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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문일민 文一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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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문일민
한자명 文一民
본 관 남평(南平)
이 명 호: 무강(武剛), 본명 : 희석(熙錫) 이명 : 문강(文剛)·문일민(文逸民)·문현철(文賢哲), 중국명: 왕량(王良)
출신지 평남 강서(江西)
생몰년월일 1894. 12. 10 ~ 1968. 10. 17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신흥무관학교, 대한청년단연합회, 병인의용대, 한국독립당, 흥사단, 상해대한인교민단, 신한민주당
관련 사건 평남경찰서 폭파 의거,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 의결
주요 활동 1920년 8월 평안남도경찰부에 폭탄 투척, 1925년 이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 임시정부 근무.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62)

1894년 12월 10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함종면(咸從面) 함종리(咸從里)에서 문명순(文銘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호는 무강(武剛)이다. 처음 이름은 희석(熙錫)이었으며, 이명으로 문강(文剛)·문일민(文逸民)·문현철(文賢哲) 등이 있고, 중국명은 왕량(王良)이다. 부인 안혜순(安惠淳, 2019년 건국포장)과 장남 문정진(文靖珍, 1990년 애족장)도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함종의 함일학교(咸一學校)에서 수학하였다. 평양에서 물산위탁 판매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919년 만세시위에 참가한 다음, 그 해 7월 남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졸업 후 한족회(韓族會)의 명령으로 평양에 잠입하여 애국청년회(愛國靑年會)의 연락과 조직 강화 활동을 벌이고 만주로 돌아갔다.

1919년 12월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여 별동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청년단연합회에서 1920년 9월 18일 미국 국회의원단의 방한에 맞추어 국내 주요 도시의 일제 기관 폭파와 일제 요인 암살 등의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사를 국제 사회에 알리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를 위해 국내에 파견되는 행동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당시 광복군총영에서는 서울·평양·신의주와 선천 방면으로 3개 행동대를 파견하였는데, 이때 장덕진·박태열(朴泰)烈·우덕선(禹德善)·김예진(金禮鎭)·안경신(安敬信) 등과 평양에 파견되는 제2대에 속하였다.

대장 박태열을 비롯하여 표영준·우덕선·김예진·안경신 등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평남 안주군(安州郡) 입석(立石)에서 일본 경찰 한 명을 사살하고 평양 시내로 잠입하였다. 이들은 1920년 8월 3일 밤 9시 50분 평안남도경찰부 청사에 폭탄을 던져 장벽 일부를 파손시켰고, 같은 시각 평양부청과 평양경찰서에도 폭탄을 던졌다. 우덕선과 같이 피신 중 칠성문 부근에서 일본인 순사를 사살한 다음, 우덕선·박태열·장덕진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돌아갔다. 하지만 함남 이원(利原)에 피신하여 은신 중이던 안경신은 붙잡혀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이때 박태열·장덕진·우덕선 등과 함께 궐석판결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국내에 남아 활동하던 표영준도 붙잡혀 무기징역을 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9월 상하이 싼위대학(三育大學)에 입학하였다가, 1924년 중국 윈난강무당(雲南講武堂)에서 수학하였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2월에 열린 제1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최석순·강창제(姜昌濟)·강경선(康景善)·나창헌·김현구(金玄九)·채원개 등과 함께 ‘임시헌법 제22조 제14항에 의거하여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심판에 회부하기로 결의’하는 의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1926년 침체 상태에 처한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임시정부의 안전을 강화할 목적으로, 박창세(朴昌世)·강창제·이수봉(李秀峰)·이운환(李雲煥) 등과 상하이거류민단 의경대(義警隊)를 주축으로 조직된 병인의용대 결성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정의부로 가서 군사참모주임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2월 1일 열린 한국노병회 이사회에서 특별회원으로 입회가 허가되었고, 1930년 3월 상하이로 귀환하여 잠시 중국군 상교(上校)로 복무하였다. 1930년 5월 흥사단에 239단우로 입단하였다.

