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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문정진 文靖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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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문정진
한자명 文靖珍
본 관 남평(南平)
이 명  
출신지 평남 강서(江西)
생몰년월일 1910. 7. 30 ~ 미상
운동계열 광복군
관련 단체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참가, 1937~38년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싱즈분교) 특별훈련반 수학, 1938년 조선민족혁명당 가입, 조선의용대 창립대원으로 1942년까지 항일공작 참여, 1942~1945년 한국광복군 제1지대원으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910년 7월 30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함종면(咸從面) 함종리(咸從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독립운동가 문일민(文一民)이다. 조선의용대 창립대원과 한국광복군 대원으로서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의 화중·화남전선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벌어졌을 때 항일시위에 참가하여 일본 경찰에 붙잡혀 유치되었다가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광저우(廣州)로 가서 중원중학(仲元中學)의 고급중학부를 다니고 졸업하였다. 1937년 9월 국립중산대학 농학원 농학계에 입학했는데, 항일투쟁 참여를 위해 곧 그만두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요청으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장시성(江西省) 싱즈현(星子縣)의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소시킬 한인 청년들을 널리 모집하자 바로 응모하여 중산대학의 다른 한인유학생들과 함께 난징(南京)으로 갔다. 중앙군교 특별훈련반 제6기 입교생으로 동년 12월부터 한 달간은 싱즈에서, 이듬해 1월부터 5월까지는 후베이성(湖北省) 장링(江陵)에서 다른 82명의 한인청년과 함께 훈련받고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1938년 5월 24일 졸업 후 김홍일(金弘壹)의 인솔 하에 후베이성 우창(武昌)으로 이동하여 대공중학교(大公中學校)에 숙영(宿營)하면서 가두연설, 가요 고창, 연극 공연, 전단 살포 등의 항일선전 활동을 개시하였다. 10월 10일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될 때 제1구대 대원이 되었고, 그 후 2주일간 우한보위전(武漢保衛戰)에 참여하였다.

10월 23일 우한에서 철수하면서 다른 39명의 구대원들과 함께 중국군 제9전구로 배속되어, 도보 행군과 선편으로 황화(黃華)·헝산(衡山)·핑장(平江)을 거쳐, 12월 3일 전구 사령부 소재지인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이듬해 2월까지 대화재(大火災)의 이재민 구제와 표어·벽보·가두보(街頭報) 제작 및 첨부·살포 등의 대민선전, 군내 정치선전 등의 구대활동에 동참하였다. 1939년 3월부터 10월까지는 후난성 북부 핑장 일대의 퉁청(通城)·샤오양(岳陽)·진산(芩山)에서 구대가 중국군 92군을 도와 벌이는 대적 진지선전 및 유격선전과 대민선전, 소학교 설립 등의 활동에 동참하였다.

1939년 11월 조선의용대는 3개 지대 및 2개 독립분대로 대폭 증편되었다. 이때 제1구대 병력은 제1지대 및 북진(北進)분대, 신편 제3지대 및 남녕(南寗)분대로 나뉘어 재배치되고 각 부대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대일작전을 폈는데, 당시 새 소속부대 및 활동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941년 1월부터 조선의용대의 3개 지대 병력 대부분이 북상하여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 집결한 후 황허(黃河)를 건너 태항산(太行山)의 팔로군(八路軍) 작전구역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화북행(華北行) 대오에 동행하지 않고 의용대 본부 소재지인 충칭(重慶)에 남았다.

1942년 12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어 제1지대로 정식 개편될 때 다른 38명의 잔류대원들과 함께 광복군에 배속되었다. 그 후 일본군 점령 지구에 침투하여 동포 초모공작에 종사하였다. 1942년 4월 1일 발행된 『조선의용대』 제42기에 1941년 12월 11일의 ‘형대전역’(邢台戰役, 호가장전투를 말함)에서 전사 순국한 네 명의 동지를 추모하는 시 「도사장사(悼四將士)」를 기고하였다.

1943년 10월 영국군이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전개 중인 대일전 지원을 위해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제2차로 특파하려던 공작원 16명의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중국 정부와 한국독립당의 반대로 증파 자체가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 후 계속해서 광복군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참고문헌|

金學鐵, 「黃埔軍官學校 13기(특별반 6기) 조선학생 명단」(手稿本) ; 李貞浩, 「26年度 新入志願 韓籍生 名單」, 1937. 8. 25 ; 경기도경찰부장, 「朝鮮義勇隊の內容に關する件」, 1939. 6. 29 ; 추헌수 편, 『자료 한국독립운동』 Ⅱ·Ⅲ,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2 ;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0·11권, 2006 ; 조선의용대, 『조선의용대통신』 제6·7·8·19·20·32기, 1939 ; 조선의용대 총대부, 『조선의용대』 제42기, 1942 ; 『경향신문』, 1968. 10. 18 ; 안병무, 『칠불사의 따오기』, 범우사, 1988 ; 김광재, 『한국광복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 최기영,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가의 삶과 투쟁』, 일조각, 2015 ; 김영범, 「조선의용대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 김영범, 「조선의용대의 항일전투(참가) 실적과 화북진출 문제 재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7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