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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수문 朴水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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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박수문
한자명朴水文
본 관 
이 명박수문(朴水問)
출신지전북 익산(益山)
생몰년월일1897. 7. 7 ~ 1937. 4. 2
운동계열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1919년 4월 4일 전라북도 익산군 이리시장, 4월 8일 용안면 만세시위 참여
포상훈격(연도)애족장(2015)

1897년 7월 7일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용안면龍(安面) 화배리(花盃里, 현 용동면에 속함)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박수문(朴水問)을 사용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에 재학 중이었는데, 4월 4일 이리읍(裡里邑) 이리시장 만세시위와 4월 8일 용안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고향으로 내려와 김종현(金宗鉉)·김철환(金鐵煥)·이시웅(李時雄) 등의 고향 유지들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金炳洙) 등을 만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 해 4월 4일 기독교계 인사 문용기(文鏞祺)·박도현(朴道賢) 등이 이끄는 이리시장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시장과 이리역 등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는 군중 1,000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였다.

이리 읍내 중심부에서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일제 경찰과 헌병대는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그 과정에서 문용기·박도현 등을 비롯한 5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는 참극이 발생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참가하였으나 다행히 피신할 수 있었다.

평화적 시위에 대한 일제의 야만적인 행위를 경험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그 해 4월 8일 고향 마을인 용안면에서 같은 마을 사람 길귀동(吉貴童) 등과 함께 다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마을 뒷산에 올라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제 경찰의 검거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붙잡혔다.

1919년 4월 23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군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석지훈⋮

|참고문헌|

「수형인명부」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