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복영 朴福永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박복영
한자명 朴福永
본 관 밀양(密陽)
이 명  
출신지 전남 신안(新安)
생몰년월일 1890. 1. 17 ~ 1977. 5. 23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암태청년회, 암태소작인회(암태농민조합), 조선노농총동맹, 무목청년연맹, 조선농민총동맹
관련 사건 암태청년회, 암태소작인회(암태농민조합), 조선노농총동맹, 무목청년연맹, 조선농민총동맹
주요 활동 1919년 4월 8일 전라남도 목포부 양동 만세운동 참가, 1923년 암태청년회 회장,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 참가, 1925년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 및 무목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 1926년 자은도 소작쟁의 참가, 1927년 조선농민총동맹 중앙검사위원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890년 1월 17일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岩泰面) 단고리(短庫里)에서 박찬서(朴贊西)와 김포금(金抱琴)의 4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천정진(千亭振)에게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15세에 김영신(金英信)과 결혼하였다. 1908년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맥칼리(Henry Douglas McCallie, 孟顯理) 의 성경학원(聖經學園)에 입학하여 신학을 수학하고 이후 기독교 전교 활동에 임하였다.

1919년 4월 8일 전남 목포부(木浦府) 양동(陽洞)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목포에는 일본 도쿄(東京)에서 2·8독립선언에 참가하고 돌아온 유학생 남궁혁(南宮赫) 등에 의해 일찍부터 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사실이 전해졌다.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 역시 곧바로 전해졌다. 이에 서상봉(徐相鳳)·곽우영(郭宇英)·서화일(徐化一)·박여성(朴汝成) 등 양동교회(陽洞敎會)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하고, 영흥학교(永興學校)와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 학생들을 이끌기로 계획하였다. 또한 박상렬(朴相烈)·오도근(吳道根)·김영주(金永周)·권영례(權寧禮)·오재복(吳在福) 등 지역 청년들도 만세운동을 준비하여, 목포공립상업학교(木浦公立商業學校)와 목포공립보통학교(木浦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4월 8일 새벽부터 선언서·경고문·태극기 등이 집집마다 투입되며 만세시위가 준비되었다. 오전 10시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거리에서 울려 퍼지자, 일본 경찰과 일본군은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만세시위는 그치지 않고 오후 2시 죽동(竹洞) 일대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일본 경찰에 의하여 해산되고, 주도자 일부가 붙잡혔다.

이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경찰 조사 후 4월 17일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19년 6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이후 무안·목포지역의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에 힘썼다. 1923년 암태청년회(巖泰靑年會) 회장을 역임하고, 1924년 암태소작인회(巖泰小作人會) 회장 서태석(徐邰晳)이 투옥되자 실질적으로 암태소작인회를 이끌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3~1924년 소작인들이 소작인회를 결성하여 지주에게 7~8할의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해 줄 것을 요구하며 일어났다. 1924년 8월 30일 목포경찰서 서장실에서 전라남도 경찰국의 고등과장 중재로 지주 문재철(文在喆)과 약정서에 서명할 당시 소작인회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1925년 암태소작인회를 대표하여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조선사회운동자동맹(朝鮮社會運動者同盟) 발기준비위원회에 참석하였다. 또한 무안과 목포지역 청년회 연맹체였던 무목청년연맹(務木靑年聯盟) 상무집행위원을 지냈다. 1926년 암태소작인회를 암태농민조합으로 전환하여 농민운동을 지속하였으며, 동아일보 목포지국장에 취임하였다.

한편, 교육사업에도 적극 나섰다. 1920년 암태청년회에서 설치한 여자강습원이 암태사립3·1학사로 발전하자, 이를 통해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의 지원을 토대로 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6년 암태남녀학원장을 역임하고, 1928년 자은도 백산리(白山里)에 백산학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25년 8월 섬 지역 지주들이 다도농담회(多島農談會)를 구성하고 5할의 소작료를 제시하며 1924년 8월 암태도 소작쟁의의 합의를 파기하자, 당해 수확분을 둘러싸고 암태도·도초도·자은도 등에서 1926년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소작쟁의가 발생하였다. 자은도 소작쟁의가 격화되자 1925년 12월 25일 김옥석(金玉石)·문옥산(文玉山) 등과 함께 입도하여 소작인회 집행위원으로서 나섰다. 12월 26~27일 목포경찰서 파견 일본 경찰과 도민(島民)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일본 경찰은 1월 3일 180여 명의 경찰관을 자은도로 급파하였다. 이때 소작인회 간부들과 함께 붙잡혀 목포로 이송되었다. 소작쟁의는 1월 30일 목포경찰서에서 무안군수·목포경찰서장·자은면장 입회 아래 협정을 세워 일단락되었다.

자은도 소작쟁의를 선동한 주범으로 지목되어 1926년 7월 1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예심에서 이른바 소요, 공무집행방해가 인정되어 정식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1926년 8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월(미결구류일수 6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27년 5월 17일 풀려났다.

출옥 이후 1927년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 중앙검사위원을 맡았다. 1928년 2월 하의도(荷衣島) 토지소유권 분쟁 관련하여 조선농민총동맹 대표로서 진상조사위원으로 파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복영 출옥 보도(『동아일보』 1927. 5. 25) [판형1]

 

⋮김정아⋮

|참고문헌|

「수형인명부」(자은면) ; 「密 第102號 其194/朝特 第97號/第17號 電報 : 4月 8日及9日ノ狀況」, 1919. 4. 10,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京鍾警高秘 제12349호의 2, 조선노농총동맹 집행위원 개선의 건」, 1925. 11. 2, 『檢察事務에 關한 記錄 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매일신보』, 1919. 4. 20 ; 『조선일보』, 1926. 1. 5 ; 『동아일보』, 1926. 1. 14, 8. 21, 1928. 2. 26 ; 정병준, 「암태도 소작쟁의 주역의 세 가지 길–서태석·박복영·문재철」,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1, 2007 ; 이정선, 「일제시기 자은도 소작쟁의의 전개 과정과 특징」, 『島嶼文化』 56, 2020.
  • 박복영_profile
  • 박복영 출옥 보도(『동아일보』 1927.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