을 발표하여 ‘조선심’을 강조하였다. 이는 신채호의 낭가사상, 박은식의 조선혼, 정인보의 조선얼에 비견되는 민족주의사학의 한 유형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민족주의사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실증사학이나 사회경제사학의 방법론까지 모두 흡수하여 일제의 식민사학에 대항한 민족사학자적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1928년 말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9년 5월 22일부터 6월 27일까지 『조선일보』에 「조선인과 국제안」을 발표하여 조선 성리학과 맹목적 존화주의를 비판하고, 관념적 명분과 외형적 의리보다 실리 우선의 국가외교를 강조하였다. 6월부터 『조선일보』에 「최영과 조선정신」을 연재하여 한국사의 전개를 ‘대조선정신’과 ‘소조선정신’의 대립과 갈등으로 설명하였다. 10월 3일에서 16일까지 『조선일보』에 「독사한평(讀史閑評)」을 실어 당시의 한국사 개설서들을 품평하였는데, 사료 비판의 엄밀함과 독특한 사관의 소유자로서 신채호를 극찬하였다. 11월 13일부터 11월 17일까지 『조선일보』에 「조선문화에 대한 일고찰」을 발표하여 귀족문명에 대비되는 민중문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30년 9월 21일에서 10월 10일까지 『조선일보』에 「조선반란사론」을 연재하여 한국사는 제왕들의 역사만이 아니라 반역자의 역사임에 주목하였다. 독립전선에 과감히 뛰어드는 데는 혁명가의 기개가 요구되었고, 그것을 반역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기대한 때문이었다. 1931년 초 조선일보사를 사직하였다.

1930년 청구(靑丘)학회에 가입하였다가 1932년에 탈퇴하였다. 청구학회를 단순한 학술단체로 알았다가 일제 관변 식민사학의 중심임을 인식하고 곧바로 탈퇴한 것 같다. 1934년 5월 7일에는 진단학회(震檀學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청구학회나 진단학회에 관여한 것은 역사학의 방법론인 실증주의에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 때문에 민족주의사학자였던 정인보와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정인보는 문일평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역사 의식을 상실한 채 실증주의만을 표방한 역사 연구가 얼마나 현실을 왜곡하는 것인지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나 끝까지 민족주의사관과 실증주의 방법론을 결합하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는 역사 서술의 과학화라는 주장으로 이어졌고, 1934년 5월 10일 『조선일보』 사설을 통해 발표한 「조선문화의 과학적 연구」라는 글에서 진단학회를 적극 옹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33년 1월에 방응모가 조선일보사를 인수하자, 그 해 4월에 편집고문으로 초빙되어 조선일보사에 재입사하였다. 『조선일보』에 일주일에 몇 차례 사론(史論)과 사화(史話), 그리고 수필 등을 실었다. 전문적인 학술 논문이 아니라 민중을 상대로 다양한 소재를 우리 역사와 연결시켜 소개한 계몽적인 것이었다.

1933년 4월 26일부터 5월 16일까지 『조선일보』에 「사안(史眼)으로 본 조선」을 발표하여 ‘이조’ 문명이 훈민정음을 창제함으로써 미래의 민중 문명을 배태한 진보적 시기로 평가하였다. 1933년 5월 31일부터 7월 4일까지 『조선일보』에 「역사상의 반역아」를 발표하여 역사상의 반역아들과 ‘민중혁명의 선구’로서 홍경래(洪景來)를 다루었다.

1934년 7월 15일부터 12월 18일까지 『조선일보』에 「대미관계오십년사(對米關係五十年史)」를 연재하였다. 이 글은 정인보·안재홍 등 동시대의 다른 민족주의사가들이 주로 만주를 중요시하면서 고대사를 다루고 있는 데 비해 냉혹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처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한국인의 안목을 국제적으로 넓히는 데 관심을 두었다. 정치외교사 인식은 곧 당대의 민족적 시련인 일제 식민통치의 근본적 원인을 구체화시켜 민중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는 데에 역사적 의미가 있다.

1934년부터 모습을 드러낸 조선학운동에도 깊게 관여하였다. 1930년대 초반까지 뚜렷이 정립된 개념이 없이 사용되던 ‘조선학’은 1934년에 드디어 ‘학(學)’의 개념으로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다산 정약용 서거 99주기 기념강연회에서 안재홍이 정인보와 함께 ‘조선학운동’을 제창한 것이다. 유물론 사가들은 조선학운동이 ‘소부르주아적 배타주의, 반동적 보수주의, 감상적 복고주의’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안재홍 등은 오히려 진보적, 약진적, 세계적으로 되는 것이라 반박하며 이 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1934년 9월 신조선사 주최 다산 서거 99주기 기념강연회를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하면서 이날 강연자로 정인보·안재홍·현상윤 등과 함께 내정되었으나, 병 때문에 강연을 못하였다. 이날 강연회에서는 조선학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제시되었다. 당시 민족주의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정약용 추모사업은 조선후기사에서 ‘실학’을 정식 용어로 정립시켰고, 조선학운동을 전개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비록 신병으로 말미암아 이날 강연회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이 무렵 관련 사론을 준비하고 있었다.

1934년 9월 10일 『조선일보』에 사설 「정다산(丁茶山)의 위적(偉績)-99년기(九十九年忌)에 제(際)하야」를 발표하여 조선학에 대한 정의를 구체화시켰다. 이 글은 정인보와 상의를 거친 후 작성하였다. 정약용이 부화소실(浮華少實)한 성리학을 대신하여 이용후생의 경국제세지학(經國濟世之學)에 능통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1935년 7월 16일 다산 서거 백주년 기념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와 당대 지사들의 정약용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조선후기 ‘실학’ 연구의 기폭제가 되었다. 1938년 1월 3일부터 1월 5일까지 『조선일보』에 「이조문화사의 별혈(別頁)」을 게재하여 실사구시 학풍을 강조하였다. 1938년 12월 16일 신조선사에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76책의 완간 출판기념회를 개최하는 데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실학과 정약용을 주목한 것은 민중본위를 중심으로 실제적인 이용후생을 강조한 ‘조선심’을 우리 역사의 본령으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문일평 『조선사화』 [판형1]

 

문일평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판형1]

 

문일평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판형1]

 

⋮박성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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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문일평 사진
  • 7. 호암사화집
  • 1. 문일평 가족사진(1930년대)
  • 3. 유준근외 12명의 판결문(사본)(1919.11.6)
  • 4. 호암전집(湖岩全集)
  • 5. 소년역사독본(少年歷史讀本)
  • 6. 조선사화(朝鮮史話,1945)
  • 2. 문일평 사진
  • 문일평_profile
  • 문일평 『조선사화』
  • 문일평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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