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노태준 盧泰俊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노태준
한자명 盧泰俊
본 관 풍천(豊川)
이 명 본명: 노아경(盧亞敬), 이명: 이무웅(李武雄)·노화경(盧和敬)·화향(和鄕)·조향(祖鄕)
출신지 황해 송화
생몰년월일 1911. 2. 17 ~ 1970. 2. 26
운동계열 광복군
관련 단체 군사특파단, OSS 국내정진대
관련 사건 광주학생운동
주요 활동 군사특파단, 한국광복군, OSS 훈련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68)

1911년 2월 17일 서울 계동(桂洞)에서 노백린(盧伯麟)의 2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풍해면(豐海面) 성상동(城上洞)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본명은 노아경(盧亞敬)이다. 이명으로 이무웅(李武雄)·노화경(盧和敬)·화향(和鄕)·조향(祖鄕) 등이 있다.

1916년 부친 노백린이 독립운동을 위해 미국 하와이로 건너간 뒤 일제의 감시와 생활상 어려움 때문에, 모친과 함께 고향인 황해도 송화로 내려가 어렵게 지냈다. 1921년 2월 노백린이 하와이에서 상하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에 취임한 뒤 가족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다. 인성학교(仁成學校)에 다니며 민족교육을 받았다.

1926년 1월 부친 노백린이 병환으로 사망하자 귀국하여, 큰 매형 내외가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강릉에서 강릉농업학교를 다녔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박승만·김화철 등과 함께 강릉농업학교를 중심으로 반일 학생시위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격문이 발각되어 시위는 불발되고, 박승만과 김화철 등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갔다. 이후 중국에 있는 사촌 노태연(盧泰然)의 부름을 받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노백린의 형 노진민(盧鎭民)의 아들인 노태연은 1934년 7월 무렵 난징시(南京市) 류예가(柳葉街) 56호에서 김구의 모친 곽낙원(郭樂園), 2남 김신(金信)과 거주하면서 김구와 밀접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1934년 8월 김인(金仁)·안춘생(安椿生)·고시복(高時福)·최덕신(崔德新)·김동수(金東洙) 등과 난징(南京)에 있던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졸업 후 중국군 제89사단 참모부에 복무하면서 김구 중심의 한국국민당에 가입하였고, 산하 청년조직인 한국국민당청년단 총무부장을 지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중국군과의 연합작전 수행과 장차 광복군 창건을 염두에 두고 한인청년 모집활동 등을 펼쳤다. 1939년 11월 조성환(曺成煥)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특파단이 시안(西安)으로 파견되었다. 임시정부의 군사 활동 거점을 확보하고, 화북지역의 한인사회를 대상으로 선전활동과 모병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중 안춘생·나태섭(羅泰燮) 등과 함께 군사특파단에 참여하여, 1940년 6월 안춘생·김광(金光)·서파·이영여 등과 같이 산시성(陕西省)으로 파견되어 린펀현(臨汾縣)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11월 시안에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서안판사처(西安辦事處)가 설치되고, 이듬해 1월 시안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면서, 군사특파단원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제1지대[지대장 이준식(李俊植)]에 편제되었다. 이때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동창인 안춘생·조인제(趙仁濟) 등은 중국군을 전역하고 제1지대의 광복군 간부로 활동하게 되었다. 1941년 3월 제1지대와 같이 산시성 지역으로 가서 1942년 4월 지대 개편 시까지, 광복군 대원 모집활동을 벌였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면서, 종래의 제1·제2·제5지대는 제2지대로 통합되었다. 이때 제2지 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제2지대는 산시성과 허난성(河南省)·허베이성(河北省) 지역에서 초모활동을 전개하여, 모집인원을 중국군 제34집단군에서 운영하는 중앙전시간부훈련단의 한국청년훈련반(이하 한청반)과 중앙육군군관학교 제7분교에서 훈련시켰다.

1945년 초부터 광복군과 미국 전략첩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가 국내 정진을 위한 ‘독수리작전’을 추진하였다. 이 한미연합작전을 위한 훈련이 시안 근교 두취(杜曲)에서 5월부터 3개월간 이루어졌는데, 제2지대 대원 30명과 함께 훈련에 참가하였다. 한청반 출신 19명도 이 훈련에 참가하였다.

8월 3일 훈련을 마친 1기생들을 주축으로 한반도 침투 작전이 추진되었다. 광복군에서는 도(道) 단위로 활동구역을 정하여 국내정진군을 편성하였다. 이범석(李範奭)이 총지휘를 맡았고, 평안도반·황해도반·경기도반을 지휘하는 제1지구대, 충청도반·전라도반을 지휘하는 제2지구대, 함경도반·강원도반·경상도반을 지휘하는 제3지구대로 되어 있었다. 이때 제2지구대장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국내정진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6월 3일 500여 명의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인천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이후 안춘생 등 광복군 동지들과 이범석이 결성한 조선민족청년단에 참여하여 조직부장, 서울시지부 단장, 부단장 등으로 일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에 임명된 이범석의 비서실장을 맡기도 하였다. 1949년 태양신문사 사장, 1951년 전쟁 중 복간된 태양신문사 회장에 선임된 바 있다. 이 신문은 1954년 장기영(張基榮)에게 판권이 이양되어 『한국일보』로 개제되었다. 1970년 2월 26일 사망하여 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지대장 노태준 이하 간부들 [판형1]

 

노태준과 광복군 제2지대대원들 [판형1]

 

 

⋮한상도⋮

|참고문헌|

사회문제자료연구회 편, 『사상정세시찰보고집』 3, 京都: 東洋文化社, 1974 ;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6·13·34·35·36, 2005·2006·2009 ; 『경향신문』, 1946. 10. 20 ; 『동아일보』, 1948. 12. 28, 1949. 1. 9, 1970. 2. 27 ; 『조선일보』, 1947. 3. 30, 1949. 2. 24, 1951. 11. 16, 1970. 2. 28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6권, 1975.
  • 한국광복군 제2지대 지대장 노태준 이하 간부들
  • 노태준_profile
  • 노태준과 광복군 제2지대대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