1933년 1월 15일 상하이에서 소집된 한국독립당 대회에서 이동녕 등과 감사에 선임되었다. 1935년 2월 15일 개최된 제7차 대회에는 유진동과 함께 ‘제4구 대표’로 참석하였다. 1934년 봄 박창세·차리석 등과 항저우(杭州)로 옮겨, 한국독립당 사무소에서 김사집·이창기·이중환·이상일 부부·박경순 부부와 함께 생활하였다. 같은 해 7월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사무소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 사실이 포착되면서, 11월 초순 항저우시 서대가(西大街) 도항리(濤桓里) 12호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전 직전인 10월 30일부터 11월 3일까지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었고, 조완구·신공제와 함께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 상하이 대한인교민단의 간부로도 활동하였다. 1933년 5월 당시 정무위원이었으며, 1934년 6월 시점에서 서기를 맡았다. 교민단 활동과 관련하여 일본측 자료에는 “1934년 1월 김홍서(金弘敍)가 정무위원장에 취임하고, 같은 해 3월 1일 교민단 정무위원회 명의의 ‘3·1절 기념 선언’을, 같은 해 8월 29일에는 ‘국치기념 선언’을 발표하는 등, 양기탁·문일민 등과 함께 교민단의 활동 강화에 분주하였다”고 활동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광동지부장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9월 “김원봉 일파의 공산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싫증을 느끼고” 박창세·조소앙 등과 탈당하여 한국독립당 재건을 선언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로부터 시작하여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의 피난 과정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 계속 참석하였다. 이어서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 안착한 후 1941년 10월 15일 열린 제3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출석하였다. 1942년 10월 25일 열린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상임위원회 제3과(재무·예산·결산)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0월 28일에는 최동오·조완구·이복원·조성환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최단기간 내에 중·미·영·소 등 연합국 정부에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건’ 제안에 참여하였다. 이튿날인 10월 29일에는 신영삼·왕통·한지성과 ‘국가와 군가 제정’안을 제안하였다.

1943년 4월 2일 임시정부 교통부 총무과장에, 1944년 10월 23일에는 참모부 참모에 임명되었다. 1943년 10월 9일 열린 제35회 임시의정원의 회기 중인 11월 회의에서 “굶어 죽을 각오로” ‘한국광복군 활동 9개 기준’의 무효를 선언하자고 주장하였다. 1944년 4월 14일 소집된 조선민족혁명당 제8차 대표대회에서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되었다. 1945년 2월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한 유동열·신영삼·신공제·강창제 등을 중심으로 한 신한민주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45년 4월 11일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도 상임위원회 제3과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일본의 패망이 가시화된 시점인 1945년 8월 13일에는 박건웅·손두환·유동열·김약산 등과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장차 성립될 전국 통일적 임시의회에 봉환하기로 하고, 임시의정원의 직권을 정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의안 제안에 참여하였다.

일제 항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개회한 제39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8월 23일 손두환·유동열·김약산 등과 “국내 및 국제적 정세에 비추어 현 내각은 즉시 총사직하고 간수내각(看守內閣)을 조직하여 시의(時宜)에 필요한 일체 시급한 사무를 처리토록” 하자는 의안을 제안하였다.

광복 후 국내로 돌아와 1947년 2월 국민의회의 노농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0월 25일 중앙청 입법의원 의사당 복도에서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사회정세를 통열히 비판하고 정치지도자의 각성을 촉구하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1950년 3월 29일 ‘애국애족 사상을 선양하고 애국선열의 기념사업을 추진’할 목적으로 발족한 애국정신선양회의 이사장을 맡았다. 1953년 ‘혁명 선열의 사적 편찬과 유가족에 대한 원호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발족한 애국동지원호회에 참여하였다. 1956년 애국동지원호회 회장으로 『한국독립운동사』 저술을 주도하였으며, 독립운동사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1960년 4·19혁명 뒤 신숙(申肅) 등과 구국연맹을 조직하여 중앙본부 부위원장을, 1963년 3월에는 애국동지회 부회장을 맡았다. 1968년 별세하기까지 광복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문일민이 제안한 ‘국가와 군가 제정안’ [판형1]

 

⋮한상도⋮

|참고문헌|

; 『동아일보』, 1929. 12. 10, 1934. 10. 20, 1947. 10. 26, 1950. 4. 10, 1968. 10. 25 ; 『조선일보』, 1929. 12. 9·10, 1934. 10. 29, 1947. 2. 27, 10. 26, 1956. 1. 5, 1957. 8. 30, 1961. 3. 18, 1963. 3. 6, 10. 20·23·26 ; 추헌수 편, 『자료 한국독립운동』 2, 연세대출판부, 1972 ; 社會問題資料硏究會 編, 『思想情勢視察報告集』 2·5·9, 京都 : 東洋文化社, 1976 ;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편, 『도산안창호전집』 10권, 2000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6, 2001 ; 대한민국 국회도서관 편, 『晩悟洪震全集』, 2006 ;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1·33·37·45, 2009·201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7권, 1976 ; 裵淑姬, 「中國 雲南陸軍講武堂與韓籍學員-以『同學錄』的分析爲中心」, 『중국사연구』 5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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