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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모충이 牟沖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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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모충이
한자명 牟沖伊
본 관 함평(咸平)
이 명 모준이(牟俊伊)
출신지 경북 청송(靑松)
생몰년월일 1883. 4. 4 ~ 1960. 4. 19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정용기 의병부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정용기 의병부대에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883년 4월 4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오두면(烏頭面) 오두동(烏頭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이명은 모준이(牟俊伊)이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분개하여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가 이끄는 산남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대장 정용기가 사망한 후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이 산남 의병부대를 이끌었으나 그마저 잡혀 총살당하였다. 이후 산남 의병부대가 구심점을 잃게 되자 재기를 위해 군자금 모금 활동과 친일세력 처단 활동을 펼쳤다. 1908년 6월 박신재(朴新材) 등과 함께 경북 청하(淸河) 세목동장(細牧洞長)으로부터 20원을 군자금으로 징수하였다. 그 해 8월 3일 밀정으로 활약하던 청하군 소사(小使) 정말범(鄭末凡)을 처단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일본군 수비대에 탐지되면서 경북 영일군 관학산(冠鶴山)에서 붙잡혔다.

1908년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암살 및 강도로 종신형을 받았다.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9월 29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10월 23일 대심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옥고를 치르다가 1912년 이른바 ‘칙령(勅令) 제23호’에 의해 징역 12년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1916년 ‘칙령 제104호’에 의해 징역 9년으로 감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판결문(대심원, 1908. 10. 23) [판형1]

 

⋮권영배⋮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1908. 9. 4 ; 「판결문」, 대구공소원, 1908. 9. 29 ; 「판결문」, 대심원, 1908. 10. 23 ; 김희곤 외, 『청송의 독립운동사』, 2004.
  • 판결문(대심원, 1908. 10. 23)